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花樣年華)
: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연화방을 나선 구준회는 으스러질 듯이 잡고있던 내 손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파악하지 못할 그 시선이 나는 매우 답답했다. 나를 감싸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만일 그게 거뭇한 걱정들이라면, 적어도 그 정도는 알아도 될 것 같았다. 물론 그에 대해 알고싶다는 작은 욕심이 있기도 했지만.
내심 구준회가 내 손을 놓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감사하고, 그에게 아무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큰어머님이 하신 말이 자꾸만 맴돌아서, 자신의 혈육을 위했다는 말이 계속 내 양심을 찔러와서, 이대로 구준회를 따라가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나도 서로 잡은 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찬 밤바람 탓인지 쩍쩍 갈라신 손등이 거칠어보였다. 하지만 차디찬 바람을 등으로 맞으면서도, 맞잡은 두 손은 서로의 온기를 따뜻하게 나누고 있었다. 이 손을 풀어야 할까, 그게 맞는 일일까.
"미안하구나."
작은 읊조림이 흘러들어왔다. 그 말을 내뱉는 구준회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와 동시에 구준회는 잡고있던 손을 놓았다. 안 깊숙히부터 작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구준회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일까.
"고운 얼굴이, 망가졌어"
구준회가 내 뺨을 쓰다듬었다. 아, 이 의미의 말인가. 안심이 되는 걸 보니 내 속은 구준회가 손을 놓아도 된다며 말하면서도, 꺼지지 않은 욕망의 불씨는 손을 놓지 않길 바랐던 모양이다. 내 자신이 조금 한심스러웠다. 구준회에게 폐가 되면 안 될 터인데. 두 가지의 모순된 생각들이 서로의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묘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나는, 두 생각을 한 몸에 품으면서도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선 것일까, 내 뺨에 닿는 부드러운 손길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나리."
구준회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구준회는 내게 선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밤바람이 시렸다. 나는 손에 들고있던 송윤형의 두루마기를 뒤집어 썼다. 구준회가 잠시 두루마기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구준회가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다시 두 손이 맞잡혔다. 구준회의 당찬 발걸음을 따라, 내 걸음도 옮겨졌다. 구준회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묻지 않아도 안심이 될 듯한 기분에 그저 작은 미소만이 지어졌다.
문득 오라버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쯤 뭘 하고 계실까. 오라버니에게 내 소식을 알리기 싫었다. 걱정하며 나를 찾아올 오라버니는 더욱 싫었다. 오라버니만은 그저 아무것도 몰랐으면 했다. 겨우 배 다른 누이의 걱정을 할 시간 따위는, 오라버니에게 절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혈육을 위해 날카로워졌던 큰어머님처럼 이기적인, 같은 부류의 사람일 거란 생각이 들어왔다.
*
동혁은 애처로이 걸었다. 걸음의 끝은 눅눅했고 걸음마다 옮겨지는 발끝은 그 어떤 곳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누이가 보고싶었다. 실제가 아니라도 좋으니, 그 아이의 얼굴을 보다 더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필요했다. 환영이 나타난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 손길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내 눈 앞에 나타나주기만 한다면 전부 되었다.
정처 없이 걸어가던 도중에, 짙은 제비꽃 향이 코 끝을 스쳤다. 동혁은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었고, 주위를 살폈다. 혹시 내가 준 향주머니에서 풍기는 향은 아닐까, 혹시 거짓처럼 내 앞에 나타나 밝게 웃어주는건 아닐까. 헛된 기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벅차오르는 가슴만큼은 그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주위를 살펴도 __의 머리카락 한 자락조차 보이지 않았고, 제비꽃 향만이 점점 짙어져갔다. 제비꽃 향의 원천은 화훼 상점이었다. 윤형이 상점의 밖으로 제비꽃을 한가득 옮기고 있었다. 동혁은 아닌 줄 알았으면서도 산산히 부서져버린 기대에 허무한 웃음만을 내뱉었다. 그 텅 빈 속을 쥐어내면서도, 제 누이가 떠올르는 동혁은 윤형의 제비꽃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짙은 보랏빛이 눈부셨다. 밤이 어두워졌는데도, 동혁에게 제비꽃은 보름달보다 환했다. 저기, 오늘 장사는 끝났습니다. 윤형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지만 동혁에게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향기로운 제비꽃만이 눈 앞에 너울거렸고, 그 가운데에는 __이 있었다. 동혁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누이의 이름이 뱉어졌다. 목소리가 애달프게 떨렸다. 동혁은 자신이 왜 자란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는지 후회했다. 제비꽃만 봐도 이리 가슴이 미어지는데, 왜 그 아이에게 자란이란 이름을 주었을까. 그리고 왜 제비꽃은 내 속도 모른 채 이토록 아름답게 흩날리는가. 제비꽃이 아니라 __이 내 앞에 있다면 좋으련만.
윤형은 애처로운 동혁의 눈동자가 안타까웠다. 누군가를 잃은 듯 한 그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는지 윤형은 상점의 문을 잠그는 것을 미루고 동혁을 바라보았다. 동혁의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윤형은 제비꽃을 바라보는 동혁을 보내지 않았다.
"오늘, 제비꽃을 닮은 여인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동혁을 바라보던 윤형이 입을 열었다. 제비꽃을 바라보던 동혁은, 윤형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제 누이가 생각나는 말이었다.
"제비꽃 향이 진하게 풍기는 여인이었죠."
동혁은 제가 쥐어준 향주머니를 떠올렸다. 아직도 지니고 있을까, 향이 다 가시기 전에 새로운 향주머니를 만들어 주어야 할 텐데. 색도 더 고운걸로 고르고, 자수도 좀 더 화려하게 박고.
"이름이, 자란이라 했던가요, 어찌 이름마저 제비꽃과 닮은지.."
순간 천천히 흐르던 동혁의 사고가 멈췄다. 무엇이라 했습니까. 동혁은 윤형의 눈을 마주했다. 눈동자의 초점이 명확했다. 그 여인의 이름이, 자란이라고요. 윤형은 자신에게 눈을 번뜩이는 동혁이 당혹스러웠지만 침착하게 입술을 열었다. 예, 자란이라 했습니다.
"그 아이는, 어디로 갔습니까."
__일지도 몰랐다. 궁으로 간 게 아니었나, 동혁의 머릿속이 뒤엉켰다. 왜 그 아이가 궁이 아니고, 하지만 그 복잡한 생각들 틈에서도, __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은 곧게 솟아올랐다. 동혁은 윤형을 재촉했다.
"글쎄요,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아서.."
윤형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동혁은 발걸음을 옮겼다. __이 확실했다. 정확이는, __이라고 확신하고 싶었다. 조금의 의구심이 남아있었지만, 동혁의 처절한 간절함은 그 조금의 의구심을 뽑아냈다. 동혁은 연화방을 향해 걸었다. 어쩌면, 다시 돌아갔을 지도 몰라. 어쩌면, 나를 기다릴지도 몰라. 자신을 점점 재촉하며 점점 빨라지던 동혁은 이내 밤공기를 갈라내며 달렸다.
동혁을 스치는 밤바람이 차가웠다. 도포자락이 지나가는 바람에 맞추어 하늘하늘 춤을 추어댔고, 보름달은 그런 춤사위를 말없이 비춰보였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주위는 조용했고, 동혁의 발걸음 소리만이 경쾌하게 땅을 울렸다. 별들이 동혁의 머리 위를 흘러갔다. 동혁은 작은 희망을 가슴 속에서 조금씩 키워나가고 있었다.
연화방이 가까워질수록, 주위가 밝아지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기생들과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호탕했다. 동혁은 오늘만은 전부 괜찮으니, 사내들 틈에서 웃음을 짓는 기생이 __이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내게 모습을 보였으면, 그렇게라도 내 두 눈으로 그 아이를 확인할 수만 있다면.
동혁은 연화방 문을 세게 열었다. 지나다니는 기생들이 동혁을 바라봤다. 동혁은 주위를 둘러봤다. 나와있는 기생들 중에는 보이지 않았다. 동혁은 천천히 연화방의 마당을 가로질렀다. 나와있던 기생들 중 하나가 요염한 걸음걸이를 뽐내며 동혁에게로 다가왔다.
"누구 찾으시는 분이라도 계십니까, 나리."
동혁은 제 앞에서 말을 걸어오는 기생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 여인이라면 알지 않을까, 동혁은 들끓는 기대와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제 누이를 만나 손을 잡고, 괜찮냐고 물으며 잔뜩 쌓아뒀던 제 감정들을 분출해내고 싶었다.
"혹시, 자란을 볼 수 있습니까?"
기생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기생은 등을 돌려 어디론가 향했다. 혹시 그 아이를 데려오는 것일까. 동혁은 달아오르는 이 감정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그 작은 얼굴을 보자마자 끌어안아 버릴 것만 같았다. 동혁은 발 밑의 흙을 꾹꾹 짓밟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들끓는 제 감정을 어디에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
"나리."
좀 전의 기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혁은 저도 모르게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 미소는 자취를 감취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동혁의 눈 앞에 __은 없었다. 동혁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자신에게 탐욕의 눈길을 비추어대는, 월매였다.
"자란은, 어디에 있습니까."
동혁의 표정이 굳었다. 월매는 깔깔대며 부채를 펼쳤다. 뺨에 닿는 공기가 차가운데도 부채를 부쳐대는 월매를, 동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혁은 입술을 깨물고 침을 삼켰다. 그 간사한 입술 틈으로 어떤 말이 나올지, 동혁은 두려웠다. 희망을 쥐고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그 아이는,"
동혁의 눈동자가 자리를 잃은 채 흔들렸다. 월매는 그런 동혁을 농락이라도 하듯 뜸을 들였다. 달이 밝네요.
"빨리 말하시지요!"
월매가 목소리를 높이며 웃었다. 월매는 자란을 찾는 이 선비를, 잘 구슬려야 했다. 어떻게든 구슬려서, 준회에게 가 있는 자란을 빼앗아야 했다.
"구준회라는 선비가 데려갔습니다, 나리."
안타깝네요. 월매의 말에 동혁의 사지에 힘이 빠졌다. 월매는 그런 동혁을 주시하는 두 눈에 힘을 주었다. 동혁의 입술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에 따라, 자신의 입술이 움직여야 했다.
"그 자가, 어디를 향했는지 아십니까."
월매는 속으로 짙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과 동혁은 한 패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은 준회를 구해야 했고, 동혁은 자란을 구해야 했다. 월매는 자신의 기쁜 웃음을 애써 내리누르고, 동혁에게 한 걸음 다가가 속삭였다.
"아쉽게도 저는 그 자가 어딜 향했는지 모릅니다."
동혁은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나리, 월매가 새어나오는 그 탄식을 끊어냈다.
"저와 손을 잡으시지 않겠습니까."
동혁이 월매를 바라보았다. 월매의 눈에선 새카만 욕망이 늪처럼 넘실댔다. 월매의 붉은 입술이 간사하게 움직였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리께선 자란을 데려오세요. 그리한다면,"
동혁이 숨을 죽였다. 솔깃한 제안이었다. 혼자 하는 것보다야 둘이 손을 잡는 편이 수월했다. 동혁은 월매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동혁의 머릿속에서 일전의 간사했던 월매는 이미 잊혀진 지 오래였다. 동혁에게는 지금,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월매만이 보였다.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그 아이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진정이십니까."
동혁이 월매를 바라보았다. 월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만 하면, __이 항상 제 옆에 있을 수 있었다. __과 평생 함께 할 수 있었다. 동혁에게 월매의 제안은, 그 무엇보다 달콤했고, 동혁은 제 앞에 놓인 월매의 손을 잡아들었다.
"그리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붓을 들어 새카맣게 칠해놓은 밤하늘에는 뽀얀 보름달만이 밝게 빛나 동혁을 비추었다. 이내 어디서부턴가 어두운 구름이 몰려왔고, 구름은 달의 얼굴을 가려냈다. 동혁을 밝게 비추던 빛이 거두어졌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 어두운 땅 위에서, 동혁의 두 눈만이 엉켜버린 사랑의 굴레에 갇힌 채 불타오르고 있었다.
프렌디입니다ㅠㅠㅠ우선 지난편과 공지에 답댓글을 하나하나 달아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이번편이 좀 짧아요ㅠㅜㅠ 제가 시간이 많이 되지 못해서..엉어우ㅜㅠㅠㅠ
하지만 여유라고 2월달밖에 없으니 그 안에라도 조금씩 글을 연재할 생각이에요!
글이 짧고 텀이 길어서 포인트는 없는걸로!!!
지난 8화 초록글, 추천 16개 감사해요!!! 그리고 지난 공지에서 저 응원해주신 모든분들 너무 감사해요. 제 입장에서 이해해주시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정말 울뻔했어요ㅠㅠㅠ
준회 님, 구닝 님, 엘사 님, 콘초 님, 팬 님, 용군 님, 뿌요를 개로피자 님, 두둠칫 님, 무룩이 님, 주네야 님, 보랏빛 난초 님, 뿌링클 님, 부농부농 님, 거북이 님, 찌푸 님,!0!이모티콘, 바나나킥 님, 알콩달콩 님, 마그마 님, 알린 님, 지난봄 님, 무지개 님, 징징이 님, 꽃 님, 설렁 님, 파란짹짹이 님, 뽀로로 님, ㄱㅈㅎ 님,코코리 님, 주네띠네 님, 네티 님, 러비엠 님, 1104 님, 피아 님, 개나리 님, 리리 님, 향 님, 0618 님, 우가우가 님, 쿠쥬 님, 시조새 님, 돌틈꽃 님, 정민영 님, 설렘 님 감사합니다!!!
나중에 또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