#4 드넓고 조용한 동물원을 걸어다니면서, 그렇게 대화를 꽤 했나봐. 점심도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마크가 어설프게 웃더니 I'm OK. 하면서 손사레를 치는거야. 왜지? 왜 굳이.. 왜.. 라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싫다는 애 붙잡고 억지로 앉아서 밥을 먹을 수는 없으니 카페테리아에서는 따로 앉았어. 대충 싸온 샌드위치를 먹어치우고는 손을 탁탁 털면서 다시 돌아다닐 생각으로 쭉 걸어가다보면, 먹는 속도가 나랑 비슷했었는지 저 앞에 마크가 다시 보이길래 이번엔 내가 조금 빠르게 걸어서 그 애를 붙잡았어. 똑같이 Hey, 라고 부르면서. 그랬더니 내 뒤를 살피더니 점심 맛있었냐고 묻더라고. 같이 먹어주지는 않아놓고, 그런건 물어봐? 살짝 눈을 흘기며 대답했더니 미안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더라. 나랑 얘기하면, 네가 곤란해지니까. 애들은 그런 가십 좋아하거든. 덤덤하게 말하는데 또 납득은 가는 말이라 고개 끄덕여지더라. 가뜩이나 동양인 여자애라고 수근거리는 버러지들 많은데, 거기에 마크까지 엮이면 남은 3주 어떤 소리를 들어댈지 뻔하더라. 그래서 그 이야기는 대충 어깨 뒤로 흘려 넘기고 다른 이야기 하면서 남은 자유시간을 돌아다녔어. 우리가 커서 그런가, 커다란 동물들이 잔뜩 있는게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흘끗흘끗 바라보면 눈치 빠르게 구경할래? 라고 물어봐 주는 덕에 돌아다니기는 수월했어. 섭섭한 거는 그러고 돌아오는 버스에서도, 그 이후에도 나한테 다시 말을 걸지 않았다는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번호라도 물어봤지 싶더라. 물론, 싼 값에 로밍해 온 폰으로는 연락도 별로 못하겠지만 말이야. 그런 심정이었다고. #5 토요일에는 소풍이었고, 그 다음 날인 일요일에는 우리 엄마랑 같이 벤쿠버 다운타운에 갔어. 공부하고 나서 놀러가는 거랑은 또 달라서 아침부터 별별 오바를 떨면서 준비했지. 근데 나 스스로도 좀 속상했던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세팅하면서도 나 너무 걔네가 생각하는 “한국인” 스럽지 않나 를 고민하더라니까. 이건 다 *같은 인종차별주의자들 때문이야! 하면서 꿋꿋하게 “내 스타일”로 꾸미고 나오긴 했지만 말이야. 엄마랑 나란히 거리를 걸어다니면서 서점에도 들어가보고, 커피향이 좋다며 카페에 홀린 듯이 들어가도 봤어. 아, 돌아다니니까 많이 덥더라. 나시 위에 남방 입은 채였는데 더워서 펄럭이다 못해 나중에는 벗어서 허리에 둘러버렸어. 조금 부끄럽긴 했는데 여기는 다들 그러고 돌아다니던 걸? 엄마가 살 게 있다며 들어간 백화점도 구경하고 이리저리 몇 군데 더 돌아다니고 나니까 해가 지려나 어둑어둑해지더라고. 이제 그만 들어가자는 엄마의 말에 나는 이번에는 스카이트레인 말고 버스를 타고 가자고 졸랐어. 신기했단 말이야, 선으로 연결된 버스. 그래서 열심히 찾고 찾아 우리가 머무는 아파트까지 가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어. 한창 소란스러운 상가 거리에서는 멀리 있던 터라 잔잔한 소란이 마음에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농구 코트에서 남자애들 여럿이 공을 튕기고 있더라. 마크가 생각나서 좀 유심히 보는데, 이걸 인연이라고 하나? 진짜 마크가 거기 있더라. 헤어밴드를 하고, 반팔 소매는 다 걷어 붙인 채로, 같은 팀에게 뭐라고 소리치며. 그 모습을 딱 보는데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거 였어. 쟤는 참, 다양한 아이구나. 캠프에서의 무심한 회색빛의 눈, 동물원에서의 들뜬 듯한 갈빛의 눈, 그리고 농구 코트 위에서의 그 승부욕에 찬 새까만 눈까지. 분명 같은 사람인데 얼굴이 살짝 다르게 보일 정도로 표정이 뚜렷하더라고. 그래서 홀린 듯이 계속 바라봤어. 옆에서 엄마가 나를 툭툭 건드리며 저 버스 아니야? 라고 물어볼 때까지. #6 다음 날이 바로 등교라니, 첫째주에는 별 생각 없었는데 두번째 주에 들어서자마자 억울해지더라. 내 방학이! 갑자기 캠프로 등교하는 날들로 가득찼어! 툴툴 거리고 있으려니까 엄마는 네가 선택한 일이라며 내 등을 팡팡 치고는 가는 길에 도넛이라도 사먹으라고 지폐 몇장을 줬어. 이걸로 팀 홀튼 가서 동그란 도넛 사서 먹으면서 가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팔 앞뒤로 흔들며 걷다가 학교 건물 근처 코너에 있는 팀 홀튼에 딱 들어갔어. 아침이라 그런가 도넛 종류가 꽉꽉 차 있더라고. 그래서 그 진열장 앞에 서서 도넛을 쭉 둘러보는데 옆에서 한국어로 마크가 아, 섭섭하다아~ 하는 거야. 난 진짜 정말 진심으로 걔가 있는 줄 몰랐어. 그래서 파드득 놀라면서 어, 하이. 하니까 걔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하이 하고 손을 흔드는거야. 그러더니 내 옆으로 붙어서면서 왜 인사 안 해줬냐고. “Sorry I really didnt know that you are here!” “Then how about this doughnut as an apology?” 진짜, 뻔뻔한데 진열장 위로 글레이즈 도넛을 콕 집는 손이나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나 어디 하나 덜 생긴 구석이 없어서 (잘생겼다는 소리야) 캐셔에게 가서 그 도넛이랑 , 내 도넛을 한꺼번에 샀어. 건네받아서 뒤도는데 마크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기다리고 있더라. 아니 얘는 덥지도 않나 이 날씨에도 위아래 까만옷을 입고. 그런 생각을 하며 도넛을 내미니까 자기는 여기서 다 먹고 갈거니까 나 먼저 가래 지각하지말고. 말은 그렇게 하는데 결국 또 따로 걷자는 소리인 줄 내가 모를까봐? 그래도 그냥 알겠다고 고개 끄덕였어. 배려를 무시하는 건 도리가 아니니까 #7 당연히 나는 지각을 안 했고, 마크는 지각을 했어. 아무도 신경 안 쓰기는 했지만 애들 다 그렇게 생각했을걸. 쟤 또 지각이네. 그걸 지켜보는 나는 손끝으로 책상만 두드렸고. 덥다 덥다 불평을 해서 그런가 오늘따라 냉방이 짱짱한데 거기에 생각을 좀 많이 했더니 수업 놓치고 두통 앓기 딱 좋은 상황이 됐어. 정말이지 칠판 앞에 선 로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왼쪽 귀로 들어오다가 오른쪽 귀로 나가더라. 아니 이상하잖아. 굳이 나를 배려한답시고 본인이 지각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그럼 평소에는 왜 지각했지? 나처럼 다른 애랑 마주쳤던 걸 안 마주친 척 하려고? 아니 나랑 모르는 사이인척 하고 싶으면 동물원 가는 버스는 왜 내 옆에 탔지? 대체 왜?? 아니 농구할 때 보면 옆사람 껴안고 세레모니 하고 세상천지 사람중에 제일 친화력 좋아보이더니 대체 왜!! 나 진짜 책상 내려칠 뻔 했는데 타이밍 좋게 고민의 주인공 께서 등장하시잖아. 그것도 내 입에 물려있던 포크 빼주면서. 무슨 일 있어? 실실 웃으면서 물어보지 말라고! 물어볼 건 내가 더 많은.. 데.. “Nothing.” 그럼 그렇지.. 대놓고 물어볼 용기는 또 안 난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카페테리아에는 나 혼자. 응, 그러니까 얘가 나한테 다가왔겠지. 뭘 바라냐. 게다가 내 앞에 앉는 것도 아니고 포크를 다시 바르게 놔주면서 도넛 고맙다며 음료수 하나를 내 앞에 두고는 뒷문으로 나가버리더라. 어? 어어. 근데 그리고는 그 날 오후 수업 안 들어왔다. 얘는 양아치일까 스윗가이일까? **** 암호닉 신청과 댓글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 암호닉 : 동쓰 베리 딸랑이 하라하라 혀긔 메리 슈비두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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