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들을 위한 지침서 02]
잠에서 깨어났을 때, 상쾌함을 느꼈던 적이 딱 한번 있었다. 고등학생일 때였는데, 아마 기말고사 전날이었을 거다. 책상에 고개를 박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글자들을 짚어가며 읽다 시침이 십이를 넘어가자 단념하고 침대에 처박혔다. 다음날 맞이한 아침이 그렇게 말끔할 수가 없었다. 마치 비어버린 내 뇌와 같이. 난 잠에 약했다. 누군가 억지로 잠을 깨우기라도 하면 그날 하루를 이미 망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너 진짜 잠 많다. 열댓 번은 넘게 깨웠는데.”
나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투로 나를 쏘아대는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머리는 하늘로 치솟을 준비를 하고 있는 마냥 어정쩡하게 뻗친 상태였고 뻑뻑한 감에 제대로 뜨지 못한 눈은 나를 퇴폐섹시하게……, 는 아닐 테고 이홍빈의 말을 빌리자면,
“폐인.”
그렇단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예예, 하고 화장실을 찾아 들어갔다. 거울을 보니 상태는 더 심각했다. 박제된 것 마냥 며칠째 손목에 그대로 걸려있던 머리끈으로 대충 머리를 묶어 매고, 머리 묶은 것만큼 대충 세수를 마치고 다시 침대로 기어 들어왔다. 가벼운 이불이 몸체를 채 다 덮기도 전에 내 귀에는 잔소리 그 이상은 되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깨운 지 얼마나 됐다고!”
나는 애써 아랑곳하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직 잠에 취한 몸뚱이는 푹신한 침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나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끼기도 전에 이불을 박차고 누운 몸을 앉아 세웠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는지 말의 시작을 열던 이홍빈은 내 행동에 얼떨떨하며 목소리를 씹었다.
“이불에서 냄새나.”
“그 이불 흰색이었다고 말하지는 마라.”
나는 오른손으로 이불자락을 부여잡으며 이홍빈을 향해 섰다. 절로 올라가는 입시울을 제어하지 못한 채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이거, 원래 흰색이다. 누리끼리한 천은 내가 이것을 빨기나 했었는지를 곱씹도록 했다. 이불을 모니터 가까이 가져다대는 나의 행동은 상당히 거만했다. 이불자락이 가까이 오자 홍빈은 으으, 하는 괴상한 소리를 뱉으며 화면에 이불 빨래하는 방법을 띄웠다.
“설마 그거 오늘도 덮고 잘 생각 아니지? 제발 빨래 좀……아악! 야!!”
어디서 조잘조잘 잔소리가 귀를 귀찮게 하는가. 나는 손에 든 이불을 모니터에 집어던지고는 곧장 냉장고 문을 열었다. 몇 시간 동안 잠을 잤으니 배가 고픈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굶주린 배는 눈을 밝혔지만 밝게 뜬 눈은 내 배를 채울만한 음식거리를 찾지 못했다. 장을 본지 일주일이 넘었나. 저번에 몸살감기가 걸렸을 때 친구에게서 받아낸 오렌지 주스만이 찬 공기를 받으며 나뒹굴고 있었다. 차가운 페트병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헐겁게 잠긴 뚜껑을 열어 입에 가져다 댔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 나오는 한숨이 시큼한 오렌지 주스와 함께 넘어갔다. 차가운 것이 들어가니 그래도 정신이 좀 말끔해지는 기분이다.
“빨래 좀 해보까.”
양 쪽 입시울에 묻은 주스를 옷으로 닦아내면서 의자에 앉았다. 이불을 뒤집어 쓴 모니터는 침묵으로 일관하려는 모양이다. 나는 늘어져 내려가는 이불을 모니터에서 치워 주었다. 화면엔 여전히 이불빨래 하는 법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분명 방금과는 달랐다. 문장의 끝마다 온점을 대신해 ^^ 모양의 이모티콘이 따라 붙었다. 저것은 분명 웃는 모양새였지만 말끝마다 따라붙어 전달되는 속내는 구렸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나는 혀 안쪽에 남은 오렌지 향을 밀어 삼켜내며 잔향이 남긴 쓴맛을 표정으로 내비췄다.
“차라리 욕을 해라.”
작년 겨울 김장할 때 엄마 집에서 훔쳐온 큰 고무대야를 꺼내왔다. 먼지와 뒤섞인 물때가 들러붙어 있었다. 대충 물때를 지워내고 깨끗한 물을 담아 모니터가 있는 거실로 대야를 옮겼다. 그리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자잘한 글자들을 읽어나갔다. 검색까지 해줘서 대단한 건줄 알았더니 별것도 아니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물결이 찰랑이는 대야로 이불을 떨어뜨리듯 집어넣었다. 이불을 삼키자 담고 있던 것이 버거웠던 대야는 물을 바닥으로 토해냈다. 입에서 절로 오오, 우어!, 하는 감탄사가 공중으로 튀어나오자 내 목소리를 쳐내며 상당히 구수한 어투가 귓가에 닿았다.
“어허이, 거 참, 야! 바닥 젖잖아.”
“응, 맞네. 바닥 젖네.”
“…….”
나는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대야 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감싸오는 젖은 이불이 발을 미묘하게 간질였다. 한발 한발 떼어내며 이불을 밟아댈 때마다 슬금슬금 웃음이 튀어나왔다. 떼어내는 발의 폭을 넓혔다. 거의 뛰다시피 이불을 짓밟았다. 거실 바닥은 이미 흥건해져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있었는지 이홍빈은 구수한 한숨을 내쉬는 척하더니 어젯밤에 그랬듯 가만히 음악을 틀었다. 통통 튀는 소리가 익숙함을 불러 일으켰다.
“어, 나 이 노래 알아. 그, 무슨 영화 오에스티.”
“첫 키스만 50번째?”
“오, 맞아. 그거.”
헐렁하게 묶인 머리는 끈 사이에 끼어 있지 못하고 점점 목 주변을 괴롭혔다. 나는 머리끈을 풀어 다시 머리를 묶었다. 세 번은 버겁고 두 번 돌려 헐렁한. 내 머리숱은 애매했다. 새로 묶인 머리가 영 시원찮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움직임을 계속했다.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냐고 물으니 이제 그만해도 된단다. 나는 젖은 발 그대로 바닥을 밟았다. 어질러진 거실바닥에 또 웃었다. 잔소리할 줄 알았던 목소리마저 나를 따라 웃었다.
구름 낀 하늘이 걸리긴 했지만 방금 보았던 예쁜 캐스터 언니 말에 따르면 이불 말리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건조대는 물 먹은 이불이 버거운지 스테인리스 재질의 봉은 자꾸만 고개를 숙여댔다. 나는 그것을 몇 번을 고쳐 올리다 지쳐 베란다에 기댄 채로 밖을 쳐다봤다.
“가끔 부럽다고 생각할 때 있어. 그런 사랑 해보는 거.”
“어떤?”
“그 영화처럼. 헌신적이고 애잔하면서 아름다운.”
“하면 되잖아. 아, 짝지가 없어서 못하나?”
나는 거치대에 기대어 서 있던 휴대폰의 액정을 뒤집었다. 모니터에서 한 곳만 보기에 지루하다기에 휴대폰을 업데이트 시켰더니 보는 시선만큼 입도 자유분방해진 모양이었다. 말도 안 붙이고 계속 그렇게 두었더니 퍽 귀엽게도 잘못했어요, 라며 목소리를 기었다. 그래, 그 말도 틀린 건 없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난간에 턱을 기댔다. 길가를 거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평범한데 새삼스럽다. 들고 있는 휴대폰에서 약간의 윙윙거림이 느껴졌다.
“내가 어제 한 말 기억나?”
“무슨 말?”
“내가 성장해 나간다는 거.”
나는 어제를 곱씹으며 응, 하고 대답했다. 목소리는 다음 말을 하기 위한 망설임을 보였다.
“막상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게 뭔지 몰랐는데,”
집 앞 슈퍼 아주머니가 마당에 물을 뿌렸고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소년이 물 젖은 바닥을 쓸고 가며 가볍게 물방울을 튀겼다. 허리께까지 내려앉은 가방을 메고 그 옆을 지나가던 여자애의 바지가 살짝 젖었고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소년의 목소리가 물방울만큼 튀어 올랐다. 이렇게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지루해져 휴대폰을 집어 들고 닫아두었던 베란다 미닫이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이거 되게, 신기하면서도 슬프네.”
미닫이문이 닫혔다. 유리로 된 문은 투명했고 이홍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거기 있는 듯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자리에 서서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기를 반복하고 있자 휴대폰이 다시 윙윙 울렸다. 메시지가 왔다고, 너한테도 친구가 있었냐고 묻는 목소리는 조금 전의 것과 달랐다.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것은 별 볼 것 없는 화장품 가게의 행사를 알리는 메시지였고 나는 배고프다며 휴대폰을 내려놓고 찬장을 뒤졌다. 찬장엔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상황에 변변찮은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음에 미안할 뿐이었다.
| 망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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