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인은 본능적으로 찬열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본능이란 것은, 감각과 무관한 것. 찬열이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동시에, 종인의 귓가로 날아드는 소리는
분명 경수를 향해 있었다.
"도경수....!"
종인은 모든 감각을 끌어들여 경수에게 손을 뻗었다. 경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오는 종인의 손을 바라보았다.
총알은 쉬지않고 제 길을 가고,
종인은 필사적으로 경수를 끌어당겼다.
경수의 멍한 눈동자는 종인의 앞품으로 향했다. 코끝이 종인의 가슴팍에 강하게 눌리는 순간,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음속의 불꽃의 흔적.
"아윽...!"
입술을 깨물며 화끈거리는 통각을 견뎌내려 터져나온 짙은 신음소리는 종인의 것이었다.
"종인아!!"
"스쳤어, 괜찮아."
경수는 다급하게 종인의 손을 붙잡았다. 꽤 깊게 스쳤지만 다행이 총알은 박히지 않았다. 핏물이 경수의 손바닥에 고여들었다. 종인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누르자 종인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럴 시간..없어. 지금...."
종인은 자신에게 달라붙는 경수의 손을 가볍게 떨쳐내고 그 대신 경수의 어깨를 붙잡았다. 종인은 발끝으로 찬열을 툭툭 건들였다. 찬열은 약에 취한 것 같은 얼굴로 종인을 바라보았다.
"박찬열. 정신차리고 들어. 11시 방향으로 한 부대, 4시 방향으로 한부대, 혹은 두 부대 배치중이고, 이쪽으로 진입중이야. 포위당하기 전에..."
"..이미, 늦었어."
"박찬열!!!!!!!"
찬열은 품에 안겨있는 백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 하얀 볼을 쓸어내렸다. 손에 묻은 피가 백현의 볼에 옮겨 묻었다. 하얀 볼에 엉망진창으로 묻은 붉은 피는 눈길에 떨어진 동백의 헤쳐앉은 동백의 꽃잎같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찬열은 묻은 피를 보더니 깜짝 놀라면서 황급히 다시 닦기 시작했다.
"미안해...백현아, 미안해....백현아..."
피묻은 손으로 핏자국을 닦아내다보니 백현의 볼은 더욱 붉은빛으로 어지러워졌다.
그 순간, 총성이 한 번 더 울렸다. 총알은 경수의 뒷목을 스쳐 벽에 박혔다.
"숨어있는 거 다 알고 있다!!!!김종인, 그리고 박찬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박찬열.."
종인은 어금니를 갈며 찬열의 이름을 불렀다. 찬열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져내렸다. 두 손은 바들바들 떨렸다. 백현은, 역시나, 숨조차 쉬지 않는 것처럼,
세상에서 제일 슬픈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종인은 무릎을 세워 일어났다. 찬열의 팔뚝을 붙잡아 일으키려고 했다.
그 순간, 찬열의 눈빛이 깨어지듯 변했다. 종인의 어깨를 세게 누르며 자신이 그 위를 덮었다. 곧이어 들려오는 찬열의 악에 찬 신음소리.
"박찬열!!!!!!"
"윽....."
허리춤에 정통한 총알은 샘의 용천처럼 피를 뿜어내었다. 생생한 붉음의 액체는 백현의 가슴팍을 적셨다.
"..넷은 무리야."
"무슨 소리야!!!"
"여기서, 니가 더 다치면, 아무도 못 나가.."
"박찬열, 정신차려. 일어나!!!"
찬열은 종인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 전의 몽롱한 눈빛이 아닌, 깨어진 유리창에 비친 명롱한 확신을 종인은 읽을 수 있었다.
찬열의 입술이 달싹였다. 망설이는 말마디가 바싹 마른 입가에 붙어 머뭇거리고 있었다. 찬열은 가쁜 숨을 두어번, 몰아쉬더니 마침내 결심한 듯 입을 때었다.
"..백현이, 부탁한다."
그와 동시에 백현을 종인의 어깨에 들쳐매었다. 종인은 얼떨떨한 기분을 채 지우지도 못한 채 뛰쳐나가는 찬열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찬열은 옥상의 창고 위쪽으로 올라가 적들의 동태를 살폈다. 그리고 나서 재빠른 동작으로 몸을 숨겼다. 연이어 들려오는, 거친 고함소리. 총탄이 바닥에 튕겨져 나가는 소리. 벽에 부딛히는 소리.
"종인아.."
번뜩, 혼란스러운 종인의 세계 안으로, 부드럽게 흘러들어온 한 줄기. 그 무언가. 하나의 감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상의 모든 온기를 끌어모은 것만 같은, 그 원초적인 따스함에 종인은 환각같은 그의 세계에서 깨어났다.
도경수. 그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전방 10km까지 볼 수 있는, 센티넬의 시력은 결국.
제 앞에 멈춰선 온전한 우주 앞에서는, 별 것 아닌 것이었다.
경수야.
종인의 입술이 중얼거렸다.
나의 우주는 내 앞에 있었다.
오래 찾아 헤메었던 그 시간이 아까울만큼 가까이.
나에게 팔을 뻗고, 손을 잡아준 나의 우주를, 이제는,
경수야.
종인은 경수를 품으로 안았다. 어깨와 두 다리를 각각 한 팔로 바치고, 백현의 다리를 허리에 단단하게 감았다.
난간으로 다가갔다. 한눈에 아득한 높이가 눈앞에 펼쳐졌다. 경수는 의식적으로 눈을 꾹 눌러 감았다.
그런 경수의 눈 위에, 따듯한 촉감이 닿아왔다. 깜짝 놀란 경수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속눈썹이 닿아왔다. 종인의 속눈썹과, 자신의 것이.
이마에 뜨끈한 온기가 번져왔다.
지독하게 까만, 그의 눈동자가, 나의 우주가, 나의 세상이,
코앞으로 다가온, 벅찬 그 세계가, 그 세계를 감싸고 있는, 그의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말 한마디 없이, 숨소리조차도 미약한, 좁디좁은 둘 만의 여백에서,
정말, 아무것도 없었지만,
많은 것이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내려갈거야?"
경수가 입술을 작게 움직였다. 종인은, 살풋 웃음이 베어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대답했다.
"아니, 날아갈거야."
종인은 뒤를 돌았다. 멀찍이서 찬열의 모습이 보였다. 작게 인사했다. 나중에, 꼭 다시 보자. 하며.
종인은 무게중심을 뒤로 옮겼다. 허공에 발이 뜨는 것을 느꼈다. 뭔가, 찬열과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했다. 점점 작아지는 시야에서, 찬열의 손이 가볍게, 움직이는 것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인사를 하는 것처럼.
백현아, 안녕. 안녕.
바람같은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강한 진동과 함께 아스팔트에 부딛혔다. 발목에 심한 무리가 간 것 같았다. 절뚝거리면서 걸음을 걷는데, 찡그려진 시야에서 낯선 광경이 보였다.
눈을 꾹 감고 있던 도경수는, 떨어지는 내내,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랫동안, 상처난 내 손을 쥐고 있었다. 하얗고 작은 손에는 검붉은 핏물이 꽃잎처럼 남아있었다. 반면에 제 손은 멀끔했다. 종인은, 아, 이 말할 수 없는 간지러운 느낌에, 벅차오르는 사랑스러움에,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경수의 감은 눈 위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촉. 가벼운 마찰음이 났다. 경수는 번뜩 눈을 떴다. 커다란 눈동자가 길을 잃고 흔들거렸다. 종인은 입꼬리에 묻은 웃음의 흔적을 차마 지우지 못하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혹시, 있잖아.."
"...."
"...방금....혹시, 너...."
더듬더듬, 조무락거리는 입술이, 새로 돋아다는 잎싹의 움직임 같았다. 그 생명력의 조그마한 움직임에, 종인은 다시 입술을 갖다대었다.
찬열은 멀찍이 서 있는 종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어깨 위로 고개를 누이고 잠들어 있는 백현의 얼굴을.
종인의 발걸음이 떨어졌다. 가냘픈 머리카락이 허공에 흐느꼈다. 하얀 얼굴에, 바람이 묻어 창백한 빛을 더했다.
아, 천사가 보였다.
눈물이, 고였다.
아멘.
찬열은 작게 인사했다.
안녕, 나의 천사.
너의 잠을 방해할 사람들이 없는, 너를 닮은 곳에서,
지금처럼, 행복하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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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헣 안녕하세욯ㅎㅎㅎ
원래 이거보다 좀 더 쓸려고 했는뎈ㅋㅋㅋㅋ그럼 뭔가 장면이 지저분해져서
이렇게 찬열이 말로 예쁘게 끝내려고요ㅠㅠㅠㅠㅠㅠㅠ요즘 바빠서 연재텀이 길어지는데
늘 댓글달고 읽어주시는 분들 정말정말 감사해요!!!!!!!!늘 힘나는거 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