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인은 문득, 경수를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났다.
경수에겐 처음 만난 날이었겠지만, 종인에겐 처음이지만 처음이 아니었던 그 날을.
"어, 그 시계. 어디서 사셨어요?"
종인은 아무것도 모르는척 경수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저에게 말을 걸었다는것에 경수는 당황할만도 하건만
마치 원래 아는 사이였다는듯 자연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다른 곳에서 수입해 온거에요, 제가 시계를 좀 좋아해서.' 라고 대답했다.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그 말투가, 제가 지금까지 만나온 수많은 부잣집 도련님과는 사뭇 달라서. 종인은 그때 속된말로 배알이 꼴렸었다.
학력에, 외모에, 집안에, 성품까지. 가히 재벌집에서 사윗감 1위로 뽑는 도련님은 다르구나 싶어서. 잘자란 경수가 너무 부럽고, 재수없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수는 아예 자신의 쪽으로 몸까지 돌려가며 시계에 관심 많으신가봐요? 하고 되물어왔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풀렸다, 일이. 경수와는 그 뒤로도 마음이 잘 맞는 친구인척 행동해왔다.
경수는 자신과 저가 같은 학교라는 사실에 놀라하며 제 원룸에 제 본가에 제 가족에게 나를 들여왔다.
내가 그와 처음 만났던 그 파티장도 자주 다닌다는 고급 커피숍도, 같은 학교라는 것도 경수가 부잣집 아들이라는 것도 그가 게이라는 것도
심지어 처음 경수가 끼고있었던 그 시계가 그냥 그저 그렇게 수입해온 시계가 아닌 몇억원을 호가하는 시계라는 것까지. 저는 모두 알고 있었다는 것을
경수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경수는 자신을 돈에 구속받지 않고 모든 것을 털어놓을수 있는 유일한 친구로 생각해 주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제 속셈을 알았다면, 제 아무리 경수라도 저에게 진저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을 테니까.
무슨 생각으로 접근했던지 간에, 경수에게도 저에게도 윈윈인 장사니 죄책감은 없을것이라 생각했는데.
여느날과 다름없던 그와의 술자리 도중, 저의 집 원룸과 대학 등록금을 대주는 여자에게서 갑작스럽게 연락이 왔었던 적이 있었다.
제 남편이 급하게 출장을 가게 되었다고, 자신의 집으로 와줄 수 있냐는 여자의 부탁에 나는 경수에게 잠시 화장실에 간다고 한뒤
그 여자의 집으로 달려갔었다. 그냥 급한 약속이 생겼으니 헤어지자고 한마디만 하면 될것을 저는 왜 그렇게 거짓말까지 하며 경수를 거기 남겨두었을까.
경수가 저를 기다려주기를 원했던 것일까, 아니면 저에게 한번도 화낸적 없던 경수가 화내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못된 심보였을까.
아무튼 그 여자와의 짧은 만남 뒤 집으로 돌아왔을때 휴대전화에는 경수의 부재중 통화가 딱 두통 와있었다.
왠지 모를 더러운 기분에 다시 전화도 걸어주지 않고 잠에 들었었는데 다음날 아침 다시 한번 걸려온 전화에 종인은 아픈척도 하지 않으며
어제는 그냥 아파서 집에 와버렸다고, 미안하다고 성의없는 사과를 전했었다.
삼십분뒤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경수가 제 집 대문을 두드렸을때 부터였을까. 종인은 저가 경수보다 더 자신과 경수의 사이에 집착하고 있었음을 깨닳았다.
이제 경수가 자신때문에 우는 것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경수가 자신 말고 더 허울없이 친한 친구를 만나는것도. 애인을 사귀는것도 다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경수와 올해 딱 10년. 서로 사귀자는 말은 따로 하지 않았지만 경수와 자신은 암묵적으로 연인 사이나 다름없었다.
경수의 집안이 집안이다보니, 저와 언제까지나 이렇게 우정을 가장한 연인놀이를 할 수 있을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막상 이렇게 경수가 떠나야 할때가 되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제 직업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싫다고 하고 싶지 않다고 한들, 경수는 어떻게든 하게 될것이었다. 결혼은 경수의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차피 해야 할 결혼, 경수 어머니의 말대로 철없는 학생도 아니고 패기넘치는 이십대도 아닌 저가 어린애처럼 굴며
경수의 결혼을 반대하고 시간을 끌어봤자 더 상처받는 쪽은 경수였다. 차라리 제가 악역을 맡아주는것이 경수에게도, 저에게도. 제일 좋은 방법일 것이다.
"넌 같이 밥 먹기로 해놓고 왜 이렇게 깨작거려, 뭐 할 말 있어?"
뜬금없이 들려온 경수의 목소리가 저를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제 앞에서 저녁 레스토랑의 메인 요리를 썰고 있는 경수는 처음 만났을때와 그다지 달라진 것 없는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랬다 경수는, 저런 고급 요리를 썰고 있는것이 어울렸다. 입에 맞지도 않는 싸구려 길거리 음식보다는 저런 음식이. 경수에게 더 잘 어울렸다.
"..너희 어머님이 찾아오셨더라."
"엄마가? 엄마가 왜. 왜, 엄마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그래서 기분이 별로인거야?"
쥐고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에 소리나지 않게 내려놓고 경수는 제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궁상맞게 행동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왜 엄마가 너한테 뭐라고 하던데, 말해봐."
종인은 물을 한잔 들이켰다. 어릴적 아무도 없는 낡은 대문을 열어재끼며 항상 생각했었지. 이 구질구질한 집에서 벗어나겠다고.
아버지에게서부터 저에게까지 끈질기게 따라오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의 냄새를 떨쳐버리겠다고.
그럼에 있어서 경수는 제게 걸림돌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수 어머니의 말씀대로 저도 이제 결혼 할 나이였다.
지금까지 쌓아온 인맥으로, 적당히 돈 많은 집안의 아가씨나 꼬셔서 적당히 결혼하고 애도 낳고. 그렇게 안정적인 삶이 진정 내가 원하던 것이었으니까.
"네 신붓감 보여주시고 가셨어."
수다스럽던 경수의 입이 순식간에 닫혀졌다. 종인은 생각보다 담담한 저 자신에게 꽤나 놀라며 양복 안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인주그룹 둘째딸 사진을 경수에게 내밀었다. 경수의 손이 제 손에서 그 여자의 사진으로 옮겨갔다.
꽤나 미인이었다. 품평도 나쁘지 않았고 집안도 어디 내놓아 빠지는 집안은 아니었다. 여러모로 경수에게 잘 맞는 여자였다.
"..미안, 엄마 이런짓 하지 말라니까."
경수가 어색한 손길로 여자의 사진을 잡아들었다. 사진을 허겁지겁 제 주머니에 쑤셔놓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며
식사를 시작하는 경수가 어쩐지 평소보다 더 작아보이는 기분에 종인은 다시 한번 물을 들이켰다.
이런 말을 내뱉는거 꽤나 힘들고 떨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덤덤한 자신에게 종인은 조금 진저리가 처졌다.
"아니. 경수야. 너도 이제 결혼.. 해야지. 우리 이제 서른도 넘었잖아.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 없는거 니가 제일 잘 알지않냐."
경수의 칼질이 멈추는 대신 제 손짓이 빨라졌다. 더 이상 음식을 입에 쑤셔 넣었다간 체할것 같은 기분이었다.
종인은 급하게 옷과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수는 여전히 아까 그 모습 그대로인 채였다.
"니 결혼.. 내가 알아서 준비할께."
이제는 경수도 저도. 현실을 바라봐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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