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 (왕가)
출생 - 사망 : 1912년 (서울특별시) - 1945년 8월 7일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해)
학력 : 육군사관학교
경력 : 1942년 소좌 진급, 중국 산사성 태원으로 전출
1940년 육군대학 54기 졸업
1922년 일본 유학
의친왕의 둘째아들이시죠.
not only 훈남, but also 독립운동가(ㅋ...중간고사 봤으므로)
이우 왕자의 호칭은 "전하", 황실의 여동생들에겐 "운현궁 오빠"라 불렸다고 한다.
(운현궁을 물려받아 운현궁 주인이셨죠)
조선인에게는 따뜻하고 너그러웠으나 일본인에게는 사납고 냉정하였고,
"호랑이 같은 조선 왕족의 핵심"으로 불리며 일본의 감시·경계 대상이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그는 일본인 급우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켜 일제의 요주 감시 대상이었다.
일본에서도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을 거의 사용하였으며, 조선 출신 생도에게는 조선말로 크게 호령하였다고 한다.
술자리에서는 일본 총독부에 의해 금지곡으로 지정된 '황성 옛터'를 부르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다.
황성 옛터에 밤이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꾼의 거리를 헤메어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토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 황성 옛터 中
일본군 정보 참모라는 직위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독립군에게 넘겨주는 등
독립군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정신적 지주로 활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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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이우왕자와 일본인 여성을 혼인시키려 하였으나, 이우왕자는 거부, 당당히 한국여성 박찬주와 결혼한다.
육사동기 이형석 장군에게 보낸 편지
"일본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군복을 입고 당당히 살때까지 기다리라"
"독립된 장래의 한국은 제국이 아니라 민국이 되어야 한다"
이우왕자는 이처럼 민주주의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의 간호인曰
"이우 왕자가 살아계셨다면,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셨을 것"이라며 그를 회상했다. (현실은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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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오빠 절오빠 < 운현궁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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