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햇살은 너무 뜨겁고, 따갑고, 사람을 나른하게 만든다.
특히 8월달의 시골 햇살은 더욱이, 그렇다.
"게녀야, 여기까지 와서 이불 속에만 있을 거야?"
잔소리는. 서둘러, 슬리퍼를 끌며 집을 나와 흙먼지 폴폴이는
시골 길 위를 하릴없이 걸어갔다.
찌링- 뒤에서 들려오는 자전거 벨 소리.
"안녕."
"어, 안녕."
"너가 앞 집 손녀구나. 반가워, 난 도경수야."
"난 게녀야."
친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오는 녀석이 신기했지만
시골에서의 생활이 점차 지루해질 무렵이었기에
동갑내기를 만났다는 게 마냥 좋았다.
"게녀야, 여기야."
"어, 안녕 도경수."
매일같이 우리 할머니 집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며
내가 나올때마다 아이처럼 환한 웃음으로 손을 흔드는 녀석이
점점 더 편해지고, 가까워지고, 설레였다.
시골 중에서도 촌이었던 이곳에서 동갑내기는 우리 둘 뿐이었고,
우린 아침부터 저녁까지 딱 달라붙어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녔다.
나도 방학 때마다 시골을 찾아왔었는데 도경수는 정말 시골에서 산 것마냥
모르는 곳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실제로는 경기도에 산다고 한다.
"뭐야, 그 옷은?"
"....뭐. 왜 웃어? 어? 웃기냐?"
편한 친구에서 좋아하는 남자애로 변하기까지는 정말
순간이고, 그리고 그걸 깨닫는 것도 정말 순간이었다.
그 뒤로 녀석의 한 마디 말에도, 작은 손짓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마치 내가 이 원피스를 녀석한테 잘 보이려고 입은 걸
안다는 듯이 웃고 있는 모습에 괜스레 창피함이 몰려온다. 아 괜히 입었나.
"....아니, 예뻐서. 진짜 예쁘다."
이거 봐. 이렇게 자꾸 내 마음을 들었다놨다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렇지만 이렇게 꿈같이 즐거운, 반짝이는 시간이 오래가진 않을 거란 걸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고등학생이란 우리의 신분은, 그리고 짧은 방학은,
내일 당장이라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어느 새, 방학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부터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밤까지 지겨운 보충을 해야겠지.
밤의 적막을 깨주는 여름 개구리소리, 매미 소리, 찌르라기 소리까지
이 모든 것이 그리울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별 예쁘지? 너가 별 좋아한댔잖아. 여긴 내가 가장 아끼는 장소야."
젖은 눈을 한 채 웃고 있는 너가, 가장 그리울거다.
나도 말없이 웃어주며 밤하늘을 쳐다봤다.
"너랑 별 보니까 되게 좋다."
대놓고 말하지 못했던 나의 속마음.
별밤에 취해, 그리고 간간히 떨어지는 별똥별에
마음이 전달되길 빌며 나지막히 속삭였다.
나의 말에 녀석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넌지시 표현한 마음이 부끄러워 일부러 밤하늘에 별들을 세고 있는데
따뜻한 손이 내 손을 힘있게 잡아온다.
"나는, 꼭 별이 아니어도 좋아."
"그냥 너랑 함께 보는거면 뭐든 좋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학교 분위기도 덩달아 들뜨기 시작했다.
수능도 끝났겠다, 선생님들과 학생들 모두 한시름놓은 즐거운 분위기다.
방학식을 맞은 날이라 모두가 일찍 퇴근하고,
나 혼자 남아 남은 일을 처리하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놀랍게도, 제작년에 졸업한 우빈이였다.
김우빈, 녀석은 우리 학교의 간판이자 다른 학교의 스타였다.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고, 사교성도 좋고, 노래도 잘 부르는
엄친아라는 말이 어울릴만한 아이였다.
우빈이와는 이 학교에 교생실습을 가는 첫 날, 버스정류장에서 만났었다.
"와, 대박 예뻐."
원래 칭찬을 듣는 게 익숙하지 않은 나였기에
내가 아닐거라 생각하며 그냥 흘러넘겼는데 놀랍게도
그 고등학생은 나에게 다가와 불쑥 핸드폰을 내밀며 당차게 말했다.
"번호 좀 주실래요?"
"네?"
생애 처음 받아본 길거리 헌팅이,
고등학생, 심지어 내가 교생 실습을 가게 된 학교의 학생이라니.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라는 쌍팔년도 드라마 대사까지 치면서 정중히
거절했는데 김우빈, 그 놈은 전혀 포기하지않았다.
"와, 진짜 뭘 먹고 이렇게 예뻐요?"
쓸데없이 목소리는 우렁차서 급식실이든, 운동장이든, 강당이든
나를 볼 때마다 김우빈은 그렇게 외치며 나에게 달려왔고
"쌤! 쌤! 여기 보세요!"
쓸데없는 손장난을 치질 않나
너무나 적극적인 대시에 학교에서는 마치 나와 녀석이 사귀는 것처럼
소문이 퍼져나갔다. 결국 네가 자꾸 이러면 나 짤린다,는 나의 반 협박에
우빈은 졸업식 날까지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더 이상 내게 들이대지 않았다.
왠지 섭섭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선생님이란 직책은
너무나도 바쁘고, 정신없고, 수많은 학생들을 만났다 헤어지기에
나 역시 금세 우빈이를 기억 저 편에 잊어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2년만에 불쑥,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저 보니까 반갑죠?"
여전히 죽지않은 넉살을 가진 채.
녀석에게 품고 있던 약간의 서운함은 어느새 날려보낸 채
함께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여전히 재치넘치는 그의 입담에
쉴새없이 웃어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대학은 잘 지내?"
"당연하죠. 제가 거기 짱 먹었어요. 한번 웃어주면 여자들이 그냥 녹아요, 녹아."
"자랑은....그래서 잘난 김우빈씨, 여자친구는 사겨봤나?"
"아뇨, 들이댔는데 차였어요."
"아 진짜? 감히 어떤 여자가 우리 우빈이를 찼대? 그래서?"
"그래서 다시 들이대보려고요."
"아 정말? 멋있는데. 선생님이 장담하는데 이번엔 꼭 그 여자애가 받아줄거야."
"진짜요?"
"그럼, 당연하지. 누가 들이대는건데."
"진짜 이번엔 받아줄거죠,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