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JARA
1년만에 보는 백현의 얼굴이 화사했다. 환하게 비추어내리는 태양을 뒤로하고 종인이 발걸음을 떼었다. 가지 마…. 찬열이 귀를 막았다. 환청이었다. 앞에 선 백현의 모습 역시, 환각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은 정상적인 사리분별을 할 수 없다. 백현이 보챘다. 종인아, 자꾸 어딜 가…. 1년 전의 그 저녁과 무섭도록 같았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면 절대 가지 않았을 것이다. 너의 그 나약한 면이 웃는 모습에 꼭꼭 감추어져 있었다면, 조금만 더 처절하게 매달려 왔더라면,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라면, 너를 놓을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라고. 텅 비어버린 하루하루는 지옥 그 자체였으리라. 헌데 난 몰랐다. 내겐 너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할 의무는 있으면서도 네 곁에 있을 자격은 없다. 끝끝내 우리는 울게 되는구나.
“백현이가, 니 가고 많이 아파했다 아이가…. 밥도 안 묵고, 골골대다 이리 간기라‥.”
너는 예견했을지도 모르지만, 철이 없던 나는 몰랐다. 검정 정장의 사람들이 무심한 눈길로 날 지나치는 이 곳은 널 보려 온 게 아니다. 우리의 재회는 이 장소와 적합하지 않다. 진실은, 언제나 달콤한 거짓말보다 쓰라리다. 암이라니. 난 네가 간 이후로 새로운 사형신고를 받았다. 쉽게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야만 했다.
다시 한 걸음.
종인아.
한 걸음만 더.
가지 마.
잊을 수 있겠지.
안 돼.
* * *
“안 돼….”
“안 돼? 뭐가, 뭐가 안 돼? 이젠 지긋지긋해. 나는 말야… 더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어. 알아? 너 하나 보자고 이렇게 달려온 거 아니야. 박찬열 그 새끼는 좋은 년 만나서 재미보고 사는데 나는 왜 이럴까. 흔들린 적도 많았다고. 근데 버텼어. 왜? 조금만 더 참으면 내게도 낙이 오겠지. 고진감래라고, 언젠가는 변백현이 날 제대로 살 수 있게 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따지고 보면 피해자는 니가 아니라 나야. 절대로 니가 더 손해봤다 생각하지 마. 알았어?”
“종인아, 난 그게 아니라…….”
“엉겨붙지 말라는 얘기야!!!”
“…김종인.”
“똑바로 살아. 제발, 다시는 볼 일 없었으면 싶다.”
백현의 반지하방을 나오던 날, 하늘에선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절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옷가지들은 전부 버리고 나왔다.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싶었다. 급한대로 뛰어가 자주 들리던 구멍가게에서 검은색 우산 하나를 샀다. 아저씨, 저 여기 이제 안 와요. 멀쩡하던 청년이 와 그라노, 갑자기. 저 이사 가요. …알았다. 가끔 들리라. 건강하세요. 버스를 타기 위해 5분을 걸었다. 이제는 다시 서울로 간다. 고속버스 티켓을 끊고, 박찬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녀석은 용케도 막찰 잡았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7년이었다. 스물 여섯이 되도록 서로의 얼굴을 보고 지내온 것이. 창 하나 제대로 트이지 않은 반지하에서 우린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살을 섞고, 잠에 들었다. 일상은 늘 같았다. 함께 출근하던 동료가 일을 쉬게 된 건 2년 전부터였다. 변백현은 일 대신 집에 틀어박혀 전자기계를 끼워맞추는 일을 했다. 우리의 한 달 생활비는 100만원을 넘은 적이 없었다. 아니, 넘을 수가 없었다. 짜증은 점점 잦아지고, 급기야는 물건을 박살내는 정도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 그런 것일까. 난 변백현에게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죄수와 같았다. 인생이 별볼일 없어졌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물어봐도 그 누구도 답하는 이가 없었다. 부모님껜 얼굴 들고 찾아뵐 면목이 없었다. 애지중지 키워온 아들이 갑자기 집을 나갔다. 며칠을 뒤져 찾으니 웬 또래 남자와 동거를 한다. 방 안엔 시큼한 냄새가 퍼져있다….
박찬열을 만나러 가는 내내 생각했다. 나는 탈출한 것이고, 변백현은 나를 잡을 수 없다고. 우리의 매개체는 끊어졌다고. 인생은 둘이 아니라 하나가 걸어야 한다고. 그리고 취기에 바짝 달은 난 박찬열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고, 박찬열이 말해주었다. 평생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적은 처음이었던걸로 기억한다.
아무렴 좋았다. 통쾌함과 홀가분함이 뒤섞인 울음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난 틀렸다. 그렇게 무딘 너에게 날카로운 말을 하고 얼룩 하나 없이 잠적했다. 날 생각하며 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괘씸했을까. 미웠을까. 죽여버리고 싶었겠지. 평생을 함께 살 줄 알았거늘.
어쨋던 나는 산다. 네가 없이 살아보려고 했다. 무의미한 짓이였다는 걸 깨달았다.
죄수는 스스로 실형이 아닌 사형선고를 당했다.
* * *
만약 내가 천국이던 지옥이던 사후의 영혼을 받아들이는 곳에 가서, 내 삶의 가장 빛났던 순간을 물으라 한다면 난 주저않고 그 순간을 대답할 거야. 백현아.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아무도 없는 학교 운동장엔 단 둘 뿐이었다. 새것으로 보이는 운동화 앞코를 애꿎게 툭툭 내리치는 백현의 볼이 발그레했다. 노을 탓인지, 아니면 정말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인지 분간가지 않았다. 몇 시간을 고민한 듯 엉켜있는 종인의 머리칼이 바람에 스쳤다.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쿵쾅댔다. 아무리 크게 울렸어도 둘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심장 역시 불규칙하게 쿵쾅대며 뛰고 있었으므로. 이는 19년 인생, 느껴보지 못한 벅찬 감정이었다.
“종인아.”
백현이 먼저 입을 떼었다. 입술이 바짝 말라오고 목이 탔다.
“내가 너를…”
역시 철부지였던 나는 몰랐다. 네 한 마디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으리라고는. 내 발화점이 되리라는 건. 그래서 말인데, 백현아. 여태껏 표현한 적은 없지만,
“좋아해.”
많이 좋아해. 너와 내가 어디에 있던. 어떤 모습으로 만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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