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강요 논란이 학교-학생 간 불신과 학생들 간 반목 초래.. 외부 정치세력이 끼어들어 해결 어렵게 만들기도
"아, 됐어요. 안 해요."
11월 11일 오후 4시 무렵 서울 관악구 봉천동 인헌고 앞.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사흘 앞두고 하교를 서두르는 학생들의 모습은 여느 학교 앞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철제 교문에는 '학교 관계자 허락 없이는 출입 금지'라는 표지와 함께 A0 용지에 각각 인쇄된 '학생회장단 기자회견문'과 '인헌고등학교 학생들의 입장'이라는 글이 게시돼 있었다. 교문 옆 울타리에도 손글씨로 '제발 조용히 해주세요' 혹은 '우리의 학습권을 지켜주세요'라고 쓴 플래카드가 여럿 눈에 띄었다. 최근 인헌고에서 시작돼 사회적으로도 큰 이슈가 된 '교육현장 정치 편향' 논란이 남긴 흔적들이다. 기자가 학생 10여 명에게 이번 사태에 대한 의견을 물었지만, 모두 답변을 거부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대부분 "대답하기 싫어요" 같은 단호한 반응이었다.
이에 앞서 10월 23일 '인헌고등학교 학생수호연합'(학수연)은 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각각 학수연 대표와 대변인을 맡고 있는 인헌고 3학년 A군과 B군은 "학교가 현 정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용납하지 않는다"며 인헌고 일부 교사의 일방적인 '사상교육' 사례를 폭로했다. 학수연 수석대변인인 20대 C씨는 "학수연 활동을 하는 인헌고 학생은 40~50명"이라며 "이들은 교사들의 일방적인 이념 주입에 맞서 팩트 중심의 교육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인헌고는 10월 25일 기자회견을 열고 학교장 명의의 입장문을 냈다. 학수연 주장을 부인하는 것이 주요 내용. 교사들의 '사상 주입'이나 학교가 문제를 제기한 학생들을 퇴학 운운하며 탄압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별도의 해명을 통해 반박했다.
약 30분간 진행된 이날 기자회견은 광화문광장을 방불케 했다. 보수 성향 유튜버 등 학수연 지지자 수십 명이 모였고, 그중 일부는 인터넷 방송으로 현장을 생중계했다. 이들은 일베 발언 당사자로 지목된 교사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간부를 역임한 점을 들어 '전교조 아웃' '정치교사 파면' 같은 구호를 외쳤다. 기자회견 이후 보수 성향 단체들이 며칠간 정문 앞에서 집회를 이어가자 재학생들은 피해를 호소하며 '외부 단체 개입과 학교 주변 시위 중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재학생은 대부분 인헌고 사태에 대한 외부 관심이 몹시 부담스러운 것으로 보였다. 10월 29일 인헌고 강당에서는 학생회 주관으로 12학년 학생 256명(전교생 566명)이 모여 '지혜 모으기 토론대회'가 열렸다. 학생들의 요구로 교사들은 행사에 개입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포스트잇에 자기주장을 적어 학수연과 학수연 주장에 동조하는 보수단체를 비판했다. 인터넷 언론을 통해 공개된 학생들의 주장 문구에는 '학수연이 외부에 알린 것은 왜곡되고 과장된 것' '나는 전혀 (사상을) 강요받지 않았다' 등이 있었다.
인헌고 사태는 학교와 학생들의 상호 불신을 넘어 학생끼리도 서로 반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번 사태를 지켜본 인근 학원 강사들은 "민감한 문제인 만큼 학생들에게 먼저 묻지는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또 "대부분 '잘 모른다'거나 '별 관심 없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학교에서 500m가량 떨어진 인헌시장 골목에는 '인헌고를 지지하는 관악주민 모임' 명의로 '인헌고를 지키기 위해 힘쓰는 학생회선생님학부모님 모두 사랑합니다'라고 적힌 현수막도 걸려 있다.
https://news.v.daum.net/v/2019111613011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