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이야기] 세기의 사랑 : 공민왕과 노국공주

고려의 31대 왕인 공민왕은 12세부터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나라에서 만난 부인이 원나라 위왕의 딸 보타사리, 바로 노국공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노국은 공자의 고향이기도 한 바로 그 노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옛 중국에서는 시집갈 때 받은 땅의 이름을 취해 공주의 칭호를 정했지요.

일단 두 부부가 연을 맺게 된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즉, 정략결혼이지요. 노국공주와의 결혼으로 원나라의 힘을 등에 업은 공민왕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민왕은 잘 알려지다시피 왕위에 오른 후에 적극적인 반원 정책을 펴는 등 원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요. 그리고 노국공주는 원래 원나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남편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공민왕을 지지했지만 그녀는 엄연히 원나라의 공주이니 만큼 공민왕의 개혁에 반대하는 친원 세력에게도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노국공주가 정치 전면에 나서는 일은 잘 없었지만 그녀의 입지 덕분에 존재만으로도 공민왕의 정치적인 방패가 되어주었지요. 공민왕에게 있어 노국공주는 단순한 아내가 아니라 가장 신뢰할 만한 정치적 동반자였던 것이지요.

이 부부는 금슬이 매우 좋아 공민왕이 하루라도 그녀를 보지 못하면 참지를 못했다는 내용의 설화가 여럿 남아있습니다. 또한 말을 못타는 공민왕에게 승마를 가르쳐 준 것도 그녀지요. 특히 김용이라는 신하가 왕을 죽이기 위해 벌인 ‘흥왕사의 변’ 때는 공민왕이 숨은 방 앞을 가로막고 반란군들을 물러가게 하기도 했습니다. 물심양면으로 남편을 도운 이런 여인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두 부부 사이에도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금슬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없었다는 겁니다. 한 나라의 국왕인 만큼 이 문제는 단순히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지요. 신하들과 공민왕의 어머니 공원왕후는 후사를 들일 것을 종용합니다. 결국 결혼 10년 만에 혜비 이씨를 후궁으로 들이지요. 물론 노국공주의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또한 공민왕은 후궁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5년 뒤 노국공주는 임신을 하게 됩니다. 공민왕은 부인의 순산을 하늘에 빌기 위해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죄수들을 풀어줬으며, 공주가 위독해 졌을 때는 사형수들까지 모두 풀어주었지요. 하지만 결국 노국공주는 난산으로 죽게 됩니다.

이때 공민왕의 충격은 정말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사>에는 공민왕이 정신병에 걸렸다는 기록이 등장하지요. <고려사절요>에는 직접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 밤낮으로 마주 대하여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눴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물론 공민왕의 혼잣말이었겠지요.
정치에도 손을 놔버려 과거의 총명한 모습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노국공주가 사망했을 때 고려 왕조의 운명도 사실상 끝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조선 시대에 집필된 책들이기에 이런 내용이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공민왕과 이후 고려왕들이 타락하였기에 조선이 천명을 이어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지요.

하지만 공민왕이 노국공주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노국공주 사후 8년 뒤에 공민왕의 어머니가 왜 다른 부인들을 가까이 하지 않느냐 물어보니 공민왕이 노국공주만한 인물이 없다고 답한 것이 유명하지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부인에 대한 사랑을 잊지 못한 것입니다.


북한의 개성시 개풍군에는 이 두 사람의 묘가 남아있습니다. 노국공주가 죽은 뒤 공민왕의 감독 하에 9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만든 능이지요. 공민왕 역시 사후에 이곳에 묻혀 공민왕릉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북한의 국보 123호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이라는 평가를 받지요. 두 무덤 사이에는 각각 구멍이 나 있어서 두 사람의 혼이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시간을 넘나드는 사랑이지요.




ps. 서울 국립극장에서는 공민왕과 노국공주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왕의 나라’가 공연된다고 하네요. 이미 대구와 안동에서 공연해 호평을 받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찾아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