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내 곁에는 니가 있었고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네 가슴 속에 깊히 새겨져 있는 상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눈 마주치면 웃어주고 슬쩍 스치는 손등에 움찔거리다 손을 잡아주고 내 말 하나하나 반응하며 반응해주던 니가 매 순간마다 더 외로워 지는걸 알지못하고. 조금이라도 더 일찍 알았더라면 너의 그 무거운 운명의 짐을 내가 나눠 함께할 수 있었을텐데. 미련스럽게도 바보같게도 너무 늦게 알아버려서 이미 여려진 네 뒷모습에 내가 해줄 수 있는건 고작 이것뿐. /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토요일 아침. 재환과 별빛은 쇼파에 기대어 앉아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온 눈부신 햇살에 눈을 감은채로 별빛아. 사랑해. 눈을 감고 나른하게 대답하는 별빛을 바라보는 재환. 달콤한 말과는 다르게 묘하게 어긋난 얼굴. 쓴 기운이 감싸고 도는 눈동자. 애석하게도 잘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 별빛의 얼굴 근처를 배회하는 재환의 오른손. 이내 거두려 하면 알아채고 맞잡아 오는 별빛. 나도.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서 너무도 다른 둘의 표정. 이내 재환은 한숨을 속으로 삼키고 별빛과 마주보고 웃는다. 마치 지금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듯. 비어있는 왼손을 꽉 움켜쥐면서. 나른한 기운에 낮잠을 자고 일어난 별빛 어느샌가 비어있는 옆자리 대신 가지런히 덮혀있는 이불 한참을 두리번 거리다가 거실에 재환이 없는걸 알아챈 별빛 재환아. 별빛은 재환의 이름을 부르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재환의 서재로 들어간다. 자신과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가 걸린 방. 한쪽 벽면에 크게 자리잡은 액자 밑에 서서 팔짱을 끼고 사진을 바라보는 별빛. 누구 남자친구길래 이렇게 잘생겼을까. 혼자 말해놓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던 별빛은 몸을 돌려 방을 빠져 나가려 하다가 책상위에 올려진 조그마한 수첩을 보고 홀린듯 다가선다. 《6번째 만남》 수첩의 제일 첫장에 적혀있는 알 수 없는 말. 의아한 손으로 첫장을 넘기면 2012.10.31 6번째. 2013.05.24 드디어 너의 생일날 다시 만나다. 2013.09.12 별빛과 데이트. 2014.05.24 두번째로 같이 보내는 별빛 생일. 아니. 12번째. 2014.07.23 얼마 남지 않았다. 2014.10.30. D- 싫다. 의미를 알 수 없는말. 띄엄띄엄 쓰여있는 짤막한 일기는 평소 장난스러운 재환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 구석진곳 눈물에 번진듯한 잉크자국. 손으로 가만히 쓰다듬고 있으면 어느새 방에 들어와 수첩을 거칠게 뺏어 뒤로 숨기는 재환. 재환아. 그거 다 무슨말이야. 이미 다 봤냐는듯 허탈하게 웃다가 몸을 돌려 급하게 들어오느라 다 쏟아버린 저녁재료들을 주워담아 부엌으로 가는 재환. 저녁 먹자. 쓴 웃음에 왠지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불안해 손톱을 물어뜯는 별빛. 큰 한숨을 쉬며 다가와 깨물고 있는 손을 밑으로 끌어당겨 내리고선 눈을 마주친다. 그리고 말한다. 나 혼자 짊어지고 갈 일이야. 처음보는 슬퍼보이는 그 얼굴에 별빛은 울상을 짓는다. 아파? 아니. 아프지 않아. 손으로 재환의 얼굴을 더듬으며 하는 말. 그런 손을 꽉 맞잡으며 재환이 하는 말. 자기최면. 아프지 않아. 표정과 너무 다른 말.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재환의 손을 더 꽉 붙잡은 별빛은 나머지 한 손으로 어깨를 꽉 안으며 다시 묻는다. 울고싶어? 아니. 정말로? 되물으며 얼굴을 보려하는 별빛의 어깨를 풀어주지 않는 재환. 아니. 울고싶어. 무슨일인지도 모르면서. 늘 무슨일인지도 몰랐으면서. 또 기억하지 못할꺼면서. 언제나 듣는 그 말이 너무 따스해서. 재환은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별빛에게. 옛날이야기 해줄께. 저녁을 먹고 나란히 침대에 기대 비스듬히 누운 별빛과 재환. 들어줄래? 별빛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크게 숨을 들이쉬는 재환. 그런 재환의 어깨에 고개를 올리고 싱긋 웃어보이는 별빛. 응. 시작된 재환의 이야기. 외로운 소년의 이야기.
[100년이라는 시간이 있어. 한 소녀가 그 시간속에 갇혀버린거야.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는 그 시간속에. 모든건 100년마다 바뀌어서 다시 자리를 잡는데. 그 소녀만 늘 제자리에 머물러. 그 소녀에게 허락된 시간은 100년에 2년. 자기가 원래 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남들처럼 살 수 있는 시간. 2년. 소녀는 첫 2년을 맞이한 그 때. 한 소년을 만나. 소녀와 소년이 사랑하기에는 2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았지. 하지만 소녀는 알고있었어. 2년이 지나면 소년의 곁을 떠나야하는 것을.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소녀는 병들어가. 헤어지고 싶지 않아. 다시 그 지옥같은 외로움속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소녀는 소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줘. 이야기를 끝마친뒤 잠든 소녀를 보며 소년은 곰곰히 생각해. 내가 대신. 아프지 않도록. 내가대신. 그렇게 소년은 소녀대신 시공간에 갇히는걸 선택하게 되. 소년은 소원을 빌어. 외로운거 내가 다할테니 제발 내 사람이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그리고 기억하지 못하게 해주세요. 나만 기억하면 되니까. 헤어질때 마다 아픈건 나만 하면 되니까. 소년은 간절히 빌었고 소원은 이루워져. 그렇게 소년은 100년마다 한번씩 그 소녀를 만나는 날은 기다린데.] 슬프다. 별빛은 뭔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재환의 눈이 일렁이는것 같은느낌을 모른척 하느라 꾹 참았다. 잘래? 응. 아무데도 가지말고 꼭 옆에 있어. 그래. 편하게 누운 별빛쪽으로 몸을 돌려 잠에드는 얼굴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는 재환. 재환의 귀에 점점더 시계침소리가 크게 들리고 12시가 가까워짐에 점점더 커지는 시계침소리만큼 점점더 일그러지는 얼굴. 마지막으로 별빛의 이불을 꼭 덮어주고 몸을 일으키는 재환. 재환이 몸을 일으켜 방을 빠져나가자 벽에서 사라지는 액자. 방을 나서자 사라지는 재환의 옷들. 현관을 향해 한걸음. 사라지는 칫솔. 두걸음. 사라지는 수저. 세걸음. 사라지는 커플링. 이내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서 한걸음. 별빛의 머리에서 사라지는 재환과 별빛의 6번째 첫만남. 두걸음. 함께 보낸 6번째 첫 생일. 열한번째 생일. 세걸음. 사귄뒤 첫 데이트날 기억. 비틀거리머 걸어가다 제자리에 주저앉는 재환. 늘 마지막은 힘들다. / 갑자기 허전해진 느낌에 몸을 일으킨 별빛.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온다. 이내 맑아진다. 누군가 기억을 비운듯. 멍할정도로 맑아진다. 그럼에도 뭔가 허전함을 지울 수 없는 별빛.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려하다 방문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을 발견하는 별빛. 《사랑해. 내 별빛. 또 만나》 갑자기 세게 뛰는 심장. 잊어서 안되는 무언갈 잊은 별빛을 질책하듯. 글자를 곱씹어 보는 별빛. 답답함은 커져만간다. 생각하려할수록 더 깨끗해지는 생각. 거세게 뛰던 심장도 잠잠해질 무렵. 눈앞에서 사라지는 글자들. 서서히 지워진다. 사랑해. 내별빛. 또만나. 사랑해. 내 별빛. 사랑해. 모든 글자가 지워졌을때 별빛은 자신도 모르는채로 눈물을 쏟아냈다. 그때 기억 제일 밑에서 떠오르는 목소리. 울고싶어? 응. 울고싶어. 별빛은 채 깨닫기도 전에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하얗게 반지자국이 남은 손을 꽉 움켜쥐고 별빛은 골목을 걸어나가는 재환을 본다.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지만 별빛은 재환에게로 뛰어간다. 하지만 별빛의 앞에 놓인 보이지 않는 벽. 뒤틀린 재환의 시간벽. 별빛은 벽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한참을 내리친다. 보이지 않는 벽이 별빛으로 인해 조금씩 균열이 생기면 떠오른다.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가. 소녀를 위해 희생한 소년의 이야기가. 자신을 위해 희생한 재환이. 재환의 이름이. 깨진 벽을 너머 별빛은 재환에게 다가간다. 작고 여려진 그 등을. 자신을 위해 대신 외로움을 택한 듬직한 등을. 끌어안는다. 재환아. 미안해. 너무 늦게 알아서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이번에는 잊지 않았어. 여기 뒤틀린 내 시간속에서 지난 수백년동안 나 대신 니가 짊어지고온 이 시간속에서 이젠 나도 영원히 함께할께. 재환은 허리에 감싸진 별빛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기억해준거. 그거면 돼. 몇백년을 지나 비로소 두 시간이 합쳐졌다. 외로움이 싫었던 소녀를 대신해 외로움에 자신을 밀어넣었던 소년. 더이상은 외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