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롱하다.
뭐랄까, 덥지도 춥지도 않은 물 속에 가만히 가라앉아 있는 느낌? 아니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듯한, 그런 기분?
아, 그러고 보니 눈 앞에 인어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름답다.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이 뭐던 간에, 마카롱 마냥 달달한 그러한 상태에 깨고 싶지 않다.
... 응? 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아름다웠던 인어의 모습이 나에게 훅, 다가오더니 갑자기 엄마의 얼굴로 바뀐다.
일어나, 이년아.
8시. 씨발, 지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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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시각은 8시, 일어난 시각도 8시. 급한대로 머리는 드라이 샴푸로 대강 정리하고 세수는 고양이 세수, 거기에
폭풍 양치질을 더한 뒤 급하게 무난한 옷들을 빼어 몸에 옷을. 어쩌면 옷을 몸에 쑤셔넣곤 간단한 화장만을 마친 뒤 가방과 차키를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와, 누가 인간을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역시 나날이 준비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30분 밖에 안걸렸어!
혼자서 바보같은 생각에 고개를 저으며 박수를 치던 중, 어차피 늦어서 혼날 바에야 배라도 채우자, 는 심정으로 평소 자주 가던 근처 맥도날드 드라이브 스루로 향했다.
약간 어정쩡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차들이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인가 봐.
대략 5분 정도 기다렸을까, 꽤나 길던 줄이 빠지고 내 차례가 오자 하품을 쩍, 하며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주문했다. 베이컨 토마토 머핀 하나요.
"에, BACON LETTUCE TOMATO MUFFIN 하나 맞, 으시죠?"
.. ? 뭔가 이질적인 발음과 말투, 그리고 높낮이에 알바가 왠 외국인으로 바뀌었나 싶어 고개를 잽싸게 돌리자 보이는건 왠,
훈남, 갓뎀. 신이시여.
한동안 멍하게 바라보다가 명찰을 주욱, 훑었다. 로빈, 데이아나.
이름도 이쁘다며 감탄하고 있을때 쯤 로빈이 고개를 한번 갸우뚱, 하고선 재차 물어오려고 하길래 냉큼 대답했다.
저기, BA .. 네, 맞아요. 이천육백, 예. 여기요, 현금영수증 필요 없어요.
삼천원을 내자 곧 400원을 거슬러주는 걸 심드렁히 받아서 사랑의 모금함이라고 적혀있는 저금통에 넣었다. 동전은 귀찮아 ..
" 마음,씨 이뻐요"
주문을 받고도 도통 주문을 전달하려 들어가질 않길래 빤히 주문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을까,
갑자기 느릿 느릿 들려오는 말소리에 뭔가 문제가 생겼나 싶었으나 전혀 아니었다. 오지랖이 넓은건가?
"예, 뭐 .. "
마땅히 대꾸할거리를 못 찾아 그냥 우물쭈물, 말 끝을 흐렸다. 그러자 갑자기 내 눈 앞으로 쑥, 로빈의 엄지손가락이 보인다.
깜짝놀라 고개를 살짝 올리니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아, 내 심장 왜 나대 ..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문을 전달하러 들어간 듯 했다.
약 1분 즈음 무료하게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이빨 끝으로 잘근잘근 씹고 있자 눈 앞에 익숙한 포장이 들이밀어진다. 근데 이건 ..
"저기, 저 커피는 안 시켰는데.. "
"그거 서비스에요! 그, 착한 마음, 있어서 주는 거에요. "
착한 마음? 아, 모금. 대강 감사하다는 인사를 마치고 가려하자 다시금 로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입술, 깨물지 마요. 그러다 입술 망가져요"
끙‥, 가기 아쉬워지게.
8시 50분. 그렇게 길고 길었던 것 같은 시간은 고작 몇 분 밖에 되지 않았다.
휴, 맥도날드를 빠져나오고 나서야 제대로 숨을 돌리고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론 포장을 뜯었다. 아, 나 아메리카노 못 먹는데.
아메리카노를 컵꽂이에 꽂아놓고 버거를 뜯고있을때, 내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영수증은 영수증인데…,
"Je pense que ce serait comme de vous voir."
그의 글씨체로 보이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근데 불어를 알아야 뭐 해석을 하든 말든 하지…, 나 놀리는 건가?
그렇게 싱숭맹숭한 마음을 가지고 회사에 가자,
" 여주씨, 지금이 몇 시로 보여요?"
… 9시요.
.
.
.
한바탕 깨지고 나서도 아침의 그 남자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녀서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주머니에 접어두었던 영수증을 꺼내었다. Je pens‥
한참을 업무에 집중하지 않고 제이, 이… 거리며 되새기고있자 옆자리 동료가 말을 걸어온다.
" 뭐야, 오늘 아침부터 왜 그래 여주씨? 무슨 일 있어? "
" 예? 아뇨, 일이라기보단 .. 혹시 언니 이거 무슨 뜻인지 알아요? "
" 이게 뭐야, 불어? 옛날에 배웠었는데 배우다가 포기했지 .. 도움 못 줘서 미안, 여주씨. "
무슨 뜻인지 많이 궁금했던 터라 실망감이 얼굴에 내비춰졌던건지, 금새 언니가 미안하다며 손을 꼭 잡아온다.
어쩔 수 없지, 구글 번역기라도 돌려볼까?
동생이 방학숙제를 부탁해와 귀찮은 마음에 번역기를 돌려줬다가 저녁에 동생이 울면서 혼났다고 한 경험을 바탕으로
쓰지 않게됬던 번역기를 다시 쓸 줄은 몰랐지만, 어쩌겠어.
너무 궁금한데.
급하게 인터넷 창을 키고 구글 번역기를 검색해 들어간 뒤 다시금 또박 또박, 소리내 읽으며 키보드를 두드려 가기 시작했다. 제이, 이 띄고 피…
얼마나 키보드를 두드렸을까, 온점마저 찍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놀람과 동시에 얼굴이 붉어짐을 감추지 못했다. 더불어 나대는 심장도,
당신이 보고싶어 질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