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째 연애중 08 " 너 어제 찜질 열심히 했나보다? " " 어? " " 눈이 하나도 안 부었네. 원래 엄청 팅팅 부으면서. " " 어휴, 말도 마. 집에 있는 얼음 죄다 들이부었다니까. " " 오바한다 또. " " 진짠데. 그나저나 너 오후수업도 있었어? 너 오후에는 잘 안 듣잖아. " " 지난번에 수강신청 망했어. " " 그니까 피씨방 가랬잖아. 낡아빠진 집 컴퓨터로 뭐 어쩌겠다고. " " 난들 하필 그때 렉 걸릴줄 알았냐. 아, 가기 싫다. " 민윤기와 나는 서로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함께 해 온 시간이 오래된만큼 서로에 대한 사소한 것들도 잘 알고 있었다. 남들에 알고 있는건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서로를 더 알고싶어하는 그런 호기심은 없었지만 그 대신에 편안함이 존재했다. 나는 민윤기에 관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가족을 제외하고 가장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뽑으라면 난 망설임없이 민윤기를 뽑을 것이다. 내가 그렇듯 민윤기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만큼 자신있었다. " 민윤기. 근데 우리 멜론 비밀번호 뭐였지? " " ...어? " " 비밀번호 뭐냐고. 멜론! " 내 질문에 민윤기는 이상한 소리까지 내며 심하게 당황스러워했다. 내 심각한 병인 귀차니즘 때문에 오래전부터 민윤기 아이디를 뺏어 같이 썼다. 한동안 유행에 뒤떨어져 살아서 신세대가 되기 위해 신곡차트를 뒤져보았다. 평이 좋은 노래를 다운받으려고 했는데 아이디를 입력하란다. 그런데 오랜만에 로그인을 하려니 비밀번호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물어봐야지하다가 마침내 생각이 나서 민윤기에게 물어보았는데 뭐가 그리 놀랍고 당황스러운지 토끼눈을 뜨고는 날 바라본다. " 아니, 갑자기 왜? " " 왜는 왜야. 노래 들으려는데 기억이 안 나서 그렇지. 한동안 로그인 안했더니 비밀번호가 기억이 안 나. 어디 적어놓은거 같긴 한데. " " 나도 모르겠는데? " " 에? 그럼 비밀번호 찾기 해봐야겠다. 넌 알고 있을거 같아서 안했는데. " " 야! 내가... 내가 할래! " " 어? 어... 그러던지... 근데 넌 맨날 음악 들으면서 어떻게 그것도 모르냐. " " 지도 까먹은 주제에 말은 많아요. " " 됐고, 비밀번호 찾으면 나한테도 알려줘. " " 야, 그냥 이참에 너도 아이디 하나 만들어. 귀찮아죽겠어. " " 난 잘 쓰지도 않는데 뭐가 귀찮아! " " 그니까 그냥 하나 만들어. 나중에 또 잊어먹고 비밀번호 알려달라고 찡찡거릴거잖아. " " 와- 치사하다 치사해. 알았어알았어. 치사해서 내가 그냥 하나 만들고 만다! " 민윤기의 때 아닌 심술에 퉁명스럽게 답한 나는 툴툴대면서 괜시리 걸음을 빨리해 걸었다. 그렇지만 짧은 다리가 빨리 걸어봤자였다. 민윤기는 빠른 걸음으로 단숨에 나를 따라 잡았고 어느새 토라져있는 내 눈치를 보며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 야. 삐졌어? " " 아니. " " 에이- 삐졌네. " " 안 삐졌다니까? " " 야 뭘 그런거 가지고 그러냐. 응? 삐지지마. " " 안 삐졌다고. " " 에휴, 아이디는 내가 만들어줄게. 어? 화 풀기다. " " 안 삐졌다니까... 너가 만들어주는거다? " 내가 절대 쉬운 여자 아닌데. 내심 아이디 만들기 귀찮았던 나는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애써 감추며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 ...좋다! 오늘 민윤기가 치킨 쏜다. 이따 우리집으로 와. " " 야 안돼. 나 오늘 애들이랑 약속있어. " " 뭐야, 나도 오늘 약속있는데 사주려고 했던거야. 바쁘시다는데 그럼 못 먹는거지뭐. " " 아, 그런게 어딨어! 다음에 사줘. " " 기회는 한번뿐이야. 니가 뻥차버린거지. " " 다음에 사줘! 응? 사줄거지? " " 몰라. 너 하는거 봐서. " 매정하게 고개를 돌린 민윤기에게 다음에는 꼭 사달라고 팔을 붙잡고 늘어지고 찡찡대면서 길을 걷던 중, 핸드폰에서 카톡 알림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 김태형님 사실 시골 가는 중. 차 막혀서 심심해쥬금ㅠㅠㅠ 놀아 줄 예쁜이구함. ' 애도 아니고 심심하다고 놀아달라니. 다 큰 어른이면서도 늘 하는 김태형다운 아이스러운 발상에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참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연신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김태형에게 답을 보냈다. ' 예쁜 애는 지금 등교 중. 열공해야하므로 바쁘니 김태형님은 알아서 노시길 바람. ' " 누구야? "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가까운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옮겼다. 내 핸드폰 속 톡 내용을 훔쳐보기라도 한건지 민윤기는 고개를 쭉 내밀고 핸드폰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 누군데 자꾸 실실 웃어. " " 어? 아, 친구. " " 아... 혹시 그 때 그 사람? " " 어? 응... " " 많이 친한가봐. 너 낯 가리잖아. " " 그냥... 친화력이 좋아, 얘가. " " 언제부터 친해진거야? 왜? " 민윤기답지 않게 하나하나 시시콜콜 물어오는 그 모습이 낯설었지만 그래도 모처럼 민윤기가 관심 가지고 던진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김태형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 올해 초인가? 강의실에서 처음봤는데 따라오면서 자기랑 친구하자고 자꾸 조르길래.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다. 하는 짓이 완전 애같아. " " 친구하자고 졸랐다고? " " 응. " " 너한테? 갑자기? " " 응. 근데 예전부터 친구하고 싶었다고 하긴 했어. " " 혹시 그 사람 너 좋아한대? " 갑작스러운 민윤기의 물음에 순간 탁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의아한 시선으로 민윤기를 바라보았다. 내 행동과 시선에 민윤기도 걸음을 멈추고는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 왜 그렇게 생각해? " " 그거 누가봐도 그 사람이 너한테 작업거는거잖아. 번호따고 친구한다는 핑계로 친해지려고. " " ... " " 뭐야. 그냥 해본 소리였는데... 진짜야? " " 아...아니야! "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다급한 부정의 말이었다. " 아니야! 우린 그냥 친구야! " 손까지 저으며 강하게 부정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민윤기의 얼굴에는 황당함과 의아함이 섞여있었다. " 알았어. 뭘 그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해. " " 네가 먼저 어이없는걸 물어봤잖아. 아니니까 그러지. " " 진짜? " " 아니라고 호구야! 아, 나 먼저 간다. " 순식간에 얼굴로 쏠리는 열에 앞으로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민윤기에게서 멀어졌다. 한참을 빨리 걸어 민윤기가 저 멀리 멀어졌음을 느꼈을때야 다시 걸음을 늦추었다. 거짓말을 했다. 무의식적으로 터져나온 말이었지만 거짓말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김태형은 나를 좋아했고 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다른 누구도 아닌 민윤기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원인은 나도 모르겠다. 민윤기가 어색한 내 반응에도 눈치 못 챘으면 좋겠다. 그냥 앞으로도 민윤기가 몰랐으면 좋겠다. 민윤기와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들의 반응은 분명하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그렇게 오래 사귀더니 찾아 온 권태기에 결국 너네도 헤어지게 될줄 알았다는 반응과 너네가 어떻게 헤어질 수가 있냐는 자기들이 더 허탈해하고 슬퍼하는 반응. 나는 그 사이에서 얌전히 자리에 앉아 맥주를 들이마셨다. " 헤어진건 난데 니들이 왜 더 난리야. 아무튼! 이 언니는 이제 솔로로 돌아오셨다! " " 여러분, 이렇게 두 명의 솔로가 돌아옵니다! " " 그럼 민윤기는? 어? " " 그냥 예전처럼 친구로 돌아가기로 했어. " " 야, 남녀사이에 친구가 어딨냐? " " 맞아. 너네도 처음에는 친구였다가 결국 사귀게된거잖아. 그것도 그냥 친구냐. 짱친이었지. " " 왜 없어. 나 민윤기말고도 그런 친구 있거든? " " 에이, 그냥 순수한 친구관계라고? 그럴리가. " " 남녀도 정말 순수하게 친구가 될 수 있거든요. " " 아니야. 그런 친구관계는 분명히 한 쪽은 순수하지 않은 다른 마음이 있어. " " 아, 아니라니까! 난 김태형이랑...! " 태형이가 떠올랐다. 김태형이랑 정말 순수한 친구사이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김태형은 아니었다. 친구의 말처럼 김태형은 내게 다른 마음이 있었다. 김태형에게는 우리 사이가 순수한 친구관계가 아니다. 민윤기의 말대로 친해지기 위한 일종의 작업방식일수도 있다. 그 생각을 안했던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정말 김태형을 친구로 생각해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니라면서 바락바락 우기던 나도 점차 기가 죽어서 시무룩해졌다. 처음으로 어쩌면 정말 남녀사이에 순수한 친구관계는 불가능한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야야, 얘 기죽은거 봐. 그만해. " " 왜 이래. 으유, 알았어. 남녀도 친구 가능해. 매우 가능해! " " 맞아. 민윤기랑 너랑도 완전 친구관계 될 수 있어. 그니까 응? 그만 우울해하고! 마시자! " " 야! 나 안 간다고! " " 왜! 너 이제 신경쓰고 의식해야 할 남자친구도 없거든요? 그리고 클럽가면 다 나쁜거야? 그냥 가서 우리랑 춤추고 놀자고. " " 나 춤 못추는거 알잖아. " " 그럼 우리 옆에서 박수라도 치던지. 빨리 가자고. " 있는 힘껏 나를 끌어당기는 친구들의 힘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클럽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화려한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클럽 안에는 사람이 북적거렸다. 많은 사람들 탓에 한눈이라도 팔아서 친구들이 옆에서 떨어진다면 찾기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 키야- 오늘 물 좋다. " " 얼씨구. 살판 났네. " " 야, 나가자. 빨리! " 정말 구경만 하려다가 얼떨결에 무대 위까지 올라가게 된 나는 친구들의 춤을 보며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냥 정말 아무렇게나 추는구나. 오랜만에 온 클럽이라 정말 낯설어하고 있었는데 그 생각이 들자 나도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며 춤을 출 수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라는 마음이었다. 원래 음악과 춤을 좋아하지만 잘 추는 편은 아니기에 클럽에 갈 때면 민윤기 핑계를 대고 늘 빠져나왔지만 이제는 그렇게 댈 수 있는 핑계도 없었다. 그래도 뭐 막 나가는 기분으로 즐기니 간만에 느껴지는 일탈을 하는 기분이었다. " 야, 아주 물 만났네? 그니까 진작 같이 좀 오지. " 무아지경이라는 말은 지금의 나에게 쓰는 말임이 분명했다. 터져나오는 흥에 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때, 나에게 은근히 닿아오는 몸짓이 있었다. 처음에는 같이 온 친구인줄 알고 넘겼으나 그 몸짓은 내게 점점 더 자주, 가깝게 닿아왔다. 기분이 이상했던 나는 뒤를 돌아봤고, 내게 닿아오던 몸짓의 주인공은 친구가 아닌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 사실에 불쾌해진 나는 인상을 쓰고 남자에게 물었다. " 저기요. 뭐하세요? " " 네? 뭘요? " " 자꾸 닿으시잖아요. 하지마세요. " " 뭐라고요? 잘 안들려요? " " 자꾸 닿지 마시라고요! " " 네? " 끝까지 못 들은척 하는 뻔뻔한 태도에 머리끝까지 화가 차올랐지만 한번 꾹 참고 자리를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 남자가 자리에서 떠나려는 내 팔목을 잡아 끌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깜짝 놀라 팔을 빼려고 했지만 꽉 잡은 손힘에 팔을 빼기란 불가능했다. " 왜, 어디가요. " " 이거 놓으실래요? " " 나랑 나가서 놀래요? " " 아니요. 싫으니까 이거 좀 놓으세요. " " 에이, 내가 맛있는거 사줄게. 나가서 놀자. " 말이 안 통하는 듯 자기 얘기만 하는 남자의 모습에, 대화는 포기하고 내게 걸어오는 말을 모조리 무시한채 팔을 빼내기 위해 애썼다. " 몇 살이야? 대학생 같은데 1학년? 2학년? " " ... " " 내가 오빠지? " " ... " " 왜 안 나가는건데? 응? " " ... " " 남자친구 있어? "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미묘하게 바뀐 내 표정을 순식간에 재빠르게 캐치한 남자가 집요하게 계속 물어왔다. " 있어? 아니지? 남자친구 없지? " " ... " " 그럼 나랑 나가자. 나가서 놀자니까? " 있다고 해야 이 자식이 이 짓을 그만둘텐데. 그런데도 차마 있다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답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내 팔목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이 다른 손에 의해 내 팔목을 놓아버리고 다른 손이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 나가자. " 미쳐 누군지도 보지 못하고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잡혀 있어 아파오는 팔목을 빼내려고 애쓰고 있는데, 이윽고 남자의 언성이 높아지고 말다툼이 들렸다. " 당신 뭐야? 뭐하는 짓이야? " " 그러는 당신이야 말로 싫다는 사람한테 뭐하는 짓인데?" " 당신이 뭔데 참견이야? " " ... " " 그쪽이 이 여자 남자친구세요? " " ... " " 아니면, 꺼ㅈ... " " 맞아요. " " 뭐? " " 내가 이 여자 남자친구, 맞다고. " 시끄러운 그 안에서도 내 귀에 정확히 들린 전혀 예상치못하게 떨어진 대답에 곧바로 시선을 옮겨 그제야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타나 잡혀있던 내 팔목을 구해주고는 나가자며 내 팔목을 잡아 끌던 사람. 꼼짝 못하던 나 대신에 이 상황을 정리해주고 있는 사람. 그리고 지금은, 내 남자친구를 자청하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민윤기였다. " 그러니까 이 여자 건들이지마. " 바보같이 그 말 한마디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태꿍입니다! 어쩌죠... 이 분량... 이 전개.... 이 막장드라마 같은 흐름.... 저를 매우 치세요ㅠㅠㅠㅠㅠㅠ 이런 똥 같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늦은 점 죄송합니다ㅠㅠ 그리고 또 많이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요! 오늘도 댓글 하나가 큰 힘이 됩니당! 늘 사랑해주셔서 감사해요♡ [암호닉] 슈웁 / 석진센빠이 / 샘봄 / 루리 수대 / 윤기부인 / 부릉부릉 / MSG BBVI / 전정ㄱ국 / 전정국부인 / 충전기 밤열한시 / 슙 / 달달 / 초딩입맛 / 설날 꾸탱 (암호닉 신청은 계속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