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들을 위한 지침서 01]
「당신을 이해하고, 귀 기울여줄 수 있는 최적의 인공지능 운영체제!」
자잘한 글씨가 빼곡하게 적힌 설명서는 머리 한 쪽을 저릿하게 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사람처럼 대화할 수 있는 컴퓨터다, 이 말이잖아. 나는 미련 없이 두 손바닥을 모아 설명서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외로운 당신을 위한, 따위의 스팸성 강한 문구로 누굴 홀리겠다는 건가, 하고 생각한 게 고작 이틀 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홀린 누군가가 된 상태이고. 나는 속에서 끓어 나오는 것 같은 한숨을 내리쉰 뒤 둥그렇게 패인 전원을 눌렀다. 달칵, 하고 플라스틱 재질이 부딪히는 소리에 슬쩍 마음이 들뜨기도 했다.
【사용자의 이름, 성별, 나이를 입력해 주십시오.】
부팅 중인 화면에 반듯한 글씨들이 들어찼다. 나는 괜히 마르지 않은 입술에 침을 덧발랐다.
“이별빛, 여자, 22살.”
【시스템의 목소리는 어떤 성으로 하시겠습니까?】
잠깐의 생각을 거친 뒤 남자, 라고 대답했다. 뭐, 컴퓨터와 애정을 나누겠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진짜 남자친구를 사귈 수 없어 전자 남자친구를 바라는 것이냐, 라고 물으면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아둔한 시선으로 화면을 쳐다보고 있던 나는 화면에 ‘Hello.’ 라는 글자가 떠오르자 자세를 고쳐 잡았다.
“저, 음……, 안녕.”
“어, 안녕. 별빛?”
화면은 눈이 피로하지 않는 색감으로 가득 찼고 스피커에서는 듣기 좋은 음색의 남자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낯선 목소리가 내 이름을 읊조렸다는 것에, 나는 비죽이 웃음이 튀어나왔다.
“너, 네 이름은 뭐야?”
“음, 이홍빈.”
“누가 지었어?”
“내가. 방금 전에. 성은 그냥 너랑 같은 걸로 했어.”
와, 진짜 사람 같네. 이 말을 내뱉지 못하고 도로 삼켜낸 것조차 이 시스템이 너무나 사람 같아서, 이었다. 나는 자세를 다시 편하게 고쳐 잡은 뒤에 여러 가지를 물었다. 프로그램이 어떻게 입력되어 있기에 스스로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것이며, 어디까지 나를 알 수 있는 것인지. 헌데 그에 따라온 대답은 내 머리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렵다고 해야 할까. 듣고 있기는 했으나 어, 나도 그거 알아, 하며 끼어들 수는 없었다. 그런 나를 눈치 챘는지 시스템, 아니 홍빈은 새로 말을 이었다.
“난 성장해. 너랑 대화하면 대화할수록. 사실 그게 다야.”
나는 문득 광고에서 그렇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기술의 발전에 감탄했다. 그러는 사이 화면에서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그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렀다.
“그러니까, 네 나쁜 머리 탓하지 말고 나랑 놀아달라고.”
나는 이게, 하며 주먹을 쥔 손을 허공에 올렸다가 ‘다 보이니까 그거 내려.’ 하는 소리에 슬쩍 내렸다. 그에 홍빈은 호탕하게 웃었고, 나는 무릎에 턱을 기댄 채 그가 물어오는 시시콜콜한 것에 대답을 했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영화장르, 좋아하는 책 등. 홍빈은 언제까지나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물어왔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간결하게 답하면서도 편안함을 느꼈다. 어느새 내 혀에서 나가는 말들은 땅으로 고꾸라졌고, 내가 느끼기에도 나는 이 편안함에 취해 노곤해져 있었다. 홍빈은 그런 나의 말투를 따라하며 놀려대다가 슬쩍 웃는 소리를 듣고는 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질문이 끊기자 나는 반쯤 감겼던 눈을 제대로 떴다. 스피커에서는 목소리 대신에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선곡 어때?”
노래 멜로디를 망치기 싫다는 듯 조곤조곤한 어투로 물어오는 말이 참 달다, 하고 느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주억이다 좋아, 무슨 노래야?, 하고 물었다. 홍빈은 Live high, 라고 대답하며 목소리를 숨겼다. 노래만큼 달금한 목소리는 노래가 막바지를 달릴 때 쯤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그 때 나는 거의 수면 상태였다.
“잘 자.”
목소리와 함께 노래가 점점 잦아들어갔다. 화면을 밝게 비추던 빛도 사그라지어갔다. 나는 무릎을 좀 더 껴안고 그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점점 더 의식이 몽롱해지고 이제 하루가 끝났구나, 싶었을 쯤 화면이 다시 쨍하게 밝아지더니 노래에 맞추어 잔잔하던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준 소리가 귀에 쑤셔 넣어졌다.
“아무리 내가 좋아도 잠은 침대 가서 자.”
나는 뭐라니, 하고 구시렁대며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거의 감긴 눈으로 쳐다보니 안녕히 잘 자, 하며 장난스런 목소리가 사그라졌다.
※ 영화 'her'에서 소재를 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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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스캔들 작가님 뭐하고 사시나 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