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뭐해?”
“어? 그냥 옛날 생각.”
그랬던 애가 언제 이렇게 컸지? 민윤기는 지금 나보다 키도 한 뼘 정도 크다. 골격도 있어서 말랐지만 비실비실해보이지는 않는다. 분명 나랑 소꿉놀이를 하던 민윤기는 나보다 키도 작고 어깨도 좁았는데 언제 이렇게 컸지?
“도로에서 그러면 위험해.”
나는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친절을 베푸는 민윤기를 보면 좀 설렌다. 사실, 나는 내가 민윤기를 좋아한다는 걸 중학교 졸업식날 알게 됐다. 민윤기는 장난으로 아주 먼 남고에 붙었다고 내게 거짓말을 쳤고 나는 그걸 믿고서 민윤기 앞에서 울었다. 그런 나를 달래준다고 민윤기가 고생을 엄청 했다. 그 세모난 눈을 들이대면서 나한테 울지 말라고 어색하게 안아주면서 달래주는데 나는 그 순간 내가 왜 우는지를 생각해보게 됐다.
나는 민윤기를 볼 수 없다는 생각이 슬퍼서 운 거였다. 옆집에 살던 민윤기가 아주 먼 남고로 가버려서 나랑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는게. 그 순간 멈췄던 울음을 다시 터트리고 싶었다.
그제서야
결국,
인정했다.
나는 민윤기를 좋아한다.
그것도 민윤기를 못 보는 생각을 하면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트려버릴만큼.
* * *
“너 또, 자냐?”
소란스러운 교실. 새학기지만 아는 얼굴들이 많아 시끌시끌한 교실에서 잠을 자던 민윤기는 일어나자마자 내 뒷통수를 세게 때렸다.
“아, 완전 아프잖아!”
지는 지금까지 잤으면서, 염치도 없어. 너무 당당하게 굴어서 뭐라 할 힘도 잃어버린 내가 민윤기를 째려보고 있자 민윤기는 내 손목을 잡았다. 그것도, 세게. 나는 민윤기의 힘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게 항의하자 귀찮은 얼굴로 따라오라고만 말한다. 완전, 어이없어.
“어디 가는데.”
“너 아침 안 먹었다며.”
얘가 이걸 어떻게 알지. 아침에 내가 비몽사몽하면서 민윤기한테 말했나보다. 이 놈의 입은 주인을 따르지를 않는다.
“나 어제 용돈 받았어.”
그렇다면 털어주는게 예의아니겠는가? 나는 얌전히 과자를 골랐다.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민윤기의 시선을 무시한채로 꿋꿋히 집었다. 아줌마와 친한 덕분에 살랑살랑 애교를 부리니 졌다는 눈빛으로 계산해주셨다. 아줌마를 공략한 보람이 있는데?
“돼지. 맛있냐.”
이게 누구보고 돼지.. 라고 할 수 있는 자격이 민윤기에게는 넘쳤다. 남자 주제에 다리가 나보다 얇아.. 민윤기 다리를 한 대치면 금방 넘어질 것 같다. 비실이.
“엉. 완전 맛있다.”
과자는 죄가 없다. 민윤기 다리가 얇은게 과자의 죄도 아니고, 나는 과자를 맛있게 먹었다. 나나콘 짱. 윤기 오빠 맛있어요! 라고 장난스럽게 얘기하니 민윤기는 질색을 했다. 개새끼.
“다음 시간 준비나 해.”
저런 말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하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민윤기를 볼 때마다 사실 조금 설렌다. 쟤는 내가 작게 지나가는 말도 기억하나 싶어서. 근데 이건 어렸을때부터 그랬던 거라 기대를 할 수도 없다. 뭐, 그냥 설레는건 죄가 아니니.
“야, 나 한입만.”
친구의 얼굴을 밀어냈다. 민윤기가 사준건데 뺏기기에는 너무 아깝다. 그리고 민윤기도 내가 뺏기는 걸 좋아하지 않을걸 안다. 쟤가 말 안해도 나는 다 아니까.
“좀 나눠줘라, 돼지.”
는 무슨, 저 새끼는 그냥 나를 놀리는 걸 좋아하는거다.
“밥, 밥, 민윤기 밥. 빨리.”
점심시간이 제일 좋다. 우리 학교 급식은 완전 맛있는데 민윤기는 밥을 잘 안 먹어서 몇 번 먹고 끝낸다. 그래서 나는 민윤기랑 밥 먹는게 제일 좋다. 민윤기 식판에서 뺏어먹는 고기는 꿀맛이니까.
“돼지야. 좀 천천히 가면 안 돼?”
“늦게 가면 늦게 먹잖아! 나 빨리 먹고 놀아야되거든.”
나는 기본적으로 활발한 성격이였다. 애들이랑 얘기하는 것도 좋아하고 뛰어노는 것도 좋아하는. 근데 민윤기는 정반대다. 오히려, 잠을 자고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한다. 인생을 그렇게 재미없게 사냐고 뭐라 한 마디 했더니 삐져서 집에 들어갔다. 하여간, 속 좁기는.
“윤기야, 오늘 돈까스 나온다!”
“너 내것도 먹을거잖아.”
당연한거 아닌가? 민윤기는 맨날 남기는데 그건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아, 그래서 민윤기가 그렇게 말랐나보다.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던데..
“먹고 농구하러 갈거야.”
“보러 오라고?”
“어.”
나야 좋지. 민윤기는 농구할 때 제일 멋있다. 별로 크지도 않으면서 골을 막 넣고 애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데 그럴 때 민윤기를 보면 솔직히 정신 놓고 보게 된다. 그 때는 민윤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거 같은 착각이 좀 들기도 한다. 물론, 아닌 걸 알지만.
“빨리 먹어.”
민윤기는 내가 다 먹을때까지 늘 기다린다. 그래서 빨리 먹으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나는 집에서도 밥을 제일 늦게 먹는데 빨리 먹으려고 하면 오히려 더 얹혀서 불편하다. 그걸 알면서 늘 닦달하는 민윤기를 째려보자 조용해진다.
“너는 왜 맨날 이렇게 깨작거리냐. 나는 잘 먹는 남자가 좋은데.”
민윤기가 움찔한다. 자기도 자기가 밥을 많이 남기는 걸 아나보다.
“너 잘 먹는 남자 좋아해?”
“어. 완전. 몰랐어?”
“몰랐는데..”
민윤기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민윤기의 입술을 좋아한다. 여자인 나보다 촉촉해서 딱히 뭘 바른것도 아닌데 빨간색이다. 그래서 나는 민윤기가 입술을 깨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쓰읍, 하고 쳐다보니 민윤기가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밥을 먹..
밥을 먹는다?
“너 뭐해?”
“밥 먹잖아.”
“너 원래 밥 잘 안 먹잖아.”
“오늘따라 먹고 싶은데.”
농구할때는 몸을 가볍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애가 오늘따라 미쳤나? 진지하게 민윤기의 이마를 짚으니까 민윤기가 화를 냈다. 아니, 얼굴이 빨개서 아픈 줄 알았지! 억울해서 소리치니까 조용히 하라고 입을 막는다. 어이 없어.
민윤기와 나는 밥을 다 먹고서 식판을 두고 나왔다. 민윤기는 농구를 하러 운동장으로 갔고 나는 교실로 들어가 친구들을 데리고 나왔다. 나는 원래 성격이 머스마 같아서 여자애들 보다는 남자애들이 편했다. 그래서 친한 친구들 중에도 남자애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편한 김태형과 민윤기의 농구를 보러 나왔다. 김태형은 남자면서 운동을 참 싫어한다. 좀 해보라고 했더니 땀나는 건 싫다 그랬다. 퍽이나 좋은 핑계다. 움직이기 귀찮은거면서.
“민윤기!”
내가 민윤기 이름을 부르자 민윤기가 뒤돌아 봤다. 파이팅! 하고 손을 흔들어주니 민윤기가 살짝 웃고 다시 편을 가르기 시작했다. 오, 주장인가보다. 좀 멋있는데? 김태형이 옆에서 말을 걸어와도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줬다. 얘는 애가 참 해맑다. 그리고 시끄럽다.
“민윤기 겁나 잘해.”
“그러게. 민윤기가 제일 잘하는 듯.”
“눈에 콩깍지 씌였냐.”
김태형이 정색하면서 나를 쳐다봤다. 맞으니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아직 어느 팀에서도 골이 나오질 않았다. 나는 민윤기가 골을 넣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민윤기는 땀이 많은 편이 아니라 땀은 흘리지 않았지만 열심히 뛰어다녀 얼굴이 빨개져있었다.
“윤기야!”
민윤기가 골을 넣었다. 신나서 김태형이 창피하다고 하는 것도 무시하고 일어나서 민윤기의 이름을 불렀다.
민윤기가
웃으면서
돌아봤다.
“...”
빨개진 얼굴로 민윤기가 손으로 하트를 그렸다. 나는 멍해져서 그대로 멈춰있었다.
민윤기
하트
이 두 글자만 생각났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직 봄인데 여름이 온 것처럼 아득했다. 민윤기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사람 심장을 들었다놨다했다. 어렸을때부터 알던 민윤기가 아닌 것 같았다. 민윤기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농구를 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경기는 민윤기네 팀이 이겼다. 나는 이것도 김태형의 입으로 들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민윤기가 한 행동밖에 생각나지 않아서 집중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에도 계속 그 생각뿐이였다.
“빨리 가자.”
나와 민윤기는 야자를 하지 않는다. 같이 과외를 받는데 민윤기는 가방을 챙기는 것도 안 한다. 덕분에 늘 나를 재촉하는데 나는 설렁설렁 대꾸를 해주는 편이다.
“야, 너 어디 아파?”
“아, 안 아프거든!”
민윤기가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당황해서 그 손을 내쳐내자 나를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길래 가방을 메고 바로 교실에서 나왔다.
“아, 같이가.”
들릴까? 나는 평소에도 민윤기랑 있으면 심장이 빨리 뛰고는 했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하다. 민윤기는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따라왔다.
“아까 내가 농구하는거 다 봤어?”
“어, 너 멋있더라. 제일 잘하던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게 나한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 아니다. 민윤기 눈치를 보게 되고 나도 모르게 침이 마른다. 얘는 그걸 알까?
“아까 내가 너한테 한 거 못 봤어?”
“봤는데. 다 봤다니까?”
너한테만 해준거야. 나는 얘가 이럴 때 의도를 모르겠다. 진심으로.
“다 왔다.”
과외는 민윤기네 집에서 한다. 내가 여자 방은 함부로 들어오는거 아니라고 우겨서 민윤기네 집에서 하기로 했다. 사실 그건 핑계고 나는 민윤기네 방에서 은은하게 나는 냄새가 좋았다. 민윤기한테 향수를 뿌리냐고도 물어봤었는데 그건 아니라고 했다. 향수도 뿌리지 않으면서 무슨 냄새가 나냐고 했다가 비웃음을 당했다. 헛소리 한다고. 그 뒤로는 말은 안 하지만 나는 민윤기 옷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한다. 민윤기한테서만 나는 냄새.
“오빠, 안녕.”
석진오빠는 먼저 와 있었다. 석진오빠 또한 어렸을때부터 알았던 오빠여서 편하기도 하고 싸게 해준다고 해서 우리는 석진오빠한테 과외를 받고 있다. 오빠는 대학도 잘 갔다. 건국대. 나도 오빠 후배가 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숙제 해왔어?”
아, 숙제 안 해왔다. 우물쭈물 거리고 있으니 오빠가 한숨을 쉬었다. 나만 안 한 것 같아서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옆에서 민윤기도 안 해왔다고 했다. 살았다! 오빠는 어쩔 수 없다며 빨리 하라고 한 뒤 화장실에 갔다온다고 했다.
“빨리 해.”
“넌 왜 안 해?”
“난 했으니까.”
민윤기가 자기 책을 나한테 주면서 얘기했다. 민윤기는 수학을 잘 한다. 왜 나랑 같이 과외를 받는지 모를 정도로. 민윤기 책은 풀이부터 세세하게 되있었다.
나는 민윤기가 이럴때마다 헷갈렸다. 민윤기는 너무 어려운 문제다. 답이 나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풀 만한 공식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나는 수학은 좋아하지도 않는 주제에 민윤기는 풀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다.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민윤기는 아무렇지 않게 힌트를 툭 던져준다. 그래서 나는 몇 년째 민윤기라는 문제 하나에만 매달려있다.
“좀 고맙냐?”
민윤기는 아무렇지 않게 핸드폰을 켜서 카톡을 했다. 누구랑 하는지 궁금했지만 꾹 참았다.
“얘 귀엽지 않아?”
얘는 고등학교 들어와서 인기가 좀 많아졌다. 무기력한 모습이 남들한테는 멋있어 보였는지 번호도 따이고 연애도 했다.
“나 좋다고 그러는데 사귈까봐.”
공식을 잘 못 써서 지우개로 지웠다. 민윤기는 왜 지울 수 없는 문제일까. 힌트를 주는데도 쓰지 못 하는 내 탓일까, 힌트만 주고 도와주지 않는 민윤기 탓일까. 민윤기는 풀리지 않는 문제였다. 숙제를 다 하고 석진오빠가 왔는데도 웃지 못 했다. 이렇게 가끔씩 아무렇지않은 척을 할 수 없는 날이 있었다. 평소에는 내가 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도 생각하지 않았다가 이렇게 얘가 툭툭 던지는 날이면 나는 늘 그걸 가슴에 품었다. 처음부터 홈런인 공을 쫓아가는 것처럼 나는 잡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그걸 두고보기 보다는 늘 얘가 하는 행동을 생각하며 마음 속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늘 한 방 먹을 걸 알면서도.
* * *
첫 화는 짧아요! 만나서 반가워요 :) 언제 올라올지 모르는 불친절한 글이지만 최대한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같이 달려주신다면 더없이 고마울거에요.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이 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겠죠? 그런 분들이 읽어주는 글을 쓰게 된 저는 아마 조금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싶네요.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신다면 정말 감사드릴 것 같아요. 소통하는 것 또한 좋아해서 댓글 달아주신다면 답글 달아드리려고 노력할거에요, 아마. 글잡은 처음이라서 모르는게 많지만 부족한 저와 함께 달려주신다면 정말 감사드릴 것 같아요! 처음 만나서 반가워서 계속 주절 거리게 되네요. 재미없는 글과 사담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읽느라 수고하셨어요 :) 포인트 아까우니까 포인트 받아가실 정도의 댓글만 달아주세요. 여러분의 포인트를 받고싶은게 아니라 서로 소통하고 싶어서, 욕심을 좀 부려봤네요. 정말로 포스트 스크립트는 그만 날릴게요. 불친절한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