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의자에 앉아 주위 사람들을 구경하듯 둘러보는데, 자꾸만 발목에 감은 붕대가 신경쓰인다. 다친 발목 때문에 구두는 꿈도 못 꾸고 얌전히 운동화가 신겨진 발을 내려다 보았다. 아픈 건 아니었지만 움직일 때면 욱씬거렸고, 붕대를 세게 감아놔서 그런지 조금은 갑갑한 느낌도 있었다. 괜히 앉은 몸을 숙여 붕대 위를 한 번 쓸어보는데 옆에 있던 K가 제 마이를 내게 내밀어 온다. 마이를 받아들며 고개를 들어 K를 바라보았다.
" 덮으세요. "
" 고마워요. "
" 발목 아프십니까. "
" 아뇨. 그냥 자꾸 신경이 쓰여서요. "
" 어쩌다 다치신 겁니까, 대체? "
" 또 그 얘기에요? "
묻지 마요. 바비 잘못 없으니까 바비한테도 묻지 말고, 뭐라고 하지도 말고. 내 말에 잔소리 많은 삼촌 같은 K가 뭐라고 말을 더 하려다가 짧게 한숨을 쉬고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이를 무릎 위에 덮는데 늘 맡던 향이 아닌, K의 향기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축 가라앉는다. 늘 내 옆엔 바비 향기였는데. 괜히 보고 싶은 마음에 무릎 위에 덮어진 마이만 만지작거렸다.
" 그럼 바비는 지금 아빠랑 있는 거에요? "
웅얼거리듯 물어오는 내 물음에 K가 정면을 바라보던 시선을 아주 잠깐 내게 붙이곤 말했다.
" 네. 잠시 후에 회장님과 함께 이 곳에 들렸다가 바로 다음 일정으로 이동할 겁니다. "
K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아빠가 바쁘긴 바쁘구나.
아빠가 하는 일엔 별로 관심이 없다. 회사 일이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거라곤 이번에 아빠가 무슨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었다는 것 뿐이었다. 그 때문에 오늘 이런 자리도 마련된 거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이 곳에서는 다들 품격있는 척, 억지 웃음을 띄며 인사하러 다니기 바쁘다. 아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온 사람들은 날 본 적도 없으면서 늘 나를 공주님처럼 대했다. 막내 따님, 아가씨 소리가 싫어서 인상을 쓰다가도 혹시나 아빠가 곤란해 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들과 같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그 사람들을 맞았다.
" 집 가고 싶다…. "
얼마 있지도 않았는데 밀려오는 피로에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떴다. 제 각각의 모습을 한 사람들을 쭉 훑어보는데 정장을 차려 입은 남자들에게 절로 시선이 간다. 아… 바비 보고 싶다. 이 쯤 되면 병인 거 같기도 하다. 자꾸 생각나는 거 봐.
얼마 전 K가 눈을 다친 탓에 조금은 먼 거리를 차로 이동해야 하는 아빠의 오늘 일정은 K 대신 바비가 움직이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도 많다며 아빠에게 징징댔지만 아빠는 바비가 꽤나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딱 집어서 바비와 함께 가겠다는 아빠의 말에 입술을 삐죽였다. 우리 아빤 딸 바보긴 한데, 딸 마음은 정말 모르는구나.
" 배 안 고프십니까. 뭐 가져다 드릴까요? "
" 그냥 목이 좀 마른데. 물 마시고 싶어요. "
"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
내 말에 걸음을 옮기는 K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릎 위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을 꼭 쥐었다.
연락도 한 번 없고. 바쁘겠지?
평소에도 연락을 거의 주고 받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뭐라고 한 통은 오지 않을까 싶어서 괜히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 화면을 켰다. 그리고, 쌓여있는 메세지들 사이에서 '바비' 두 글자를 찾았다. 이렇게나 많은 문자들이 있는데 참 야속하게도 바비가 보낸 건 없다.
괜히 입술을 한 번 삐죽이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을 다시 껐다.
" 회장님 들어오십니다. "
갑작스럽게 마이크를 통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아빠가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아빠는 늘 저 회색 정장을 좋아했다.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싫다는데도, 아빠는 중요한 자리엔 저 정장을 입어야 일이 잘 풀린다며 저 옷을 고집했다. 뭐… 그래도 저렇게 늠름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아빠가 멋있어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빠의 옆에 선 바비로 향했다. 늘 보던 그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 곳으로 시선이 닿자 자꾸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다. 마이크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아빠에 맞춰서 걸음을 옮기는 바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괜한 반가움이 일었다. 항상 보던 사람이라 그런지 잠깐 못 봤다고 이렇게나 반가웠다.
" 반갑습니다. 조금 늦었죠? 생각보다 비가 많이 오더라고요. 혹시나 사고라도 날까봐 거북이처럼 느리게 왔더니 이렇게 늦어버렸네요. WC 대표, *** 입니다. "
넉살 좋게 웃으며 말하는 아빠의 목소리에 그 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옅게 웃는 소리가 울렸다. 아빠를 잠깐 바라보다가 그 옆에 선 바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이리 저리 둘러보던 바비의 시선이 내게 닿아왔다.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콩닥거리는 소리가 더 커지는게 느껴졌다. 반가운 마음에 눈을 맞추곤 베시시 웃는데, 바비가 내 웃음을 보곤 저도 피식 웃음을 흘려온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금방 웃음을 거뒀다.
조금은 길었던 아빠의 말은 그럼 즐겁게 식사하시라는 말과 함께 끝이 났다. 뷔페처럼 되어있는 곳이라 다들 자유롭게 움직이며 식사를 시작했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저 멀리서 아빠와 바비가 이 쪽을 향해 걸어오는게 보이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아빠! "
내 부름에 아빠가 환한 웃음으로 날 바라보았다.
" 딸. 밥 안 먹어? "
" 배가 안 고파서. 이제 갈 거에요? "
" 가야지. 오늘만 바비 좀 빌려 갈테니까 K랑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
" 내가 맨날 사고만 치나, 뭐…. "
" 하루에 하나씩 꼭 사고 치잖아. 어젠 다리도 다쳐 오더니. "
아빠의 말에 아닌 척 어깨를 으쓱이다가 힐끔, 바비를 바라보았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바비의 시선이 내 발목에 감긴 붕대로 옮겨가는 것이 보인다.
아프지 않은데…. 혹시나 신경쓸까 싶어서 괜히 아빠를 보곤 웃으며 말했다.
" 안 아프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
" 알았어. 몸 조심 하고. "
" 아빠도요. "
아빠는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괜히 아쉬운 마음에 아빠를 잠깐 바라보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누군가가 내 볼을 손가락으로 톡 친다.
얼레? 아빠를 바라보던 시선을 옮겨 바비를 바라보니,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내 볼을 톡톡 두드린 바비가 웃으며 빠르게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무 것도 아닌 행동이었지만 바비의 손가락이 닿았던 곳이 괜히 간질간질했다. 밖으로 나가는 그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손으로 볼을 괜히 한 번 쓸어보았다. 그 부분만 열이 오른 것 같았다.
짧은 터치에도 가슴이 콩닥콩닥. 꼭 연애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비랑 내가 연애를 하는 걸까? 그 날 밤 바비가 했던 말들이 아직도 금방 들은 것 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하지만 딱히 연애 하자, 하고 얘기를 한 건 없었는데.
…그럼 바비는 날 좋아하긴 하는 건가.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어때. 바비가 그런 말을 해줬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고 열이 올랐다. 게다가 웃으며 날 톡톡 쳤어. 부끄러운 느낌에 양 손으로 볼을 부여잡곤 눈을 꼭 감았다.
" 아가씨, 어디 아프십니까. "
" 네, 네? "
" 얼굴 빨개지셨습니다. "
내 얼굴을 내려다보던 K의 물음에 바보 처럼 흐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안 아파요.
때 마침 울리는 짧은 진동에 볼을 감싼 손을 놓곤 무릎 위에 놓여져 있던 휴대폰의 화면을 켰다.
[밥 챙겨 먹고, 사고치지 말고 계세요.-바비]
별 다른 내용은 없었지만 보낸 사람에 적힌 바비란 이름에 괜히 웃음이 났다. 흐, 하는 바보 같은 웃음 소리를 또 한 번 흘리며 조심스레 한 글자 한 글자 답장을 적곤, 전송 버튼을 꾹 눌렀다.
[알았어요. 조심해서 다녀와요!]
* * *
" 방금… 뭐라고…. "
떨리는 목소리로 K를 향해 묻자 K가 다급한 목소리로 짧게 답을 해왔다. 사고가 있었습니다. 회장님과 바비, 둘 다 현재 병원에 있다고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남과 함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K만 바라보는데, 눈물이 차오르는 건지 눈 앞이 흐려졌다. 손이 떨리는 것이 심해지고 이내 손에 잡고 있던 물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덕분에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내 발 주위에서 이리저리 흩어졌다.
"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
" …어, 그러니까…. "
" 움직이지 마십시오. 다치십니다. "
" 두 사람… 많이 다쳤대요? 네? "
" 회장님은 가벼운 상처 말고는 괜찮으시다고 합니다. "
" 그럼 바비는요…? "
" 바비는 지금…. "
수술 중입니다.
K의 말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꾹 깨문 건데도 자꾸만 눈물이 볼을 타고 쭉 흘렀다. 어, 으…. 무슨 생각을 하려고 애썼지만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리를 누가 세게 친 것 처럼 자꾸만 멍해졌다.
" 빨리…. "
" 네? "
" 빨리 가요. "
" 지금 바로 병원으로 가실…. "
" 알았으니까 빨리 가자구요, 빨리!! "
K를 향해 울음 담긴 목소리로 소리치자 잠깐 날 바라보던 K가 내 뺨으로 손을 뻗었다.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한 번 닦아준 그가 알겠습니다, 하는 대답과 함께 다른 쪽에 서있던 또 다른 경비원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차 대기 시켜. 병원으로 간다.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 타선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발을 까딱였다. 가능한 최대의 속도로 K가 운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괜히 K를 향해 재촉했다. 빨리 가요, 빨리, 응? 불안한 내 목소리를 아는 K가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답해왔다.
" 비가 많이 와서 길이 미끄럽습니다. 속도를 더 내면 위험합니다. "
그치만…. 뭐라고 말을 더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자 K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룸미러를 통해 힐끔 나를 본 K가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아빠에 대한 걱정, 그리고 바비에 대한 걱정이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그보다도 내 머리 속을 더 어지럽히는 건 몇 년 전, 그 사고였다.
그 날 그 사고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었다. 엄마, 아빠, 나, 그리고 아빠를 경호하던 경호원이 타고 있던 차가 빗길에 미끄러졌고, 그대로 주위 구조물에 여기저기 부딫히며 차가 뒤집어 졌다. 생각보다 큰 사고였다.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깼을 때 즈음, 옆에 있던 엄마의 머리에서 붉은 피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엄마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엄마, 엄마? 애타게 불러도 엄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움직일 수 없이 차 아래에 깔려서 울고만 있던 그 때, 갑작스레 누군가의 손이 내게 닿아왔다. 검은 정장의 그 아저씨는 피가 가득 묻은 손으로 날 꼭 잡았다. 그리고는 꺼질 듯한 숨으로 마지막 말을 내게 뱉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 날 나는 엄마를 잃었고, 아빠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신을 지켜주던 경호원을 잃었다. 남은 건 아빠와 나, 둘 뿐이었다. 그 날 사고 이후로 불이 꺼진 방에서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방이 어두워 질 때면 자꾸만 차 밑에 깔려있던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에게 남은 건 아빠 뿐인데…. 혹시나 아빠마저 잃을까 조마조마했던 마음에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괜찮다는 말을 들었지만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게 남은 또 다른 한 사람. 바비 생각에 결국 차오르던 눈물이 또 주르륵 흘렀다.
얼마나 다쳤길래 수술까지 하는 거야… 어떡해….
병원에 도착하자 마자 미친 듯이 K를 따라 아빠 병실을 향해 달렸다. 발목이 아파왔지만 그런 것 쯤은 신경쓰이지 않았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환자복을 입은 아빠가 날 바라보며 웃어왔다.
" 아빠. 아빠, 괜찮아? "
" 우리 딸. 놀라서 머리 다 헝크러진 거 봐. "
" 이게 뭐야…. 진짜 놀랐단 말야. 아빠 어떻게 되는 줄 알고 내가, 내가…. "
아빠가 괜찮은 모습을 보자 안도한 마음에 또 눈물이 흘렀다. 애써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꾹 깨무는데 아빠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빠는 괜찮아. 그보다 바비가….
아빠의 말을 듣자 그제서야 떠오른 바비 생각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옆에 선 K를 향해 다그치듯 물었다. 바비는 어디 있어요? 하는 내 물음에 k에게서는 아직까지 수술중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거기로 가요. 내 말에 K가 나를 앞장섰다. 이쪽입니다.
떨리는 걸음으로 k의 뒤만 따라 걷다가 멈춰선 K에 맞춰 나도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수술 중' 이라는 불이 켜진 곳 아래에 쓰러지듯 주저 앉았다. 갑자기 털썩 주저앉은 내 행동에 놀란 듯, 나에게로 다가온 K가 날 조심스레 일으켜 옆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 왼팔 골절 수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들어간지 꽤 지났으니 금방 끝날 겁니다. "
" 다른 곳은 다친 곳 없대요? "
" 그런 것 같습니다. "
조금 전까지 그렇게 울었는데도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이게 뭐에요.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했잖아. 다행히도 다른 곳은 크게 다친 곳이 없다는 말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신발 끝만 바라보며 훌쩍이는 내 머리에 갑작스럽게 손을 올린 K가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 왜 자꾸 우십니까. "
" 놀라서 그래요, 놀라서…. "
" 걱정 말고 회장님 병실로 돌아가 계세요. 수술 다 끝날 때 까지 기다렸다가 끝나면 바로 아가씨 모시러 가겠습니다. "
다정한 K의 목소리에 코를 훌쩍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꼭이요, 삼촌. 내 삼촌이라는 부름이 오랜만인 건지 K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는다. 병실로 가 계세요. 네…. 잔뜩 고인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아빠 손을 꼭 잡곤 옆에 앉아 있는데, 병실 문이 열리고 K가 들어왔다. 수술 끝났어요? 하는 내 물음에 K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가볼래요. 내 말에 K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동으로 닫히려는 문을 다시 열었다. 가시죠.
K와 함께 도착한 병실 안, 두 개의 침대가 마주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비어있는 하나의 침대에서 다른 쪽 침대로 시선을 옮기자 보고 싶었던 얼굴이 가만히 눈을 감은 채로 잠들어 있다. 혹시라도 무슨 소리가 날까, 조심스럽게 그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고요한 그 얼굴 위에는 이리저리 긁힌 상처가 가득했다.
" 이게 뭐야…. "
혼자 뭐 이렇게 많이 다쳤어.
나도 모르게 울컥한 마음에 씨이, 하고 속상한 소리가 나온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K가 묘한 표정으로 나와 바비를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문 밖으로 나갔다. K가 나간 것을 확인하곤 조심스럽게 바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볼을 향하던 손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괜히 손을 댔다간 더 아파할 것만 같아서 손을 대기도 겁이 났다.
" 바비…. "
일어나 봐요. 응?
아직 마취가 안 풀린 건지 내 목소리에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바비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다가 옆에 놓인 의자에 몸을 앉혔다. 그리고는 바비가 덮고 있는 이불의 끝자락만 손으로 꼭 쥐었다. 진짜, 진짜 다행이다…. 큰 사고에 비해서 이만큼만 다쳤다는 것이 그래도 다행이었다. 안도감에 다시 울음이 날 것 같아서 괜히 훌쩍이며 입으론 바비만 불렀다.
바비, 바비. 얼른 일어나요. 응? 바비 오빠…. 응?
끊임없이 웅얼거리며 이불을 꽉 쥔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조금은 높은 의자 탓에 괜히 닿지 않는 발 끝을 땅에 툭툭 차다가, 아랫 입술만 꾹 깨물었다 풀었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로 누군가의 손이 닿아온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작게 눈을 뜨곤 눈썹을 찌푸린 바비가 다치지 않은 쪽의 팔을 내게로 뻗어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 바비. 바비. 깬 거에요? "
내 목소리에 여전히 인상을 팍 쓴 채로 날 바라보던 바비가 갑작스레 피식하고 웃어온다.
" …우는 소리 때문에 잘 수가 없네요, 아가씨. "
" 바비! "
반가운 마음에 바비를 와락 껴안으려다가 혹시나 바비가 아플까봐서 그대로 멈췄다. 내 행동에 작게 웃던 바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보이진 않지만 몸에도 꽤나 많은 상처가 있는 건지 조심스레 움직인 그가 다시 한 번 인상을 살짝 썼다가 풀었다. 가만히 바비만 바라보고 있던 내 눈에서 참고 있던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몸을 앉혀 날 바라보던 바비가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내 볼을 잡곤 내 눈물을 닦았다.
" 왜 우십니까. "
" 놀라서 그래요. 놀라서… 나 진짜 얼마나 놀랐는 지 알아요? 많이 아파요? 응? "
재촉하듯 물어오는 내 말투에 바비가 피식 웃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픕니다. 그 대답에 왠지 모르게 더 속상한 마음이 든다. 이마와 볼에 보이는 긁힌 상처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속상하게…. 속삭이듯 중얼거리곤 바비의 상처로 손을 뻗어 그 언저리만 쓰다듬자 바비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 아가씨 발목은 괜찮으십니까. "
" 안 아파요. 이게 뭐가 아파…. 이거보단 바비가 더 걱정이죠. "
안 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나 보다. 울면서 얘기하는 내 모습이 웃긴 건지 바비가 자꾸만 피식 웃곤 내 볼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 다친 건 난데 왜 자꾸 아가씨가 울어, 응? "
훌쩍이며 바비를 바라보자 바비가 다치지 않은 제 손을 내게 뻗었다. 조심스레 그 손을 잡자 바비가 내 손을 조금 더 꽉 잡아온다. 울지 마. 듣고 싶었던 낮은 그 목소리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괜히 맞잡은 바비의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 * *
" 아, 해요. 얼른. "
" 제가 먹겠습니다. "
" 내가 줄게요. 팔도 다쳤잖아요. "
바비의 숟가락을 손에 쥔 채로 바비를 바라보니 바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른 팔은 괜찮습니다. 깁스를 하지 않은 제 손을 보여주는 바비 때문에 괜히 입술을 한 번 삐죽이곤 그대로 숟가락을 건넸다. 알았어요. 내 표정을 본 건지 바비가 픽 웃더니 한 숟가락을 떠선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바비가 날 한 번 힐끔 바라보다가 입에 넣은 밥을 다 삼키곤 물어온다.
" 아가씨. "
" 네? "
" 오늘 학교 안 가십니까. "
" 오늘 안 가도 돼요. 공강이에요. "
내 대답에 바비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곤 그렇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공강일 리가 없었다. 수업이 두 개나 있었지만 그런 수업보다도 바비가 더 중요했다. 거짓말을 하면 꼭 티가 나는 탓에 괜히 입을 우물거리다가 바비를 바라보았다. 보고 있어도 자꾸 보고 싶은걸…. 뭐, 이것도 변명이라면 변명이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머리를 올리지 않은 바비의 모습이 눈에 띈다. 차분하게 이마를 덮은 머리를 보니까 꼭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아서 계속 바라보는데, 내 시선을 느낀 바비가 밥을 먹다 말고 날 힐끔 바라보았다.
" 그만 보십시오. "
" 머리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 같아요. "
" …별롭니까. "
" 아뇨! "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게 더 좋은데! 내 대답에 바비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놓곤 제 머리 끝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 더 안 먹어요? "
" 다 먹었습니다. "
그럼 제가 치울게요. 평소였음 자기가 한다고 날 말렸겠지만 팔을 쓸 수 없는 바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비가 먹은 그릇들을 다 챙겨서 병실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 그냥 들어가기 아쉬운 마음에 옆에 있는 자판기에서 음료를 두 개 뽑아들곤 병실로 들어가려는데, 문득 병실 문 옆에 있는 환자 이름이 적힌 곳에 눈길이 간다.
그러고보니 아직 바비의 이름도 모르는구나.
혹시나 바비의 이름이 있진 않을까 싶어서 기대를 안고 그 곳을 바라보다가 괜히 바람 빠진 웃음이 났다. 정말 비밀은 비밀이네, 이렇게 철저하게 숨기는 거 보면. 이름이 써져있을 줄로만 알았던 곳에는 익숙한 두 글자, '바비' 가 적혀 있다. 괜히 기대 했어. 입술을 한 번 삐죽이곤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바비의 시선이 곧바로 내게 닿아왔다.
" 이거 마셔요. "
바비에겐 오렌지 주스를 내밀고 내가 마시기 위해 뽑아온 알로에를 몇 모금 꼴깍이는데,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마시던 알로에를 옆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두었던 종이가방 하나를 들어 바비에게 내밀었다. 맞다, 이거요.
" 이게 뭡니까. "
" 휴대폰이요. "
내 말에 바비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휴대폰? 하고 되묻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 사고 나면서 휴대폰도 다 부서졌잖아요. 명색이 경호원인데 연락은 되야 할 거 아녜요. "
내 말에 바비가 표정 없이 종이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하고 거절의 말이 금방이라도 나올 것만 같아서 다급히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빠가 준 거에요. 아빠가!
" 아빠가 직접 온다고 했는데 그냥 내가 가져왔어요. "
내 말에 뭔가 못마땅한 표정의 바비가 휴대폰에 잠깐 시선을 뒀다가 날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건…. 말 끝을 흐리는 그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받아도 돼요. 이걸로 나랑만 연락 하면 되잖아요. "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는 바비의 모습에 덩달아 베시시 웃으며 종이가방 안에서 작은 박스에 들어있는 휴대폰을 꺼냈다. 처음 켜보는 거라 이것 저것 작동을 해보다가, 사용할 수 있는 화면이 뜨는 걸 확인하곤 다이얼 버튼을 눌러 내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제 번호 줄게요.
번호를 다 누르고 저장을 하려는데 뭐라고 저장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짧은 시간을 고민하다가 움직이던 손가락을 그대로 고정하곤, 고개를 들어 바비를 바라보았다.
" 저번 휴대폰엔 저 뭐라고 저장했어요? "
내 물음에 날 바라보고 있던 바비가 어깨를 으쓱 했다. 뭐에요. 뭐라고 저장했어요. 사고뭉치? 아니면, 철부지?
" 아가씨요. "
" 뭐야…. 재미 없게. "
뭐, 원래부터 별로 재밌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가씨가 뭐에요.
아가씨라고 저장된 이름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심 조금은 더 특별한 걸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나보다. 바비의 답에 괜히 삐죽이다가 그대로 '아가씨' 라는 이름으로 내 번호를 저장했다.
" 그냥 그대로 아가씨라고 저장해 둘게요. 그리고, 음, 우리 아빠 번호는…. "
다시 한 번 다이얼을 눌러 아빠 번호를 톡톡 누르는데,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바비의 시선이 느껴진다. 괜히 바비를 힐끔, 바라보았다가 눈이 마주치면 그 시선을 피해 휴대폰을 바라보고. 그런 나와는 다르게 바비는 시선을 떼지 않고 나만 빤히 바라보고 있다. 저 눈빛이 좋아서 괜시리 마음이 두근두근 거렸다.
" …아빠는 회장님, 으로 저장하면 돼요? "
고개를 들어 바비를 바라보다가 또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잠깐 시선이 닿아 있다가 또 내가 먼저 바비의 시선을 피해버리곤 휴대폰으로 시선을 떨어트리자, 바비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 왜 제 눈 못 보십니까. "
" …아니거든요. "
" 계속 피하고 있으시잖습니까. "
괜히 아니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들어 그 눈을 마주하는데 자꾸만 떨려서 오래 바라볼 수가 없다. 역시나 몇 초 닿지 않은 채로 금방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씨이…. 나도 모르게 새어나온 칭얼거림에 바비가 웃는다. 부끄러워 눈도 못 마주치곤 더 이상 할 것도 없는 휴대폰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계속 화면을 컸다가, 껐다가만 반복하면서.
그러자 바비가 손을 뻗어 내 코를 톡톡 두드리곤 웃음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 공강 아니면서 공강이라고 거짓말 하곤 하루 종일 여기 있는 것도 그렇고. "
" ……. "
" 이렇게 눈도 못 마주치고. "
" …아닌데…. "
공강이 아닌 건 어떻게 알았지. 바비의 말에 괜히 뜨끔하는 마음이 든다. 공강이 아닌 것도 맞았고, 부정해 보지만 지금도 눈을 못 맞추고 있는 것도 맞았다. 말 끝을 흐리며 아닌데에… 하고 길게 뺐더니 바비가 다시 한 번 내 코를 톡 쳤다.
" 왜 이렇게 귀엽게 굴어. "
생각치도 못한 말에 에? 하는 소리를 뱉으며 잠깐 고개를 들어 바비를 바라보는데 바비가 씩 웃으며 이번에는 코가 아닌 내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 자꾸 욕심나게. "
♡
안녕하세요! uriel 입니다
1일 1글은 이렇게 무너지나 봐요, 또 1일 1글을 못 지켰어 ㅠ_ㅠ.. 시무룩..
아무래도 요새 조금은 슬럼프가 온 것 같아요
늦게 온 주제에 무슨 징징이냐 하실지도 모르지만 음, 요즘 되게 기분이 묘해요
독방에서도 자주 언급이 되고 여기저기서 늘 추천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아가씨 글이 인기가 많아져서 정말 기분이 좋아요! 하지만 좋은 만큼 조금은 부담이 되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설렘 설렘한 글을 많이 쓰다보니 오늘 이 편은 안 설레면 어떡하지, 오늘 이 편은 안 좋아해 주시면 어떡하지 하는 부담이 사실 조금씩은 생겨요 (시무룩).. 특히 오늘 편이 왠지 그런 거 같아요, 6화 7화에선 굉장히 설렘 포텐을 터트리다가 오늘은 좀 덜한 거 같아, 하는 자신감 없는 소리도 자꾸 나오고 ㅠ_ㅠ 엉엉..
매 편이 설레기는 힘들지도 몰라요 제 이쁜이들 ㅠ_ㅠ 그래도 제 이쁜이들은 좋아해 주실 거라고 조심스레 믿고는 있어요 ..♡ 아니면 어또카지..
저번 편에서 무려 추천이 47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추천이 10개씩 증가할 때마다 늘 쪽지가 와요,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인티 쪽지! 그 쪽지 받을 때면 정말로 기분 좋은 거 있죠 ㅎ_ㅎ 댓글도 늘 달아주시고, 이전 글이었던 개한빈과 새내기까지도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늘어난 것 같아서 정말로 기분이 좋아요!
결국 제 이쁜이들 덕분에 저는 추천 빠순이가 되었네요, 추천.. 추천..♡
아, 방금까지 슬럼프라고 시무룩했다가 금방 다시 기분 좋아진 거 봐..♡
흐흐
지원이랑 여주 언제 연애하냐고 물으신다면 제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기다려요!
지원이가 여러가지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으면 해요
아가씨와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음..
어..
여기까지만 할게요 (찡긋)
이번 편에 지워니가 다쳐서 맴이 속상해요 엉엉..
그래도 다음 편은 조금 더 달달함 뿌려서 들고 올게요..♡
오늘도 좋은 밤 보내요, 잘 자요 제 이쁜이들! ♡
♡제 사랑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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