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너를 만난다면 07
번쩍.분명 늘 왔던 곳이 맞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허전한데?언제나 눈을 뜨면 아름다운 꽃밭과 어울리는 환한 미소를 보여주며 날 기다리고 있어야 할 그 아이가, 없었다.해도 없는 곳이 어찌나 빛나는지 따스한 빛이 들어오는 꽃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얄밉게 느껴질 정도로 예쁜 꽃들뿐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데 여전히 나타나질 않았다. 여자아이는 초조한 마음에 입술만 자꾸 물어뜯었다. 해줄 얘기가 많은데. 하고 싶은 얘기도 많은데.그렇게 그날은 보고 싶었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눈앞에서 꽃밭은 사라졌다. ****새로운 꿈이 아닌데. 예전에 꾸었던 꿈이다. 딱 한번. 니가 없었던 날.그때 따라 자주 꿈에 나오길래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잠이 들었던 날. 눈앞에 보인 건 그 아이가 없는 허전하고 쓸데없이 넓은 꽃밭이었다.계속 기다렸다. 한 번도 끝을 본 적이 없는 곳이었는데 어디가 끝일까 잘못된 장소에 온건 아닌가 막 내달려도 보았고 자리에 주져앉아 하염없이 기다려도 보았다.몸은 자꾸 이제 가야 한다고 재촉해댔지만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그렇게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눈도 못 감고 계속 뜨고 있었는데. 결국 보지 못하고 꿈에서 깼었다.왜 갑자기. 그때 꿈을 다시 꿨는지 모르겠다. 어젯밤 꿈속 나는 내가 아니었다. 마치 드라마를 보듯 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처음 꽃밭이 눈에 보이고,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드디어 왔구나 들뜨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니가 정국이가 맞는지 드디어 물어볼 수 있구나 싶었는데.그게 아니었다. 다시 그곳에 간 게 아니라, 전에 꾸었던 꿈을 내게 다시 보여준 거였다. 왜, 왜 하필 그때 꿈일까. 기왕이면 즐거웠던 때를 보여주지.눈을 뜨고 몇 분간 침대에 누워 그대로 있었다. 이게 뭘까. 갑자기 왜. 요즘 들어 널 잊고 살았다고 지금 나 혼내는 거야? 얼른 학교에 가라는 엄마의 호통소리에 어렵게 몸을 일으켰지만 찝찝한 기분이 한켠에 자꾸 남았다. **"나 뭐 잘못했어요?""어?""왜 자꾸 빤히 쳐다봐" 꿈 때문인가. 의지도 아닌게 자꾸 정국이를 빤히 쳐다보았다.내내 이상하고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애써 별거 아니라고 잊으려 했는데 정국이 얼굴을 보자 다시 그런 기분이 올라왔다.하필이면 같은 얼굴일게 뭐야. 그냥 전에 꾸었던 똑같은 꿈을 꿨나 보다 넘겨버리고 싶었는데, 자꾸 신경이 쓰였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그런 날이 있다. 뭔가 나쁜 일이 생길 것 같고 불안한, 괜히 그런 날. 오늘이 그랬다.내 말에 정국이가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표정을 읽어내렸다.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이라니, 없다. 없지. 그냥 꿈처럼, 니가 갑자기 내 눈앞에 안 보이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이 들었다. '다신 못 볼 것 같아서' 불안했다. 오늘은 좀 더 불안했다. 정말 못 보게 되면 어쩌지.그날, 그리고 오늘. 그 아이가 없는 그 꽃밭에 혼자 서있는 기분은 정말이지, 좋지 않았다. 허무했고 슬펐고 허전했고 아쉬웠고 두려웠다.또 그렇게 되면, 혼자 남게 되면. 그때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정국아""응" 나지막이 부르는 내 목소리에 정국이는 바로 반응했다. "아니야...""왜 그러는데""아니야, 빨리 풀어!" 물어보기조차 겁이 나니. 정국이에 대한 내 감정이 꽤 깊어졌구나 싶었다.괜한 거겠지. 아무것도 아닌데 괜히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거겠지. 꾸역꾸역 다시 이상한 기분을 저편으로 넘겨 버렸다. 싱겁게 넘겨버리는 내 말에 흠- 미간을 찌푸렸지만 알았다며 샤프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문제집으로 시선을 내리는 정국이었다.며칠 전같이 강의 들은 이후로 공부에 더 집중하는 것 같은 건 느낌상일까. 딸랑- 카페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오자마자 카운터로 가더니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키곤 나오기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정국이에게서 시선을 치워 그 여자를 쳐다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쳐버렸다.어이쿠. 민망해서 얼른 정국이의 문제집으로 고개를 내렸다.또각또각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데 설마 나한테 오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처음 정국이를 봤던 날이 생각났다. 그날도 내가 빤히 쳐다봐서 정국이가 기분이 나쁘다고 내게 다가왔었다. "전정국 맞지?" 어떡하나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여자의 물음은 내가 아닌 정국이에게 꽂혔다. "와, 이게 얼마 만이야! 잘 지냈어?" 그 여자의 말에 풀던걸 멈추고 정국이가 고개를 들었다. "나 기억 안 난다고 하지 마라! 앉아도 되지? 아, 안녕하세요~""안녕.. 하세요" 넉살 좋게 내게 인사를 하며 우리 앞에 놓인 빈의자에 앉았다. 쭈볏거리며 인사를 받아준 뒤 표정이 어떤가 궁금해서 돌아본 정국이는 꽤나 반갑다는 얼굴을 보였다. "기억 나. 진짜 오랜만이다""이제 괜찮은 거야? 좋아 보이네~""그런 것 같아. 잘 지냈어?""그럼! 나야 항상 좋지~ 괜찮다니 다행이다~ 옆엔 여자친구분? 저 정국이 중학교 때 친구예요~""아.. 그러셨구나. 근데 저 여자친구,"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두 잔 나왔습니다" "어, 잠시만!" 캐리어에 담긴 두 잔의 아메리카노를 얼른 받아들고 와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자친구는 아닌데... 아직. "근데 넌 어떻게 연락 한번 안 하냐! 내가 얼마나 도와줬는데""이제 할게. 이제 해도 될 거 같아""오~ 진짜 괜찮아졌나 보네~ 여자친구도 만들고 우리 정국이 다 컸네!""또 누나인척한다""진짜 다행이다~ 아, 오빠 기다리겠다! 나 갈게. 너, 꼭 연락해라!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 여자는 창밖으로 일행의 것으로 보이는 차를 보고는 나와 정국이에게 인사를 하고 얼굴에 미소를 유지한 채 카페를 나갔다.그 여자가 차에 탈 때까지 정국이는 시선을 고정한 채 입꼬리를 올렸다. 꽤 친했었나 보네.차가 떠나는 걸 확인하고 정국이는 다시 고개를 내려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설명 안 해주나. 이것도 비밀인 건가. "설명 안 해줘?""응?" 뭐가? 하며 고개를 들어 날 보다가 아! 하며 정국이가 입을 열었다. "내 짝꿍이었는데, 날 많이 도와줬어요. 내가 자주, 아... 그냥. 그랬다구" 응? 그게 끝인 거야?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얘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정국이는 아차 하며 도로 입을 닫아버렸다. "니가 자주 뭐""아니야" 입이 쭉 나왔다. 나 오늘 기분도 안 좋은데. 또 숨긴다. 얌전히 참고 있었는데 슬슬 한계가 오는 걸 느꼈다. 마치 보호막을 딱 깨버린 것처럼 궁금증과 호기심이 마구 튀어나왔다.나는 모르고 있는 걸 저 여자는 알고 있는 것 같았고 그게 자존심 상하고 서운해서 였기도 했다. 자꾸 괜찮아졌냐고 물어보는데 뭐가 괜찮은 건지 걱정도 되었고.질투라면 질투라고 할 수도 있었다. 꽤 착해 보이고 상냥해서 질투를 느끼는 내가 한심했지만 그걸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쟤는 되고 난 왜 안돼? 가 질투 말고 또 있을까. 방금까지도 정국이를 못 보게 될까 봐 겁이 났으면서. 근데 나도 계속 옆에 있으면 되지. 어떤 이유에서건 내가 옆에 있으면 되잖아. 오늘 난 꼭 정국이의 얘기를 들어야겠다. **어디다 뒀는지 제일 좋아하는 피어싱을 잃어버려서 만나자마자 사러 가자고 했던 피어싱을 사기 위해 정국이와 자리를 옮겼다.오는 내내 말해달라고 징징거려도 말을 돌리며 다른 얘기를 할 뿐 해주지 않았고 그래서 난 단단히 삐진 상황이었다. "아직이야?""뭐가""충분히 만나는 거, 아직이야?""....""언제 말해줄 건데? 나는 뭐 보살이냐!""....""사람이 기다리는 데도 한계가 있지!""....""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야!""....""니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계속 너랑 볼 거니까 이제 말 좀 해주지?" 그 여자는 알고 있는데 난 왜 안 알려주냐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꾹꾹 눌렀다. 툴툴거리는 내 말에도 눈만 꿈뻑거리며 아까부터 만지작거리던 피어싱을 들어 내 귓볼에 대며 말했다. "이게 제일 낫다. 이거 사요" 아니 내가... 지금 말한 건 어디로 들은 거야! 내 말은 무시하고 그 피어싱을 가져가 계산대에 놓고 계산을 하더니 예쁘게 포장된 걸 들고 와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내 눈앞에 흔들었다. "선물""야!!" 목청을 높이니까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내 손을 잡아올려 포장해온 피어싱을 쥐여주었다. "알았어요. 소리 지르지 마. 배고프다. 뭐 먹을까?" **식당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내 표정을 풀어지지 않고 뚱한 채 그대로였다. "얼른 먹어요. 배고플 텐데. 자, 아-"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붙이고 입만 쭉 내밀고 있으니까 앞에 놓인 파스타를 포크에 돌돌 말아 내게 가져다 댔다. 안 먹어, 나쁜 놈아! "말해준다니까. 진짜 안 먹을 거예요? 내가 다 먹는다?" 다시 자기 입으로 가져가 먹는 시늉을 하면서 내게 물었다. 나도 배고파! 배고프다고!! 이씨자존심 때문에 참으려 했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입술을 한번 꾹 물고 다시 내 입으로 가져온 전정국의 포크를 입에다 집어넣었다.니가 말해준다고 했으니까 먹는 거야! 내가 이긴 거다.입에 파스타를 넣고 오물거리는 내 모습을 보면서 만족스럽다는 듯 전정국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지마! 왜 웃어, 흥 "아까 내가 산거 마음에 들긴 했어요?""뭐, 피어싱?""응""안 들어. 그게 뭐냐? 촌스럽게, 흥" 배가 고파서 본격 식사를 시작해 얼른 파스타를 흡입하며 대답했다. 실은 마음에 들었는데 속 좀 상해보라고 일부러 더 그랬다. "그럼 줘. 바꿔오게" 내 앞으로 손을 내밀면서 달라고 하는 모습에 당황해서 먹던걸 멈추고 눈을 크게 떠서 쳐다봤다. 아니 그런 반응 말고... 좀 실망하거나... 기분 나빠하면 안 되는 거야..? 무슨 포기가 저렇게 빨라? "돼..됐어! 어차피 거기 이쁜 거 없었어! 바꿀 것도 없더만, 큼..." 적지 않게 당황한 내 모습이 보였는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밀었던 손을 다시 가져갔다. 본전도 못 찾았네. ****맛있게 밥을 먹고 전정국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집 앞까지 왔다. 자기가 말해준다고 했으니까 얌전히 입을 다물고 기다리면서.언제쯤 말할까 집 앞에 도착했는데도 들어가지는 않고 꿋꿋이 자기 앞에 서있으니까 뭐냐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알겠는지 파하-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다구. 이제 말하면 돼요?""빨랑 말해. 궁금해서 돌아가시겠다!""말해도 계속 나 본다고 누나가 말했다?""알았어! 나 못 믿어?""믿어. 음...""자..잠깐만!! 나 심호흡 좀!" 하루 종일 말해달라고 징징거렸고 오늘은 꼭 듣겠다고 각오를 했건만 막상 들으려니 심장이 마구 뛰어댔다.그제서야 아까 걱정했던 게 올라왔다. 물론 무슨 말을 들어도 정국이를 볼 거지만, 그래도 겁이 나는 건 사실이었다.게다가 하필 그런 꿈을 꾸는 바람에 두려움이 배로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들어야 할 거. 계속 이렇게 불안해하며 지내는 것도 이제 할 만큼 했다.내가 안 떠나면, 계속 정국이 옆에 있으면 되는 거다. 정국이를 잡고 후-후-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는데 날 보며 살풋 웃으며 정국이가 말을 이었다. "다 쉬었어요?""후... 어! 말해!""뭐부터 말을 해야 하나" 고개를 들어 눈을 굴리면서 생각을 하는지 미간을 좁혔다. "뭐가 제일 궁금하냐면... 왜, 기억이 없는지" 힌트를 주기 위해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이제부터 좀 무거워질까 싶어 방금까지와 달리 말이 조심스럽게 나갔다.내 말에 정국이는 들고 있던 고개를 내려 시선을 나와 마주하며 약간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사고가, 있었어요. 머리를 다쳤고. 4살 때였는데. 그렇게 심한 사고도 아니었는데 내가 너무 어렸는지 그때부터 기억이 자꾸 끊겨" 심각한 얘기가 분명했는데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에 안도하기는커녕 걱정스런 마음이 더 올라왔다.병원에 갔을 때 살짝 짐작은 했었지. 사고 때문이었구나. 근데 기억이 자꾸 끊긴다니. 사고란 말에 입술을 물었고 자꾸 끊긴다는 말에 무슨 뜻인지 몰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실은 나, 언제 또 기억을 잃어버릴지 몰라요. 어느 날 갑자기, 누나 보고 누구냐고... 그렇게 말할지도 몰라" 말을 이어가는 담담했던 정국이의 눈빛이 슬프게 빛났다.분명 아까, 그 여자의 괜찮아졌냐는 말에 그런 것 같다고 했는데. 근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괜찮아진 것 같다고 했잖아... 아까""요즘은 그랬지. 신기한 거 말해줄까요? 자주 그랬는데, 어렸을 때는 자주 그렇게 기억을 못했는데. 4년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그러고는 지금까지 멀쩡해. 신기하죠?"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이 슬픈 게 마음이 좋지 않았다. 확실히 나았다고, 이제 안 그럴 거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자꾸 잊어버리니까. 언제 또 잊어버릴지 모르니까""....""사람 만나기가 무서웠어""....""그래서 학교도 때려치고 집에서만 썩어있고 그랬는데""...." "누나는, 왜 자꾸 나한테 들어와. 왜 자꾸 보고 싶어""....""그러니까 자꾸 거짓말하고 싶잖아요. 이제 안 그럴 거라고. 다 나은 거라고""....""근데 아니야. 나 언제 또 기억이 없어질지 모르거든요""....""그럼 누나가 상처받잖아""...." 한마디도 뭐라고 대꾸를 못하겠는데 속에서 울컥하는 게 더 올라왔다. "누나는 잃기 싫은데, 기억하고 싶은데""....""겁이 나" ****집 밖을 자주 나가는 편이 아니었다. 그저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아무 소리도 안 들릴 정도로 크기를 키워 노래를 듣는 것, 그게 대부분의 내 일상이었다.아님 텔레비젼을 켜서 아줌마처럼 그 앞에 앉아 과자를 씹어먹으며 속으로 악역들을 욕하거나. 그래서 그런지 방영하는 웬만한 드라마는 다 본 것 같다. 그게 내겐 세상을 살아가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대신 살아가고 있었다.그런 내 모습을 보시고 이제 나갈 때도 됐다고 남들처럼 학교도 다니고 친구들과 놀러도 다니고 사람처럼 좀 살라고. 엄마는 항상 핀잔을 주셨다. 하루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서 하는 것도 없이 손가락을 딱딱거리며 시간이 얼른 가버리길 기다리고 있는데 내 옆에 가만히 와서 앉으셨다.바람만 쐬다 와도 뭐라고 안 할 테니까 한 번만 나갔다 오라고. 정 그러면 지금 내가 커피를 마시고 싶으니까 심부름인 셈 치고 카페에 가서 점원이랑이라도 한 번만 말해보고 오라고. 니 나이 또래 애들은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구경도 하고.잔소리처럼 장난처럼 넘기셨던 분이셨는데 그날따라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을 이어가시는 바람에 차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항상 죄송했으니까. 하나뿐인 아들이 이렇게 살아서 죄송해요. 4년쯤. 이만큼 지났으면 이제 다 나았나 싶기도 했다. 병원에서도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런데도 밖에 나와 사람들과 마주하는 것을 꺼리는 이유는. 나와,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 모두를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카페에 가는 걸 좋아하는 듯싶었다. 집에서 나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여기도 카페, 저기도 카페. 하긴 드라마에서도 항상 카페는 필수로 등장했다.고민할 것도 없이 가장 가까운 카페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알바생은 상냥한 목소리로 날 반겼고, 거의 처음이지?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서 아무 자리로 가서 엉덩이를 붙였다.주문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걸 들고 가야 엄마가 좋아하실지. 하긴 내가 뭘 사 가든 엄마는 좋아하시겠지만.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카운터로 가서 내가 원하는 걸 말하고 돈을 주면 되는데 그게 내겐 참 힘이 들었다. 어색했다. 민망하고 두근거리는 가슴 때문에 한숨을 쉬며 카페를 둘러보고 있는데 날 보고 있었던 것 같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눈이 마주치고도 피하지 않고 날 보길래 내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왜 쳐다보는 거지.시선을 돌렸는데도 느낌이, 그냥 느낌이 그 여자가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힐끔힐끔 쳐다본 그 여자는 정말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못 볼 거라도 본 듯 입을 살짝 벌리고 눈도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쳐다보는데 참고 있자니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대체 저 여잔 뭐지.눈싸움이라도 하듯 나도 같이 대놓고 쳐다보고 있는데, 그 여자 또한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피할 생각이라곤 하나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잘 됐다. 커피는 집어치우고 저 여자랑 몇 마디 하다가 다시 들어가야지. 그래서 몸을 일으켰고, 그토록 꺼려하던 다른 사람과의 인연을 그렇게 시작해 버렸다. **** "우리 어디서 본 적 없어요?" 말을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뭐냐며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하고 여전히 표정은 멍한 채 나를 쳐다보길래 어디 아픈 사람인가 싶어서 자리를 뜨려는데 날 붙잡더니 저렇게 물어봤다.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어디서 본 적 없냐고, 나 기억 안 나냐고. 지난 십몇 년간 수도 없이 들었던 말. 내가 또 기억을 못하는 사람인가. 그래서 쳐다봤구나. "나, 알아요?" 이럴까 봐, 더 이상 이런 소리 듣기 싫어서. 누가 말이라도 걸어오면 얼른 자리를 피하기 바빴는데. 기억을 못 해서 미안하다는 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기분이 나빠서 이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아... 그..."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여자는 당황하는 표정을 짓더니 눈만 데굴데굴 굴릴 뿐 대답을 하지 못 했다. 다행과 실망.순간 머릿속에 틀어진 장면은 어느 드라마에서 봤던, 뻔한 수작. 예전에도 혼자 가만히 있으면 수줍은 얼굴을 한 여자들이 다가와서 내 번호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거네.단지 이 여잔 내 얼굴을 보고 자기 마음에 들어서 쳐다봤던 것뿐이구나. "그 쪽이 날 열렬히 사랑하게 될 줄 누가 알아?" 몸을 돌려 그냥 나가버리려 하는데 당돌하게 나오는 그 여자의 행동에 흥미가 생겼다.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너무 심심하게 살았구나 싶었다.벌써 4년이나 지났으니까, 그동안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니까. 이젠 괜찮겠지. 그냥 조금만, 이 여자에게 흥미가 떨어질 때까지만. 그 여자에게 번호를 주는 대신 내가 번호를 받아왔고 하루 종일 그 여자가 생각났다.당장이라도 연락을 해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해가 저물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안달 나지 않은 척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하다 보니 느껴지는 것 두 가지가 있었다.하나는 이 여자가 나에게 정말 관심이 있어서 내 번호를 따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것과. 또 하나는 저 여자와 내가 만난 적이 있다는 것.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게 맞았다. 내게 계속 자신을 기억하라고 때려댔다. 정말 기억해주고 싶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저 여자와 난 어땠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 머릿속에 이 여자와 관련된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그래서 한 번 더 보려고. 그럼 생각날지도 모르니까. 생각이 나지 않더라도 그 표정을, 당황하던 게 얼굴에 곧장 드러나 웃음이 터졌던 그 표정을 다시 보고 싶었다. ****얼마나 내가 사람을 고파했는지. 얼마나 사람 냄새가 그리웠는지. 새삼 느껴지는 때였다. 매일을 누나와 함께 하기 위해 불러냈다. 그 얼굴이 앞에 없을 때면 핸드폰을 손에서 놓질 못했고 언제든 모든 신경이 핸드폰으로 쏠려있었다.그렇게 불러대고 귀찮게 굴어도 착한 사람인지, 아님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지 누나는 항상 나에게 맞춰주었다. 마침 누나와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었고 꼭 누나와 함께 가고 싶었다. 그리고 듣고 싶었다. 말끔하게 나았다고 이제 절대 기억을 잃어버릴 일은 없을 거라고.누나를 데리러 누나네 학교에 갔는데 대학교는 이런 곳이구나, 신기했다. 마지막으로 학교를 간지가 언제였는지도 흐릿하게 생각났다. 픽-픽- 무슨 특별한 것도 없이 뻑하면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그러고 일어나면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이 기억나질 않았다.웃기는 건 쓰러지긴 전 그렇게 궁금해하던 일들은 생각이 나고 그 사이의 일은 잊어버리고 그게 계속 반복이었다. 4살 때 사고를 당하고, 처음 6살 때 쓰러져 깨어나 보니 머리는 4살이었는데 몸은 6살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몇 년이 걸렸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는 그런 증상이, 금방 금방 튀어나왔다.딱히 정해진 주기도 없었고 정해진 행동도 없었다. 정말 그냥. 아무런 예고 없이 툭툭 그랬다.물론 학교 공부도 할 수 없었다. 시험도 볼 수 없었고 친구들과 같이 했던 것들이 기억나질 않으니 학교에 나가기도 싫었다. 내게 돌아오는 말은 항상 '기억 안 나?'. 고등학교는 아예 진학하지도 않고 그렇게 집에 처박혀 살았지. 사람과의 인연을 끊은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구경한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누나를 데리고 간 항상 가는 병원. 몇 년째 보던 똑같은 의사 선생님. 그날도 밝은 표정으로 날 반겨주셨고 검사 결과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별문제 될게 보이지 않는다고. 그래도 조심하라고.머릿속에 '조심해.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라 언제 또 널 괴롭힐지 어떻게 알겠냐.' 그 말만 맴돌았다. 분명 좋은 얘기도 있었는데.결과를 듣고 나오니 발을 동동 거리며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누나 모습에 입이 저절로 올라갔다. 볼 때마다 흥미가 시들시들해지기는커녕 자꾸 좋아지니.사람과의 만남이 줄어들고 내가 받을 상처, 그 사람이 받을 상처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만든 추억이 없으니 기억할 것도 기억하고 싶은 일들도 없었으니까. 기억이 사라질 뿐 몸이 아프다거나 하는 것도 없었고.근데 요즘은, 자꾸 겁이 난다. 다시 또 기억을 잃어버리면, 누나를 잊버리면 어떡하지. 누나에게 상처를 주면 어떡하지.이기적이게도 난 후에 일은 미뤄두고 자꾸 누나 앞에 나타나고 싶었다. 조금만 더, 며칠만 더. **"실은 나 궁금한 거 무지 많은데" 나에 대해서 물어보는 누나에게 사고에 대해서, 내 증상에 대해서 쉽게 말할 수가 없었다. 떠나버릴까 봐. 다시 그 얼굴을 볼 수 없게 될까 봐.왜 내게 우리가 어디서 본 적이 없냐고 했었는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누나인데. 사실 누나와 내가 아는 사이였을지도 모른다고 단정 지은 것도 내 멋대로였는데.누나 입에서 어쩌다 한번 본 적 있을 뿐이다, 실은 나 같은 애 모른다는 말이 나오면 더 이상 누나를 불러낼 핑계가 없어지잖아. 꽤 높은 목소리로 약간은 화를 내듯 털어놓는 누나에게 한마디도 해줄 수가 없었다.누나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질 때까지만 누나에 대한 흥미가 식을 때까지만 옆에 있다가 얼른 사라지면 그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더 큰 상처 주기 전에 누나에게 나에 대한 정 같은 감정 따위 생기기 전에 얼른 사라지면, 그전까지 누나를 잊지만 않으면 된다고. 누나에게 뒷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늘 누나가 들어가는 걸 보고 발걸음에 떼었는데 그날은 계속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집에 돌아와 핸드폰을 쳐다보며 미안했다고 그렇게 먼저 가버려서 미안했다고 하고 싶었는데, 그것보다 더 미안한 것들이 많아서 잘자란 한 마디 밖에 보내지 못 했다. ****그렇게 한 달이 훨씬 더 지났고 내 감정은 깊어질 뿐이었다. 누나랑 있으면 마냥 좋았고 자꾸자꾸 보고 싶었다.그날따라 누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게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말끝을 자꾸 흐렸다. "니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계속 너랑 볼 거니까 이제 말 좀 해주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내가 자꾸 기억을 잃어도, 누나를 잊어버릴지 몰라도 그래도 내 옆에 있어주겠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잠깐의 호기심이겠거니. 가벼운 감정이겠거니. 그게 식으면 떠나버리면 되니까. 누나나 내가 상처받기 전에 떠나면 되니까. 라고 생각했다. 근데 자꾸 좋아지니까. 누나가 점점 더 좋아지니까. 떠나기 싫어지니까.누나를 잃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인 거 아는데.상처 줄 거라는 거 아는데. 누나를 좋아하게 되었나 봐. 엄청 늦게 왔죠!!!!! 반성할게요......ㅠㅠㅠㅠㅠㅠ실은 금요일에 올리려고 했는데 다음날이 콘서트이다 보니까 독자님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설레고 싱숭생숭해서 글이고 뭐고 읽히지도 않을것 같아서 콘서트가 다 끝나고! 딱!! 지금 올립니다!!다들 콘서트는 잘 즐기셨나요~~ 못 가신 분들은 집에서라도 그 분위기를 느끼셨길 바랍니다ㅠㅠ가만히 즐기기만 했는데도 이렇게 힘든데 방탄이들은 얼마나 힘들지ㅠㅠㅠ 열심히 준비한만큼 후회없었으면 좋겠고 우린 좋았으니까!! 그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네요!!어후... 몸이 천근만근이네요... 푹자야겠어요ㅠㅠㅠㅠㅠ 그나저나 꾹이 울때 같이 운건 비밀..... 자꾸 더 좋아져서 어쩌죠?ㅠㅠㅠㅠㅠ 수고했어!!!! 방탄이 최고다!!!! 이번은 음... 수정도 참 많이 했어요 헤헤아무래도 정국이 시점이랑 여주 시점이랑 겹치다 보니까 따로 생각해야 해서... 머리가 나쁜 저로서는 정리하기나 나름 힘들었네요ㅠㅠ솔직히 이것도 제대로 잘 나타났는지 모르겠어요ㅠㅠ 저마저도 혼란스러우니... 혹시 이해가 안되시는 부분이 있다면 살짜쿵 얘기해주세요! 제가 언능 달려가겠습니다!!늦게온만큼 분량은 많이 가져왔다고 생각하는데...하하 맞죠? 암호닉~~~!!♥민슈가님, 김남준님, 설남님, 런치란다님, 권지용님, 베베님, 알라님, 수슙님, 다이님, 얌냠님, 부릉부릉님, 꾹이님!! 감사합니다~~
번쩍.분명 늘 왔던 곳이 맞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허전한데?언제나 눈을 뜨면 아름다운 꽃밭과 어울리는 환한 미소를 보여주며 날 기다리고 있어야 할 그 아이가, 없었다.해도 없는 곳이 어찌나 빛나는지 따스한 빛이 들어오는 꽃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얄밉게 느껴질 정도로 예쁜 꽃들뿐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데 여전히 나타나질 않았다. 여자아이는 초조한 마음에 입술만 자꾸 물어뜯었다. 해줄 얘기가 많은데. 하고 싶은 얘기도 많은데.그렇게 그날은 보고 싶었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눈앞에서 꽃밭은 사라졌다.
****
새로운 꿈이 아닌데. 예전에 꾸었던 꿈이다. 딱 한번. 니가 없었던 날.그때 따라 자주 꿈에 나오길래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잠이 들었던 날. 눈앞에 보인 건 그 아이가 없는 허전하고 쓸데없이 넓은 꽃밭이었다.계속 기다렸다. 한 번도 끝을 본 적이 없는 곳이었는데 어디가 끝일까 잘못된 장소에 온건 아닌가 막 내달려도 보았고 자리에 주져앉아 하염없이 기다려도 보았다.몸은 자꾸 이제 가야 한다고 재촉해댔지만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그렇게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눈도 못 감고 계속 뜨고 있었는데. 결국 보지 못하고 꿈에서 깼었다.왜 갑자기. 그때 꿈을 다시 꿨는지 모르겠다. 어젯밤 꿈속 나는 내가 아니었다. 마치 드라마를 보듯 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처음 꽃밭이 눈에 보이고,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드디어 왔구나 들뜨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니가 정국이가 맞는지 드디어 물어볼 수 있구나 싶었는데.그게 아니었다. 다시 그곳에 간 게 아니라, 전에 꾸었던 꿈을 내게 다시 보여준 거였다. 왜, 왜 하필 그때 꿈일까. 기왕이면 즐거웠던 때를 보여주지.눈을 뜨고 몇 분간 침대에 누워 그대로 있었다. 이게 뭘까. 갑자기 왜. 요즘 들어 널 잊고 살았다고 지금 나 혼내는 거야?
얼른 학교에 가라는 엄마의 호통소리에 어렵게 몸을 일으켰지만 찝찝한 기분이 한켠에 자꾸 남았다.
**
"나 뭐 잘못했어요?"
"어?"
"왜 자꾸 빤히 쳐다봐"
꿈 때문인가. 의지도 아닌게 자꾸 정국이를 빤히 쳐다보았다.내내 이상하고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애써 별거 아니라고 잊으려 했는데 정국이 얼굴을 보자 다시 그런 기분이 올라왔다.하필이면 같은 얼굴일게 뭐야. 그냥 전에 꾸었던 똑같은 꿈을 꿨나 보다 넘겨버리고 싶었는데, 자꾸 신경이 쓰였다.
"아니야, 아무것도"
"...."
그냥 그런 날이 있다. 뭔가 나쁜 일이 생길 것 같고 불안한, 괜히 그런 날. 오늘이 그랬다.내 말에 정국이가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표정을 읽어내렸다.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이라니, 없다. 없지. 그냥 꿈처럼, 니가 갑자기 내 눈앞에 안 보이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이 들었다.
'다신 못 볼 것 같아서'
불안했다. 오늘은 좀 더 불안했다. 정말 못 보게 되면 어쩌지.그날, 그리고 오늘. 그 아이가 없는 그 꽃밭에 혼자 서있는 기분은 정말이지, 좋지 않았다. 허무했고 슬펐고 허전했고 아쉬웠고 두려웠다.또 그렇게 되면, 혼자 남게 되면. 그때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정국아"
"응"
나지막이 부르는 내 목소리에 정국이는 바로 반응했다.
"아니야..."
"왜 그러는데"
"아니야, 빨리 풀어!"
물어보기조차 겁이 나니. 정국이에 대한 내 감정이 꽤 깊어졌구나 싶었다.괜한 거겠지. 아무것도 아닌데 괜히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거겠지. 꾸역꾸역 다시 이상한 기분을 저편으로 넘겨 버렸다.
싱겁게 넘겨버리는 내 말에 흠- 미간을 찌푸렸지만 알았다며 샤프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문제집으로 시선을 내리는 정국이었다.며칠 전같이 강의 들은 이후로 공부에 더 집중하는 것 같은 건 느낌상일까.
딸랑- 카페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오자마자 카운터로 가더니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키곤 나오기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정국이에게서 시선을 치워 그 여자를 쳐다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쳐버렸다.어이쿠. 민망해서 얼른 정국이의 문제집으로 고개를 내렸다.또각또각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데 설마 나한테 오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처음 정국이를 봤던 날이 생각났다. 그날도 내가 빤히 쳐다봐서 정국이가 기분이 나쁘다고 내게 다가왔었다.
"전정국 맞지?"
어떡하나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여자의 물음은 내가 아닌 정국이에게 꽂혔다.
"와, 이게 얼마 만이야! 잘 지냈어?"
그 여자의 말에 풀던걸 멈추고 정국이가 고개를 들었다.
"나 기억 안 난다고 하지 마라! 앉아도 되지? 아, 안녕하세요~"
"안녕.. 하세요"
넉살 좋게 내게 인사를 하며 우리 앞에 놓인 빈의자에 앉았다. 쭈볏거리며 인사를 받아준 뒤 표정이 어떤가 궁금해서 돌아본 정국이는 꽤나 반갑다는 얼굴을 보였다.
"기억 나. 진짜 오랜만이다"
"이제 괜찮은 거야? 좋아 보이네~"
"그런 것 같아. 잘 지냈어?"
"그럼! 나야 항상 좋지~ 괜찮다니 다행이다~ 옆엔 여자친구분? 저 정국이 중학교 때 친구예요~"
"아.. 그러셨구나. 근데 저 여자친구,"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두 잔 나왔습니다"
"어, 잠시만!"
캐리어에 담긴 두 잔의 아메리카노를 얼른 받아들고 와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자친구는 아닌데... 아직.
"근데 넌 어떻게 연락 한번 안 하냐! 내가 얼마나 도와줬는데"
"이제 할게. 이제 해도 될 거 같아"
"오~ 진짜 괜찮아졌나 보네~ 여자친구도 만들고 우리 정국이 다 컸네!"
"또 누나인척한다"
"진짜 다행이다~ 아, 오빠 기다리겠다! 나 갈게. 너, 꼭 연락해라!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 여자는 창밖으로 일행의 것으로 보이는 차를 보고는 나와 정국이에게 인사를 하고 얼굴에 미소를 유지한 채 카페를 나갔다.그 여자가 차에 탈 때까지 정국이는 시선을 고정한 채 입꼬리를 올렸다. 꽤 친했었나 보네.차가 떠나는 걸 확인하고 정국이는 다시 고개를 내려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설명 안 해주나. 이것도 비밀인 건가.
"설명 안 해줘?"
"응?"
뭐가? 하며 고개를 들어 날 보다가 아! 하며 정국이가 입을 열었다.
"내 짝꿍이었는데, 날 많이 도와줬어요. 내가 자주, 아... 그냥. 그랬다구"
응? 그게 끝인 거야?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얘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정국이는 아차 하며 도로 입을 닫아버렸다.
"니가 자주 뭐"
"아니야"
입이 쭉 나왔다. 나 오늘 기분도 안 좋은데. 또 숨긴다. 얌전히 참고 있었는데 슬슬 한계가 오는 걸 느꼈다. 마치 보호막을 딱 깨버린 것처럼 궁금증과 호기심이 마구 튀어나왔다.나는 모르고 있는 걸 저 여자는 알고 있는 것 같았고 그게 자존심 상하고 서운해서 였기도 했다. 자꾸 괜찮아졌냐고 물어보는데 뭐가 괜찮은 건지 걱정도 되었고.질투라면 질투라고 할 수도 있었다. 꽤 착해 보이고 상냥해서 질투를 느끼는 내가 한심했지만 그걸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쟤는 되고 난 왜 안돼? 가 질투 말고 또 있을까.
방금까지도 정국이를 못 보게 될까 봐 겁이 났으면서. 근데 나도 계속 옆에 있으면 되지. 어떤 이유에서건 내가 옆에 있으면 되잖아.
오늘 난 꼭 정국이의 얘기를 들어야겠다.
어디다 뒀는지 제일 좋아하는 피어싱을 잃어버려서 만나자마자 사러 가자고 했던 피어싱을 사기 위해 정국이와 자리를 옮겼다.오는 내내 말해달라고 징징거려도 말을 돌리며 다른 얘기를 할 뿐 해주지 않았고 그래서 난 단단히 삐진 상황이었다.
"아직이야?"
"뭐가"
"충분히 만나는 거, 아직이야?"
"언제 말해줄 건데? 나는 뭐 보살이냐!"
"사람이 기다리는 데도 한계가 있지!"
"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야!"
"니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계속 너랑 볼 거니까 이제 말 좀 해주지?"
그 여자는 알고 있는데 난 왜 안 알려주냐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꾹꾹 눌렀다. 툴툴거리는 내 말에도 눈만 꿈뻑거리며 아까부터 만지작거리던 피어싱을 들어 내 귓볼에 대며 말했다.
"이게 제일 낫다. 이거 사요"
아니 내가... 지금 말한 건 어디로 들은 거야! 내 말은 무시하고 그 피어싱을 가져가 계산대에 놓고 계산을 하더니 예쁘게 포장된 걸 들고 와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내 눈앞에 흔들었다.
"선물"
"야!!"
목청을 높이니까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내 손을 잡아올려 포장해온 피어싱을 쥐여주었다.
"알았어요. 소리 지르지 마. 배고프다. 뭐 먹을까?"
식당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내 표정을 풀어지지 않고 뚱한 채 그대로였다.
"얼른 먹어요. 배고플 텐데. 자, 아-"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붙이고 입만 쭉 내밀고 있으니까 앞에 놓인 파스타를 포크에 돌돌 말아 내게 가져다 댔다. 안 먹어, 나쁜 놈아!
"말해준다니까. 진짜 안 먹을 거예요? 내가 다 먹는다?"
다시 자기 입으로 가져가 먹는 시늉을 하면서 내게 물었다. 나도 배고파! 배고프다고!! 이씨자존심 때문에 참으려 했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입술을 한번 꾹 물고 다시 내 입으로 가져온 전정국의 포크를 입에다 집어넣었다.니가 말해준다고 했으니까 먹는 거야! 내가 이긴 거다.입에 파스타를 넣고 오물거리는 내 모습을 보면서 만족스럽다는 듯 전정국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지마! 왜 웃어, 흥
"아까 내가 산거 마음에 들긴 했어요?"
"뭐, 피어싱?"
"안 들어. 그게 뭐냐? 촌스럽게, 흥"
배가 고파서 본격 식사를 시작해 얼른 파스타를 흡입하며 대답했다. 실은 마음에 들었는데 속 좀 상해보라고 일부러 더 그랬다.
"그럼 줘. 바꿔오게"
내 앞으로 손을 내밀면서 달라고 하는 모습에 당황해서 먹던걸 멈추고 눈을 크게 떠서 쳐다봤다. 아니 그런 반응 말고... 좀 실망하거나... 기분 나빠하면 안 되는 거야..? 무슨 포기가 저렇게 빨라?
"돼..됐어! 어차피 거기 이쁜 거 없었어! 바꿀 것도 없더만, 큼..."
적지 않게 당황한 내 모습이 보였는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밀었던 손을 다시 가져갔다. 본전도 못 찾았네.
맛있게 밥을 먹고 전정국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집 앞까지 왔다. 자기가 말해준다고 했으니까 얌전히 입을 다물고 기다리면서.언제쯤 말할까 집 앞에 도착했는데도 들어가지는 않고 꿋꿋이 자기 앞에 서있으니까 뭐냐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알겠는지 파하-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다구. 이제 말하면 돼요?"
"빨랑 말해. 궁금해서 돌아가시겠다!"
"말해도 계속 나 본다고 누나가 말했다?"
"알았어! 나 못 믿어?"
"믿어. 음..."
"자..잠깐만!! 나 심호흡 좀!"
하루 종일 말해달라고 징징거렸고 오늘은 꼭 듣겠다고 각오를 했건만 막상 들으려니 심장이 마구 뛰어댔다.그제서야 아까 걱정했던 게 올라왔다. 물론 무슨 말을 들어도 정국이를 볼 거지만, 그래도 겁이 나는 건 사실이었다.게다가 하필 그런 꿈을 꾸는 바람에 두려움이 배로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들어야 할 거. 계속 이렇게 불안해하며 지내는 것도 이제 할 만큼 했다.내가 안 떠나면, 계속 정국이 옆에 있으면 되는 거다.
정국이를 잡고 후-후-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는데 날 보며 살풋 웃으며 정국이가 말을 이었다.
"다 쉬었어요?"
"후... 어! 말해!"
"뭐부터 말을 해야 하나"
고개를 들어 눈을 굴리면서 생각을 하는지 미간을 좁혔다.
"뭐가 제일 궁금하냐면... 왜, 기억이 없는지"
힌트를 주기 위해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이제부터 좀 무거워질까 싶어 방금까지와 달리 말이 조심스럽게 나갔다.내 말에 정국이는 들고 있던 고개를 내려 시선을 나와 마주하며 약간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사고가, 있었어요. 머리를 다쳤고. 4살 때였는데. 그렇게 심한 사고도 아니었는데 내가 너무 어렸는지 그때부터 기억이 자꾸 끊겨"
심각한 얘기가 분명했는데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에 안도하기는커녕 걱정스런 마음이 더 올라왔다.병원에 갔을 때 살짝 짐작은 했었지. 사고 때문이었구나. 근데 기억이 자꾸 끊긴다니. 사고란 말에 입술을 물었고 자꾸 끊긴다는 말에 무슨 뜻인지 몰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실은 나, 언제 또 기억을 잃어버릴지 몰라요. 어느 날 갑자기, 누나 보고 누구냐고... 그렇게 말할지도 몰라"
말을 이어가는 담담했던 정국이의 눈빛이 슬프게 빛났다.분명 아까, 그 여자의 괜찮아졌냐는 말에 그런 것 같다고 했는데. 근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괜찮아진 것 같다고 했잖아... 아까"
"요즘은 그랬지. 신기한 거 말해줄까요? 자주 그랬는데, 어렸을 때는 자주 그렇게 기억을 못했는데. 4년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그러고는 지금까지 멀쩡해. 신기하죠?"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이 슬픈 게 마음이 좋지 않았다. 확실히 나았다고, 이제 안 그럴 거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자꾸 잊어버리니까. 언제 또 잊어버릴지 모르니까"
"사람 만나기가 무서웠어"
"그래서 학교도 때려치고 집에서만 썩어있고 그랬는데"
"누나는, 왜 자꾸 나한테 들어와. 왜 자꾸 보고 싶어"
"그러니까 자꾸 거짓말하고 싶잖아요. 이제 안 그럴 거라고. 다 나은 거라고"
"근데 아니야. 나 언제 또 기억이 없어질지 모르거든요"
"그럼 누나가 상처받잖아"
한마디도 뭐라고 대꾸를 못하겠는데 속에서 울컥하는 게 더 올라왔다.
"누나는 잃기 싫은데, 기억하고 싶은데"
"겁이 나"
집 밖을 자주 나가는 편이 아니었다. 그저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아무 소리도 안 들릴 정도로 크기를 키워 노래를 듣는 것, 그게 대부분의 내 일상이었다.아님 텔레비젼을 켜서 아줌마처럼 그 앞에 앉아 과자를 씹어먹으며 속으로 악역들을 욕하거나. 그래서 그런지 방영하는 웬만한 드라마는 다 본 것 같다. 그게 내겐 세상을 살아가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대신 살아가고 있었다.그런 내 모습을 보시고 이제 나갈 때도 됐다고 남들처럼 학교도 다니고 친구들과 놀러도 다니고 사람처럼 좀 살라고. 엄마는 항상 핀잔을 주셨다.
하루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서 하는 것도 없이 손가락을 딱딱거리며 시간이 얼른 가버리길 기다리고 있는데 내 옆에 가만히 와서 앉으셨다.바람만 쐬다 와도 뭐라고 안 할 테니까 한 번만 나갔다 오라고. 정 그러면 지금 내가 커피를 마시고 싶으니까 심부름인 셈 치고 카페에 가서 점원이랑이라도 한 번만 말해보고 오라고. 니 나이 또래 애들은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구경도 하고.잔소리처럼 장난처럼 넘기셨던 분이셨는데 그날따라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을 이어가시는 바람에 차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항상 죄송했으니까. 하나뿐인 아들이 이렇게 살아서 죄송해요.
4년쯤. 이만큼 지났으면 이제 다 나았나 싶기도 했다. 병원에서도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런데도 밖에 나와 사람들과 마주하는 것을 꺼리는 이유는. 나와,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 모두를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카페에 가는 걸 좋아하는 듯싶었다. 집에서 나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여기도 카페, 저기도 카페. 하긴 드라마에서도 항상 카페는 필수로 등장했다.고민할 것도 없이 가장 가까운 카페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알바생은 상냥한 목소리로 날 반겼고, 거의 처음이지?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서 아무 자리로 가서 엉덩이를 붙였다.주문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걸 들고 가야 엄마가 좋아하실지. 하긴 내가 뭘 사 가든 엄마는 좋아하시겠지만.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카운터로 가서 내가 원하는 걸 말하고 돈을 주면 되는데 그게 내겐 참 힘이 들었다. 어색했다.
민망하고 두근거리는 가슴 때문에 한숨을 쉬며 카페를 둘러보고 있는데 날 보고 있었던 것 같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눈이 마주치고도 피하지 않고 날 보길래 내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왜 쳐다보는 거지.시선을 돌렸는데도 느낌이, 그냥 느낌이 그 여자가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힐끔힐끔 쳐다본 그 여자는 정말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못 볼 거라도 본 듯 입을 살짝 벌리고 눈도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쳐다보는데 참고 있자니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대체 저 여잔 뭐지.눈싸움이라도 하듯 나도 같이 대놓고 쳐다보고 있는데, 그 여자 또한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피할 생각이라곤 하나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잘 됐다. 커피는 집어치우고 저 여자랑 몇 마디 하다가 다시 들어가야지.
그래서 몸을 일으켰고, 그토록 꺼려하던 다른 사람과의 인연을 그렇게 시작해 버렸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없어요?"
말을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뭐냐며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하고 여전히 표정은 멍한 채 나를 쳐다보길래 어디 아픈 사람인가 싶어서 자리를 뜨려는데 날 붙잡더니 저렇게 물어봤다.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어디서 본 적 없냐고, 나 기억 안 나냐고. 지난 십몇 년간 수도 없이 들었던 말. 내가 또 기억을 못하는 사람인가. 그래서 쳐다봤구나.
"나, 알아요?"
이럴까 봐, 더 이상 이런 소리 듣기 싫어서. 누가 말이라도 걸어오면 얼른 자리를 피하기 바빴는데. 기억을 못 해서 미안하다는 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기분이 나빠서 이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아... 그..."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여자는 당황하는 표정을 짓더니 눈만 데굴데굴 굴릴 뿐 대답을 하지 못 했다. 다행과 실망.순간 머릿속에 틀어진 장면은 어느 드라마에서 봤던, 뻔한 수작. 예전에도 혼자 가만히 있으면 수줍은 얼굴을 한 여자들이 다가와서 내 번호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거네.단지 이 여잔 내 얼굴을 보고 자기 마음에 들어서 쳐다봤던 것뿐이구나.
"그 쪽이 날 열렬히 사랑하게 될 줄 누가 알아?"
몸을 돌려 그냥 나가버리려 하는데 당돌하게 나오는 그 여자의 행동에 흥미가 생겼다.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너무 심심하게 살았구나 싶었다.벌써 4년이나 지났으니까, 그동안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니까. 이젠 괜찮겠지. 그냥 조금만, 이 여자에게 흥미가 떨어질 때까지만.
그 여자에게 번호를 주는 대신 내가 번호를 받아왔고 하루 종일 그 여자가 생각났다.당장이라도 연락을 해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해가 저물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안달 나지 않은 척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하다 보니 느껴지는 것 두 가지가 있었다.하나는 이 여자가 나에게 정말 관심이 있어서 내 번호를 따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것과. 또 하나는 저 여자와 내가 만난 적이 있다는 것.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게 맞았다. 내게 계속 자신을 기억하라고 때려댔다. 정말 기억해주고 싶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저 여자와 난 어땠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 머릿속에 이 여자와 관련된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그래서 한 번 더 보려고. 그럼 생각날지도 모르니까. 생각이 나지 않더라도 그 표정을, 당황하던 게 얼굴에 곧장 드러나 웃음이 터졌던 그 표정을 다시 보고 싶었다.
얼마나 내가 사람을 고파했는지. 얼마나 사람 냄새가 그리웠는지. 새삼 느껴지는 때였다. 매일을 누나와 함께 하기 위해 불러냈다. 그 얼굴이 앞에 없을 때면 핸드폰을 손에서 놓질 못했고 언제든 모든 신경이 핸드폰으로 쏠려있었다.그렇게 불러대고 귀찮게 굴어도 착한 사람인지, 아님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지 누나는 항상 나에게 맞춰주었다.
마침 누나와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었고 꼭 누나와 함께 가고 싶었다. 그리고 듣고 싶었다. 말끔하게 나았다고 이제 절대 기억을 잃어버릴 일은 없을 거라고.누나를 데리러 누나네 학교에 갔는데 대학교는 이런 곳이구나, 신기했다. 마지막으로 학교를 간지가 언제였는지도 흐릿하게 생각났다.
픽-픽- 무슨 특별한 것도 없이 뻑하면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그러고 일어나면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이 기억나질 않았다.웃기는 건 쓰러지긴 전 그렇게 궁금해하던 일들은 생각이 나고 그 사이의 일은 잊어버리고 그게 계속 반복이었다. 4살 때 사고를 당하고, 처음 6살 때 쓰러져 깨어나 보니 머리는 4살이었는데 몸은 6살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몇 년이 걸렸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는 그런 증상이, 금방 금방 튀어나왔다.딱히 정해진 주기도 없었고 정해진 행동도 없었다. 정말 그냥. 아무런 예고 없이 툭툭 그랬다.물론 학교 공부도 할 수 없었다. 시험도 볼 수 없었고 친구들과 같이 했던 것들이 기억나질 않으니 학교에 나가기도 싫었다. 내게 돌아오는 말은 항상 '기억 안 나?'.
고등학교는 아예 진학하지도 않고 그렇게 집에 처박혀 살았지. 사람과의 인연을 끊은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구경한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누나를 데리고 간 항상 가는 병원. 몇 년째 보던 똑같은 의사 선생님. 그날도 밝은 표정으로 날 반겨주셨고 검사 결과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별문제 될게 보이지 않는다고. 그래도 조심하라고.머릿속에 '조심해.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라 언제 또 널 괴롭힐지 어떻게 알겠냐.' 그 말만 맴돌았다. 분명 좋은 얘기도 있었는데.결과를 듣고 나오니 발을 동동 거리며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누나 모습에 입이 저절로 올라갔다. 볼 때마다 흥미가 시들시들해지기는커녕 자꾸 좋아지니.사람과의 만남이 줄어들고 내가 받을 상처, 그 사람이 받을 상처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만든 추억이 없으니 기억할 것도 기억하고 싶은 일들도 없었으니까. 기억이 사라질 뿐 몸이 아프다거나 하는 것도 없었고.근데 요즘은, 자꾸 겁이 난다. 다시 또 기억을 잃어버리면, 누나를 잊버리면 어떡하지. 누나에게 상처를 주면 어떡하지.이기적이게도 난 후에 일은 미뤄두고 자꾸 누나 앞에 나타나고 싶었다. 조금만 더, 며칠만 더.
"실은 나 궁금한 거 무지 많은데"
나에 대해서 물어보는 누나에게 사고에 대해서, 내 증상에 대해서 쉽게 말할 수가 없었다. 떠나버릴까 봐. 다시 그 얼굴을 볼 수 없게 될까 봐.왜 내게 우리가 어디서 본 적이 없냐고 했었는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누나인데. 사실 누나와 내가 아는 사이였을지도 모른다고 단정 지은 것도 내 멋대로였는데.누나 입에서 어쩌다 한번 본 적 있을 뿐이다, 실은 나 같은 애 모른다는 말이 나오면 더 이상 누나를 불러낼 핑계가 없어지잖아.
꽤 높은 목소리로 약간은 화를 내듯 털어놓는 누나에게 한마디도 해줄 수가 없었다.누나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질 때까지만 누나에 대한 흥미가 식을 때까지만 옆에 있다가 얼른 사라지면 그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더 큰 상처 주기 전에 누나에게 나에 대한 정 같은 감정 따위 생기기 전에 얼른 사라지면, 그전까지 누나를 잊지만 않으면 된다고.
누나에게 뒷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늘 누나가 들어가는 걸 보고 발걸음에 떼었는데 그날은 계속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집에 돌아와 핸드폰을 쳐다보며 미안했다고 그렇게 먼저 가버려서 미안했다고 하고 싶었는데, 그것보다 더 미안한 것들이 많아서 잘자란 한 마디 밖에 보내지 못 했다.
그렇게 한 달이 훨씬 더 지났고 내 감정은 깊어질 뿐이었다. 누나랑 있으면 마냥 좋았고 자꾸자꾸 보고 싶었다.그날따라 누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게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말끝을 자꾸 흐렸다.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내가 자꾸 기억을 잃어도, 누나를 잊어버릴지 몰라도 그래도 내 옆에 있어주겠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잠깐의 호기심이겠거니. 가벼운 감정이겠거니. 그게 식으면 떠나버리면 되니까. 누나나 내가 상처받기 전에 떠나면 되니까. 라고 생각했다.
근데 자꾸 좋아지니까. 누나가 점점 더 좋아지니까. 떠나기 싫어지니까.누나를 잃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인 거 아는데.상처 줄 거라는 거 아는데.
누나를 좋아하게 되었나 봐.
엄청 늦게 왔죠!!!!! 반성할게요......ㅠㅠㅠㅠㅠㅠ
실은 금요일에 올리려고 했는데 다음날이 콘서트이다 보니까 독자님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설레고 싱숭생숭해서 글이고 뭐고 읽히지도 않을것 같아서 콘서트가 다 끝나고! 딱!! 지금 올립니다!!
다들 콘서트는 잘 즐기셨나요~~ 못 가신 분들은 집에서라도 그 분위기를 느끼셨길 바랍니다ㅠㅠ
가만히 즐기기만 했는데도 이렇게 힘든데 방탄이들은 얼마나 힘들지ㅠㅠㅠ 열심히 준비한만큼 후회없었으면 좋겠고 우린 좋았으니까!! 그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네요!!
어후... 몸이 천근만근이네요... 푹자야겠어요ㅠㅠㅠㅠㅠ 그나저나 꾹이 울때 같이 운건 비밀..... 자꾸 더 좋아져서 어쩌죠?ㅠㅠㅠㅠㅠ 수고했어!!!! 방탄이 최고다!!!!
이번은 음... 수정도 참 많이 했어요 헤헤
아무래도 정국이 시점이랑 여주 시점이랑 겹치다 보니까 따로 생각해야 해서... 머리가 나쁜 저로서는 정리하기나 나름 힘들었네요ㅠㅠ
솔직히 이것도 제대로 잘 나타났는지 모르겠어요ㅠㅠ 저마저도 혼란스러우니... 혹시 이해가 안되시는 부분이 있다면 살짜쿵 얘기해주세요! 제가 언능 달려가겠습니다!!
늦게온만큼 분량은 많이 가져왔다고 생각하는데...하하 맞죠?
암호닉~~~!!♥
민슈가님, 김남준님, 설남님, 런치란다님, 권지용님, 베베님, 알라님, 수슙님, 다이님, 얌냠님, 부릉부릉님, 꾹이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