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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이 기어코 나를 불러냈다. 내 생일을 하루 앞둔 점심시간 때의 일이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그 녀석과 다른 반이 됐다. 나는 제일 끝에 있는 1반, 정국이는 4반으로.
심심하면 붙어있었던 우리였기 때문에 반이 떨어진다고 해서 서로에게 소홀해진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지만, 내가 일방적으로 전정국에게 쌀쌀맞게 군 날 부터
우리에게 접점은 거의 없었다. 간혹 눈이 마주칠 때 그 눈빛에 의문을 가득 품고 있었지만, 그 녀석은 한 번도 내게 그 이유를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 이여주. "
나는 그 녀석을 올려다 보는 것으로 대답했다.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일말의 혼란스러움이 담겨있었다.
" 너 왜 요새 나 피해. "
" 피한 적 없어, "
" 티나게 거짓말 할려면 하지 말랬지. 무슨 일 있어? "
" 아니, 그런거 아니야. "
" 근데 왜…, "
" 니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거겠지. 근데 나 피한적 없어. "
녀석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표정이 묘하게 복잡해졌다.
" 나는 너 나한테 뭐 화난거 있는줄 알고 매일 불안했는데 너는 왜 이렇게 태연해? "
" 그런거 없다니까. "
" 그게 아무 일도 없는 사람 표정이고, 행동이야? 너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잘 말해주잖아. 나한테 뭐 섭섭한거 있으면 말을 해. 사람 답답하게 하지말고. 집에 혼자 간다면 혼자 간다고 말을 하던가,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던가. 말도 안 하고 뭐 있는 사람처럼 입만 다물고 있으면 해결돼? 난 생각 안 해줘? "
" 니가 내 남자친구야? 그걸 왜 니가 신경써? 나한테 화는 왜 내? "
"..........."
" 너야말로 사람 오해하게 만들지마. "
" 무슨 오해. "
" 알려고도 하지마. 당분간 모른 척 해줘. "
" 여주야, 너 진짜 왜 이래. "
내 어깨에 조심스레 닿아오는 손길도 뿌리치고는 다시 교실로 들어왔다.
어지간히 답답하긴 했나보다. 말을 저렇게 길게 하는 성격이 아닌데, 보자마자 역정을 쏟아내는게 안 봐도 그간 내 걱정을 많이 한 것 같아서.
안쓰러워졌다. 내가 참 나쁘다. 고작 그런 마음 숨겨보자고 몇 년이나 내 생각만 해준 너에게 이렇게 화만 내는 꼴이 참 나쁘다.
그런데 너도 참 나쁘다. 자꾸만 오해하게 만드는게.
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꽤 다정한 눈빛으로 사람 마음 괴롭히는거.
폭풍같은 사춘기가 지나고 나서야 깨달은 마음이지만, 너는 나와 같은 시기에도 항상 같았다.
24시간 짜증을 달고 살던 나임에도 너는 항상 나를 타일렀고, 울며 불며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나였음에도 끝까지 달래서 옷깃을 여며주던 너였다.
너를 처음 만난 날부터 항상 너는 나보다 어른스러웠고, 차분했다.
내가 화만 잔뜩 낸 오늘도, 너는 차분했다.
그래서 더 겉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는 마음이 원망스럽다. 눈물이 자꾸만 틈새를 비집고 나오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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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 까지 들여다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첫사랑 - 이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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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까 친구들의 카톡이 여러 개 와있었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편지들. 슬핏 웃음이 나 잠도 덜 깬 눈으로 기분 좋게 보고 있자니
맨 밑에 와 있는 정국이의 카톡이 눈에 띄었다. 잠시 만나자는.
급하게 씻고 옷을 대충 챙겨 입고는 기다리고 있을 그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얼마 안 가 끊겼다.
" 준비 다 했어? "
"....응. "
" 잠시 나올래? 줄게 있어서. "
" 어디로 가면 돼? "
" 집 앞에 기다리고 있어. 얼른 나와. 춥다. "
어제 내가 모진 말을 그렇게 뱉고 돌아섰음에도 불구하고 그 녀석의 목소리는 눈물나게 다정했다.
줄게 있다는건 분명 생일 선물이 틀림 없었다. 며칠 전 이모께 들은 그 문제의 생일 선물.
괜히 문 앞의 전신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보고 현관문을 열었다.
로비로 나가니 녀석은 큰 천가방을 들고 바닥만 보고 있었다. 내가 온 기척을 느꼈는지 그제서야 고개를 든다.
" 일단, 생일 축하해. 카톡으로 하는건 너무 멋 없어서. "
" 참 나, 언제는 멋있었다고? "
" 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네- "
" 그래서 줄게 뭔데, 그거야? "
" 아아, 어, 별거 아닌데 그냥…, "
" 별거 아닌데 그게 그렇게나 비싸서 그거 때문에 아저씨랑 싸우고 집을 나오셨겠다? "
정국이는 놀란 눈을 했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 엄마가 말했어?!
" 참 애 같다. 미친거야? 내 선물 산다고 돈을 그렇게나 많이 쓰고? 편지면 충분하다고 했잖아. "
" 그래서 편지도 써왔잖아. "
그러고는 칭찬을 갈구하는 애완견처럼 동그란 머리통을 내 쪽으로 슥 하고 갖다댄다.
잘~한다. 잘~했어.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까 진짜 칭찬해주는 줄 알고 바보같이 웃는데, 그 면전에다 대고 화를 낼 수 없는 노릇이라 나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따라 웃었다.
" 선물은 맘에 들면 좋겠어. 그리고 어제는 미안. "
" 니가 왜 미안해. 나는..나는 그냥. "
" 됐어 말 안 해도 돼. 대신 나 좀 피하지마. 말 하는건 안 바랄테니까 집에나 같이 가자고. 넌 얼굴이 무기여도 밤에는 위험해서 안 돼. 아무튼, 알겠지? "
" 응. 추우니까 들어가. "
" 그래, 너 피곤할까봐 놀자는 말도 못 하겠다. 케익은 이모께 전해드렸어. 먹고, 전화해. "
" 응,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
" 미안하다는 말 듣기 싫어. 하지마. 무튼 전화해. 나 간다. "
초봄이라 아직 쌀쌀한 날씨였지만 난 정국이가 사라져가는 그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고 서있었다.
어제의 그 서먹함과 불편함이 녀석의 용기로 또 한번 풀어졌다. 이렇게 매번 져준다. 진짜 다정한 새끼.
집에 와서 전정국이 준 케익을 찾았다. 엄마는 정국이가 매년 너 때문에 고생에 고생은 다 한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고맙다고 싹싹 빌라했다.
우리 동네에는 없는 빵집에 파는 케익이 있는데 나는 어릴 적부터 그 케익이 아니면 케익은 입에도 안 댔다.그걸 아는 전정국은 올해도 그 먼 동네까지 가서 그걸 공수해 온거고.케익을 식탁 위에 올려 놓고는 거실 바닥에 앉아서 그 녀석이 준 큰 가방을 열어봤다. 내가 몇 달 전 부터 갖고 싶다고 징징거리다가 결국 돈을 모아서 사겠다고 선언한 그 코트.그래서 나 돈 모은다고 둘이 있을 때는 맨날 정국이만 계산을 한 기억이, 아니 전적이 있다.얘는 끝까지 사람을 나쁜 사람 만드네.
사이즈도 딱 맞는 코트를 다시 곱게 접어서 가방 안에 넣었다. 그리고 매년 같은 색깔 같은 모양의 편지봉투를 열었다.
유치원 때부터 한결같은 글씨체가 나를 반긴다. 그리고 한결같은 첫 인사도.
「 이여주, 안녕. 몇 번째 쓰는 편지인지 기억도 안 난다. 다 잘 간직하고 있지? 올해도 이렇게 편지로 때우자니 니가 그렇게 눈에 아른거린다던 코트가 누구 덕분에 내 눈에도 아른거려서. 돈 모아 놓은건 이모 생신 선물 해드리는데 써. 사이즈는 맞을지 모르겠는데, 매장 누나가 맞을거라면서 포장해줬어.잘 입고 다니면 좋겠다. 맘에 들지? 사실 요근래에 니가 나 자꾸 피하고 쌀쌀맞게 대하길래 내가 뭐 잘못했나 싶어서 많이 생각해봤어.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어서 물어본건데 그렇게 화낼줄은 몰랐다. 내가, 미안해. 너 기분도 모르고 자꾸 물어봐서. 잠깐 기분 안 좋은거라고 생각할테니까 얼른 다시 원래 이여주로 돌아오면 좋겠다. 우리 어릴 적부터 나 잘 챙겨줘서 고마워. 그래도 서로 제일 친한 친구가 이성이라서 안 맞는게 많을 법도 한데 너랑 나는 원체 어릴 때부터 봤으니까...니가 많이 맞춰주는 것 같기도 하고? 나 많이 답답하지. 매일 참고 나 놀아줘서고마워. 우리 내년에 고삼이다. 성인되면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자ㅋㅋ너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타투도 내가 같이 하러 가줄게. 니가 놀이공원 가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티켓 끊어놨는데 너 요새 좀 피곤해보여서.괜히 데려갔다가 더 피곤해할까봐 그냥 과감하게 버렸어. 여름방학 하면 같이 가던가 하자. 내가 말도 없고 표현도 못해서 글로 말하지만, 항상 고마워. 나랑 친구해줘서.이번 생일도 축하해줄 수 있어서 기뻐. 생일 축하해, 이여주. 다 읽으면 전화해! 」
거실 바닥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얘는 내 생각 밖에 안 하나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또 마음 졸였을 녀석을 생각하니까 너무 속상했다.
나를 이렇게나 생각해주고 위해주는데 나는 한심하게도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자 그렇게 차갑게 밀어냈다니.
편지를 다 읽고 나서야 조금의 기대감이 생겼다.
얘도, 나를, 좋아하나? 이때까지 오해하게 만든거 전부, 다 그래서 그런거 였나?
더 이상 그 아이를 밀어내는 것은 서로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그 대신 마음을 확인해보자고. 그렇게 다짐했다.어쩌면 나를 좋아하지 않는게 아닐거라며, 스스로 위안도 했다.
정국아, 내가 너를 좋아해도 되는거겠지?
내 마음을 안다면 대답해줄래.
너도 나를 좋아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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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ㅅ; 정국이와 여주의 삽질(???) 때문에 가슴이 많이 답답하셨죠?
예......저도 그래요..(먼산)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리고 매번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모두 다 감사합니다! 정국이랑 여주도 감사하대요!(소근)
♥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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