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걸 포기하고 싶었다. 내겐 김진환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한번이라도 좋으니 내 손을 잡아줬으면,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나를 안아줬으면. 그 순간만으로 내 평생을 살아갈텐데.
부디, 하루라도 좋으니 내 곁에 있어줬으면. 이 모든게 눈 뜨면 사라질 환영이라고 말해줬으면.
*
"00아, 우리는 나중에 뭘 하면서 살고있을까?"
"몰라, 그냥 돈 많이 벌고, 편하게 살고있었으면 좋겠다."
"너 꼭 돈 많이 벌어서 나 호강시켜줘야돼!"
니가 내 부모님이라도 되냐. 왜 내가 널 호강시켜. 내 말에 큭큭대며 웃는 김진환의 얼굴은 환했다. 김진환에게선 연주황빛 살구꽃 내음이 풍겨왔다. 김진환은 내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나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새어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김진환의 새끼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나는 항상 무뚝뚝했고, 김진환은 내게 한없이 다정했다. 물론 그 다정함은 내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오롯이 나에게만.
나에게만 한정되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김진환, 학교끝나고 피씨방가자."
내가 김진환에게 피씨방이나 당구장에 가자고 하면 김진환은 인상을 쓰며 내게 여자애가 그런데를 뭐하러 가냐며 날 타박하곤 했다.
"그럼 김지원이랑 가고 뭐."
"아 씨, 갈게."
김진환은 항상 나와 함께였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는 김진환과 내가 같이 다니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아주 자연스러웠고, 수학의 정의 같은 일이었다. 등교, 하교는 물론이고 심지어 급식까지 같이 먹었다. 이동수업 때 우연히 같은 반에 붙으면 나는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는 김진환을 위해 비워뒀고, 김진환은 나를 위해 옆자리를 비워뒀다. 김진환과 나는 우리 사이를 잘 모르는 애들이 보면 사귀는 사이로 오해할 정도로 붙어다니고는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오해가 현실로 다가왔으면 하고 소망했다.
"00아, 나 여소받았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장난이겠지, 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면서도 싱글벙글한 김진환의 얼굴에 심장이 찌르르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그 여자애 생각하면서 그렇게 웃지 마. 부디.
"축하해, 그럼 김진환 이제 모솔 탈출?"
이 입이 방정이지. 가슴속에 없는 말을 술술 뱉어내는 이 혀를 떼어내고 싶었다. 김진환은 내 반응에 잠깐 멈칫하는 듯 싶더니 다시 웃음기를 머금으며 내게 그 여자애의 사진을 보여줬다.
"어때? 예쁘지?"
"귀엽네."
절대 예쁘다는 말은 안 했다. 예쁘다고 하면 그냥 뭔가 내 자존심이 찔려. 귀엽다고 말하는것도 화난다. 저 여자애가 뭔데, 김진환이랑.
"이름은 혜빈이야!"
이름 물어본 적 없는데. 김진환은 그 날 이후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부쩍 줄었다. 쉬는시간에도 혜빈이라는 애랑 문자하기에 바빴고, 점심시간에는 그 애랑 통화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하교할 때도 그 애 학교 앞에 가기로 했다며 내게 손을 흔들며 안녕, 이란 말을 신나게 소리쳤다. 참 기분 뭐같네.
"00아, 000!"
아침부터 김진환은 활기찬 모습으로 내 앞으로 달려와 내 책상에 고개를 박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이 직감적으로,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물론 내게.
"나, 혜빈이랑, 사귄다!"
오 세상에, 혹시나 했던 일이 일어났다. 거짓말이지? 라며 묻고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커녕 김진환의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김진환에게 무방비로 떨리는 내 두 눈을 보일까 두려워서. 김진환이 안에 꽁꽁 싸매고 숨겨놨던 내 속내를 알게될까 두려워서. 그러면 우리 사이는 멀어질까 그게 가장 두려워서.
짧은 몇 초 동안 수십 개의 생각이 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김진환의 자랑스러운 외침이 내 속에서 메아리쳤다. 고개를 힘껏 저어 잡다한 생각을 떨쳐내고 애써 김진환에게 내뱉은 말은
"와아, 축하해. 오래가."
그 둘이 오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
"야아, 000 잘 지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년만에 김진환에게 온 전화였다. 아직도 피쳐폰을 쓰고있는 김진환의 소식은 지금까지 만나고 있는 혜빈이의 페이스북에 종종 올라오는 사진에서만 접할 수 있었다. 몇 년 동안 꾸역꾸역 김진환을 포기했다 생각했는데, 액정에 뜬 김진환이란 세 글자에 아직도 나는 반응했다. 들려오는 김진환의 목소리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몰라 바보같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얼굴 한 번 보고싶다. 한 번 만나자 우리."
김진환과 나는 고등학생 때 시험기간에 자주 가던 카페에서 만났다. 김진환은 훨씬 더 잘생겨졌고, 멋있었다. 풍겨오는 살구꽃 향이 그대로인게, 학생 때의 향수에 취한 것 같아 좋았다.
"잘 지냈어?"
내가 처음 꺼낸 말이었다. 김진환은 내게 웃으며 잘 지냈지. 라며 대답했고 너는? 하고 되물었다.
"나야 뭐 그럭저럭."
내 대답을 끝으로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지금의 우리는 그 정적이 더 자연스러웠다. 예전의 우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하하, 오랫만에 봐서 그런가. 되게 어색하네."
"그러게."
내 무뚝뚝한 대답을 끝으로 또 정적이 맴돌았다. 그렇게 보고싶었던 김진환이었는데도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예감이 좋지 않아서.
"00아, 이거..."
김진환은 우물쭈물 하다가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받기가 싫었다. 제발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길.
"이게 뭔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김진환에게 물었다. 내가 생각하는 그것만 아니면, 보험도 들어주고 보증이라도 서 줄텐데.
"나 결혼해."
김진환의 말은 아주 작은, 씨앗같은 내 희망도 짓밟았다. 수줍게 웃으며 꼭 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김진환에게 차마 쓴 말은 못하겠어서, 알겠다고, 무슨 일이 있었다고 꼭 가겠다고 대답했다.
"정말? 진짜 친구가 제일이다. 고마워 00아."
친구.
난 너와의 끝이 친구가 아니기를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