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 노릇하는 독립운동가 집안 김종인 X 가난한 독립운동가 집안 도경수
w. 애솔
내가 경성에 살 때의 일이었다.
누나는 돌이 지나지 않은 조카를 등에 들쳐업고, 독립운동에 나선 매형을 찾아 나섰다. 누나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독립운동으로 인해 다리 한쪽을 잃고 겨우 돌아오신 아버지는 아무런 말 없이 누운 자리에서 등을 돌렸다. 아버지가 기어서 집으로 돌아오던 날, 함께 끌려 갔다던 점순네 아버지와 경옥네 오라비가 죽었다는 소식도 같이 왔다. 곧이어 아버지를 찾아 나섰던 어머니의 시체가 옆동네 논두렁에서 발견 되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몇 주 만에야 어머니의 장례를 치룰 수 있게 되었다. 조카의 울음소리가 쨍하니 귓전을 울렸다. 죽으러 가는 것을 눈치 챈 것이구나. 누나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었다. 몸뻬 바지를 벗어 던지고 하얀 치마를 입었다. 집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누나는 몰매를 맞을 것이다. 나는 그런 누나를 말릴 수 없었다. 도망치듯 나가는 누나의 모습이 보기 싫어 방으로 들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을 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순사(巡査)놈의 목소리, 턱턱 막히는 누나의 울음소리와 조카녀석의 끊어질 듯 희미해 지는 쨍알거림이 잦아들었다. 꼭 쥐고 있던 두 주먹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 나와 저 멀리 몽둥이를 들고 짐승처럼 두들겨 대는 놈의 손을 잡고 물었다. 두 볼에서 눈물이 느껴졌다. 누나와 조카의 위에 이불을 덮듯 엎드려 셀 수 없이 맞았다. 누나의 작은 손을 꼭 잡은 나를 보고 대화를 주고 받는 듯 하더니, 이내 나의 손을 두꺼운 발로 짓눌렀다. 그 놈의 바지춤에서 흔들리는 하이도가 철컥였다. 이대로 죽는구나 싶어 희미해 지는 시야에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리고 그 곳은, 몰매를 맞던 집앞이 아닌, 따뜻한 곳이었다.
“ 일어 났구나. ”
“ … 누나. ”
“ 너의 누이는 집으로 돌아갔으니 걱정할 것 없다. ”
처음보는 녀석이었다. 저와는 달리 시원스레 넘긴 머리, 서양식 옷인 양복을 말끔히 차려 입은 것이 대단한 집안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렴, 순사놈의 윗선이 아닌가 싶은 마음에 누웠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문을 여니, 문앞을 지키던 순사 두명과 나의 선생님이 잔뜩 움츠린 모양으로 서 있었다. 당황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녀석을 바라보니 차를 따르던 손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순사는 선생님의 목덜미를 잡고 나에게 밀어보이며 일본말을 내뱉었고, 서툰 일본어 실력에 인상을 쓰고 귀를 트려 할 때 녀석이 옆으로 와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
“ 네 선생님, 맞냐고. ”
“ 아, 하이. ”
나의 얼떨떨한 대답에 순사는 두어번 헛기침을 하더니 선생님의 무릎을 꿇히고 가슴팍의 안주머니에서 나의 재학증명서와 성적표를 꺼냈다. 어찌된 일인지 궁금함에 입을 열어보려 했으나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만 뻥긋일 뿐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인가 잘못 되고 있는 것 같았다. 녀석은 옆에 의자를 끌고 와 나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눌러 앉혔다. 무릎을 꿇고 계신 선생님의 앞에서 의자에 앉으려니 송구한 마음에 손을 뿌리치고 바닥에 납작 업드렸다. 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하며 나의 두 손을 꼭 잡아 주셨다. 일전에 순사의 발에 밟혔던 왼손이 퉁퉁 부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따끔거리는 손에 힘을 주어 선생님의 손을 꼭 잡았다.
“ 일어 나세요, 선생님. ”
“ 아니, 아니다. 그럴 것 없다. ”
“ 제가 어찌 선생님의 앞에서 마음 편히 앉을 수 있겠습니까. ”
나는 순사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을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선생님의 동그란 안경을 나의 옷으로 닦아 끼워 드렸다.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울음을 먹는 선생님을 진정시켰다. 괜찮아요, 진정하세요. 차츰 숨을 고르며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선생님의 옆에 섰다. 인상을 쓰며 나를 바라보는 순사의 눈을 올곧게 바라보았다. 텁텁한 공기중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참이고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으니 그 정적을 뚫고 녀석이 나에게 불쑥 찻잔을 내밀었다. 멀뚱히 보고 있으니 잘게 떨리는 나의 손에 찻잔을 직접 쥐어주었다. 찻잔 안의 말간 차 위로 비추어 지는 나의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 없었다. 천천히 차를 들이켰다. 단숨에 차를 들이키고 녀석의 팔을 잡았다.
“ 네 이름이 뭐니? ”
“ 김종인. ”
“ 보아하니 일본말을 하는구나. 말을 전달해 줘. ”
“ … 좋을대로. ”
그래. 나는 김종인을 통해서 선생님이 어째서 이곳가지 끌려오게 되었는지, 왜 나의 정보들을 가져 왔는지 물었다. 두 명의 순사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무어라 말을 꺼내었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말이니?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낮은 한숨을 쉰 그는 구두 앞발로 바닥을 콕콕 찧었다. 답답함에 인상을 쓰고 김종인의 팔을 힘을 주어 잡았다.
“ 너를 교육시켜 주겠다고. ”
“ 어째서. ”
“ 잘 모르겠다. ”
애써 힘을 주어 물었다. 하지만 김종인은 모른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순사들은 이제껏 받아본 적 없는 목례를 나에게 한 후, 김종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아 버렸다. 창 밖을 보니 경성 시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녀석은 내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맞구나. 목구멍에서 울컥 하고 무언가가 튀어 나올 것 같았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음을 보고 있노라니 당장이라도 집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후들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 일어섰다. 아버지는, 그리고 나의 누나는…. 집에 있을 그들을 생각하니 두 손이 저릿하고 오한이 드는 것이 썩 좋지 않았다. 나의 가족들은 독립을 위해 수없이 싸워왔다. 나역시 그 일을 해야 했고 달리 피하고 싶지 않던 현실이었으며 숙명이라 생각했다. 독립 운동의 거점을 중심으로 나와 같이 독립운동을 하는 집안의 또래들이 광명학교를 다녔다. 앞으로의 일에 눈앞이 캄캄하게 변했다. 함께 공부를 하였던 준면이와 민석이가 보고싶다. 이 곳을 벗어난다 해도 순식간에 덜미를 잡힐 것이 분명했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선생님께 다가갔다. 일어나세요, 선생님.
“ 저들을 따라 가라. ”
“ 싫습니다. ”
“ 공부를 더 해야 한다. ”
“ … 선생님. ”
모든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그것을 피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나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려 주며 격려했다. 꼭 성공해서 광복에 기여하여라. 푹 수그린 고개를 들 수 없어 그저 나뭇바닥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한참이고 망부석이 된 것 처럼 서 있으니 김종인은 문에 기대 안쓰러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눈을 하지 말아라. 너는 앞잡이가 아니냐.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결국 내뱉지 못하고 뚝뚝 끊겼다.
“ 나를 살려준 것이 너지? ”
“ 기억이 나는구나. ”
“ 고맙다는 말은 안한다. ”
“ 바라지 않아. ”
그럼 나는 가볼게. 어색한 기류를 뚫고 먼저 말을 꺼냈다. 김종인의 시선이 따갑게 나의 얼굴을 찌르는 것이 이곳을 어서 벗어나지 않으면 더이상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에 대한 적대감은 처음 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금방이라도 주먹이 나아가야 할 상대지만 혼란스러운 지금은 입술을 떼기도 힘들었다.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나아갈까 퉁퉁 부어버린 손에 힘을 줬다. 집에서 애타게 나를 기다릴 누나와 조카,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했다. 몇 발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니, 김종인은 그자리에 서서 내가 점이 될 때 까지 기다리는 듯 해 보였다. 하늘에서 붉게 타올랐던 해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독립을 염원하는 우리의 모습처럼.
***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 때, 집 마당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달짝지근한 냄새가 나의 코를 찔렀다. 급한 마음에 있는 듯 없는 듯 겨우 서있는 싸리문을 지나쳐 들어가니 누나가 조카를 업고 전을 부치고 있었다. 쌀 한톨도 사기 힘든 사정에 어디서 난 것인지 묻기도 전에 마당에 쌓인 쌀가마와 큰 장독대 2개, 여러 과일들과 옷감들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서둘러 신발을 대충 벗어놓고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가니 아버지는 내가 누나를 쫒아 나갈때와 다름 없이 벽을 보고 누워 계셨다. 주무시고 계신게 아니다. 아버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아버지가 일어나 자리끼를 마시며 말했다.
“ 그들이 다녀갔다. ”
“ 아버지. ”
“ 거절하지 말아라. ”
“ 하지만, 우린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
“ 끝난 것이라 한 적 없다. 그놈들 밑에서 배워 그놈들의 뒤를 노려라. ”
언성이 높아짐에 누나가 전을 담아오던 그릇을 마루에 세게 놓고 열린 문을 벌컥 열었다. 저 밖에 있는것들, 그사람들이 가지고 온거야. 누나의 말에 망연자실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된 것의 원인이 모두 저들에게 있는 것을 다 알면서도, 비참하고 애통한 얼굴로 마지못해 그들을 따라가라는 말을 하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모습에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턱턱 막혀왔다. 모두 놓지 않은것이라 말하지만 그 누구의 눈에도 이것은 포기였다. 독립에 대한 투쟁, 그 열의를 포기하는 것. 무엇이 이렇게 잔인하고 옥죄여 오는지 잘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잃을 것 없는 마당에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마음을 돌린다는게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그들을 따라 유학을 한다면, 그 소문이 동네에 일파만파 퍼지게 되어 아버지와 누나가 몰매를 맞을 것이 뻔한데 그 일들을 아무렇지 않은 척 바라보고 되지도 않을 공부를 붙잡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우두커니 서있는 누나를 뒤로 하고 수레에 쌀가마와 옷감들을 모두 싫었다. 누나는 버선발로 뛰어 나와 내 팔을 잡고 만류하였다. 애원하듯 나를 흔드는 누나와 등 뒤에서 울어대는 조카의 목소리에 눈물이 났다. 나 하나가 뭐기에,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기에…. 결국 자리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원망스럽고 미웠다. 정신을 추스리며 누나를 부축해 방으로 데려다 주고 마루에 앉아 이미 다 져버린 해의 손인사만 바라보았다. 저 너머로 가면 이런 척박함을 벗어나 하루 하루를 웃으며 보낼 수 있을까, 괜한 기대감과 쓸쓸함이 내 몸을 휘감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해답이라는 것을 던져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주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지는 광복이 하루빨리 찾아오면 나는 이 곳을 떠날 것이다. 사람의 인적이 드문 곳에 집을 짓고 아버지를 봉양하며 누나와 함께 조용하고 따뜻하게 살고 싶다. 하루의 고됨이 묻어 녹진해진 옷을 벗어던지고 수돗가로 가 등목을 할 생각으로 받아놓았던 물을 표주박으로 떠올렸다. 말간 물에 얼굴을 비추고 있자니 나의 발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찬찬히 들어 얼굴을 확인하니 예상치 못했던 김종인이 서 있었다.
“ 어떻게 왔어, 너. ”
“ 이거 두고 갔다. ”
김종인은 성적표를 든 손을 흔들어 보였다. 겨우 이걸 주려고 여기까지 온거니? 목구멍까지 말이 차올랐지만 차마 꺼낼 수 없었다. 말갛게 웃고 있는 모습에 욕이라도 한사발 날려주고 싶었지만 성적표를 빼앗듯 받아들고 손을 흔들어 보이며 몸을 돌렸다. 가라는 손짓에도 아무 말 없이 정승마냥 서있기에 말없이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누나나 아버지가 나와 저 놈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김종인의 팔을 잡고 집을 나왔다. 여러모로 답답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 돌아가 ”
“ 싫다. 내가 싫은 이유가 뭐야? ”
“ 멍청한거니, 아님 의도적인 거니? ”
김종인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으로 두 눈만 꿈뻑였다. 머리가 지끈거림에 빨리 보내는게 답인 것 같아 등을 떠밀었다. 다시는 찾아 오지 말라는 말도 함께. 나의 말에 김종인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휘청거리더니 겨우 몸을 지탱해 서고 고개를 돌려 나에게 놀리듯 말했다.
“ 맛있었냐? 오랜만에 흰 쌀밥을 먹어봤겠구나. ”
“ 뭐? ”
“ 나는 금방이라도 그것들을 돌려 보낼 줄 알았다. 예상했던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으니 궁금해서 와 본거야. ”
탕, 누군가 나에게 총을 쏜 듯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두 손이 덜덜 떨렸다. 주먹을 꼭 쥐고 금방이라도 손을 날릴 듯 김종인을 노려보았다. 이게 다 너의 속셈이었구나. 아차 하는 생각과 함께 좀 전에 맛있게 밥과 전을 한번에 비워버린 조카녀석과 누나, 말은 하지 않았지만 꽤 배부른 표정을 하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속절없이 당했다. 저 놈의 꾐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저에게 잡힌 꼬투리 하나로 몇가지의 이유를 가져다 붙여 나에게 들먹일 것이 뻔했다. 마을을 넘어 일파만파 퍼질게 뻔한데, 그 제안을 거절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거란걸 먼저 노린 것이었다. 꼼짝없이 김종인을 따라 공부를 하러 가야 한다. 바짝 마르는 입술을 달싹일 새도 없이 내 앞에 김종인의 손이 불쑥 나타났다. 멀뚱히 보고 있으니 내 손을 잡고 제 손에 붙이는가 싶더니 이내 악수를 하듯 천천히 흔들어 보이며 슬쩍 웃어보였다.
“ 뭐하는 짓이야 ”
“ 이제 같이 공부할 사이니 인사라도 해야지. ”
“ 나는 허락한 적 없어. 마음대로 생각하지 마 ”
“ 너도 어쩔 수 없잖아, 안그래? 얼굴을 보니까 마음은 이미 굳어진 것 같은데. ”
“ 너 가만보니 얍삽한것이 꼭 네 집안을 빼다 박았구나. ”
“ 당연하지. ”
한마디도 빠짐없이 웃으며 대답하는 얼굴을 보고 따지자 하니 입만 아플 것 같아 억지로 손을 빼내고 더럽다는 듯 털어내 보였다. 나의 행동이, 꼭 김종인에게 상처가 되길 바라며.
***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지나갔다. 그동안 김종인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순사들의 드나듬과 책가방과 책 등을 옮기는 행동에 마을은 이미 어느정도 어렴풋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누나는 모든것을 내 위주로 움직였다. 집에서의 마지막날 밤, 김종인이 찾아왔다. 내 앞에 가지런히 옷을 내려 놓고 환하게 웃었다. 옷가지 위에 놓인 봉투를 열어 보니 엄청난 액수의 돈이 있었다. 얼떨떨한 마음과 동시에 매국노 주제에 독립운동을 하는 나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것인가 하는 마음에 말없이 김종인을 바라 보았다.
“ 그냥 주는 돈이 아니다. 장학금이야. ”
“ 너네 집안의 힘이니? 나는 이정도의 돈을 장학금으로 받을 만큼 대단히 공부를 잘하지 않는다. ”
“ 가능성을 본 것이지, 그냥 준 건 아니야. ”
김종인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장학금이면 꼭 학교에 써야 하니? 나의 질문에 김종인은 고개만 저어 보였다. 그렇구나. 별다른 이야기 없이 시간이 흐름에 어서 집에 가라며 등을 떠밀어 김종인을 보냈다. 새벽 5시까지 준비를 다 하고 집 앞으로 나와 있으라 외치는 김종인을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가 아무렇게나 종이를 찢어 연필을 들었다. 장학금은 모두 누나에게 줄 생각이다. 아버지의 약값과 생계비로 쓴다면 몇 달은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액수다. 대충 쓰고 가기 전 누나의 문 앞에 놓아두고 갈 생각이었지만 막상 연필을 잡으니 머릿속이 복잡해 짐과 동시에 손이 빨라졌다. 밤 새 하루를 꼬박, 편지를 쓰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나니 피곤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까무룩 잊게 되었다. 김종인이 건내고 갔던 옷을 꺼내어 입어 보니 꽤 학생의 티가 났다. 머리를 가지런히 뒤로 넘겨 빗고 한짐이랄 것도 없는 가방을 들고 나서니 누나가 잠든 조카를 업고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나와 같이 뜬눈으로 밤을 지샌 듯 엇저녁 보았던 누나의 쪽 진 머리가 다름 없이 머리 뒤로 둥글게 나 있었다. 퀭한 눈 밑으로 진 그늘이 꽉 다물어진 누나의 입술 새로 나올 듯 한 말들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누나에게 다가가 어젯밤 김종인에게 받았던 장학금과 겨우 써내려간 편지를 쥐어주었다. 푹 숙인 고개 사이로 잠든 조카의 얼굴이 보였다. 짧게 쓰다듬어 주려니 잠에서 깰 것 같아 작은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 아버지 잘 부탁해. ”
“ … …. ”
“ 그리고, 은수도. ”
“ 걱정 말아라, 네 몸이나 잘 챙겨야지. ”
그래, 방학이 되면 올 터이니 너무 큰 걱정은 떨쳐버리고 잘 지내. 싸리문을 등지고 서는 누나를 뒤로하고 문 앞에 서있는 자동차에 올라탔다. 새벽 이슬이 쌓여 축축함이 바지 사이로 스며들었다. 덜컹이는 차로 인해 멀미로 고생하겠다는 생각도 잠시, 몸을 돌려 뒤를 확인하니 누나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아랫 입술을 꼭 물고 무릎 위에 놓인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
꼭 돌아 올 것이다.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이 양 손에 틀어 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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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 3까지 나온 마당에 이나은은 진짜 불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