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생 구합니다 00
"아, 엄마! 아파! 아파! 붙일게, 붙이면 되잖아!"
경기도의 어느 한적한 골목. 전봇대에 열심히 하숙생을 구한다는 큼지막한 문구가 인쇄된 A4 용지를 붙이고 있는 나, 탄소. 세상에 어느 엄마가 학교 막 다녀온 딸내미한테, 그것도 막 중간고사를 끝내고 일찍 귀가한 딸내미한테 종이나 붙이게 하고 있느냐는 말이지. 안 한다고 반항도 해 봤지만 일주일간 밥 없다는 말에 내 반항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에 이기지 못한 나는 해가 저물어 가도록 열심히 종이를 붙이다 집으로 귀가했고 꿀같은 저녁을 먹었다.
"근데, 엄마. 설마 시대가 어느 땐데 하숙을 하러 들어올까?"
"오면 돈 버는 거고, 안 오면 마는 거고."
"아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하숙이야!"
"느이 아버지 지방으로 발령 났잖아. 이럴 때아니고서야 언제 목돈을 벌어 보겠어?"
"아빠 들으면 울겠다..."
우리 엄마지만 가끔 참 무심하다니까. 불쌍한 우리 아빠... 부디 부산에서 끼니나 건강하게 챙겨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설거지를 하고 올라온 방. 스탠드에 불을 켜고 멍하니 있으면 똑딱거리며 열심히 일을 하는 시계 소리가 들린다. 설마 진짜 하숙생이라도 올려고. 불편해서 어떻게 살아. 정신을 차리고 다이어리를 꺼내 짧은 일기를 적는다.
'하숙생, 부디 정신 건강한 여학생이었으면.'
하숙생 구합니다
귀에 익숙한 학교 종이 울렸고,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열심히 급식실을 향해 달린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반 순서대로 먹었는데 선착이 되고 난 후에는 점심 먹기 전부터 체력만 잔뜩 뺀다. 친구와 나란히 서서 급식 먹을 차례를 기다리다 문득 생각난 어제 골이 나도록 붙인 그 종이.
"야, 우리 집 어쩌면 하숙생 올지도 몰라."
"하숙생? 갑자기 왜?"
"우리 아빠 부산으로 내려갔잖아. 그래서 우리 집 마나님께서 어제 열심히 종이를 붙이셨다."
"헐. 기왕 올 거면 잘 빠진 남자 애면 좋겠다."
"미친. 말도 마. 내가 어제 일기에 여학생이면 좋겠다고 써 놨는데 남자는 무슨."
그리고 나는 그날 저녁, 집으로 귀가를 하고 신발을 벗을 때 문득 깨달았다. 일기라는 건 거꾸로 써야 되는 것인가. 내 눈앞에 보이는 이 낯선 신발은 분명 신체 건강한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데. 순간 점심시간에 친구와 나눴던 대화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고, 내일 자리라도 깔아 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를 할까 생각하다 왠지 낯설게만 느껴지는 집 안으로 한 발짝을 내디뎠다. 초콜릿색의 동그란 뒤통수를 가진 어깨 넓은 사람 하나가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트렁크 두 개. 누가 내게 꿈이라고 말해줘.
"어, 우리 딸 왔네. 야, 딸램. 이리 와서 인사해. 오늘부터 같이 지내게 될 친구야."
"..."
"얘가 멀뚱히 그러고 서서 뭐해?"
차마 떼어지지 않는 발에 굳은 듯 그곳에 서 있으면 그제야 초콜릿색 머리색을 한 남자가 나를 돌아본다. ...진짜 친구한테 자리를 깔라고 해야 되나. 잘 빠진 남자 애. 코는 오뚝했고 입술은 빨갰다. 무엇보다 눈은, 눈을 떠나 눈동자가 예뻤다. 남자의 얼굴을 보며 계속 그대로 서 있으니 말이 없는 내가 이상했던 건지 먼저 그 빨간 입이 열렸다.
"내는 김태형이다. 어, 니랑 동갑이다. 말 편하게 해라."
"..."
"원래 그래 말 수가 적나?"
젠장. 뭐라고 해야 될지 전혀 모르겠다. 말을 편하게? 네가 불편한데 말이 편하게 될 리가 있겠냐고. 도끼눈을 하고 째려보는 엄마도 있었고 일단 얼른 이 상황을 마무리 지어야겠다 싶어서 드디어 말을 꺼냈다.
"어, 어. 안녕. 이름은,"
"이름 들어서 알고 있다. 탄소. 맞제?"
"어? 어... 그, 그. 사투리..."
이런 씨. 뭐 됐다. 얼마나 할 말이 없었으면 이름 뒤에 바로 사투리라는 말이 나오느냐고. 묘하게 표준어가 섞여 있는 그 말투가 유독 튀었기에 아무 생각 없이 거르지 않고 말이 나가버렸다. 김태형이라는 남자애는 그 큰 눈을 꿈뻑꿈뻑 거리더니 입꼬리를 끌어올려 이를 드러내고 씩 웃는다. 그리고는 조금 부끄럽다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 내가 아직 서울말이 좀 서툴다. 고치려고 했는데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더라고."
"..."
"그래 이상하나...? 억양 많이 웃기나?"
빌어먹을. 웃는 게 또 겁나게 예쁘다. 급하게 고개를 저어내고 우선 교복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내 방으로 피신 아닌 피신을 했다. 방으로 들어와 문을 쾅 닫고 문에 등을 대고 기대 이유 없이 두근대는 심장에 가슴 언저리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뭔데...
"뭔데 이렇게 막."
심장이 쿵쾅대는 건데. 주변에 김태형보다 잘 생긴 놈은 몇 안 됐지만 김태형만큼 반반한 놈들은 몇 명이고 있었다. 아니, 생긴 것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닌가? 그래. 사투리. 익숙하지 않은 사투리로 말을 하니까 그래서, 신기해서 그러는 거야. 암, 그렇고말고. 굉장히 열심히 자기 합리화를 시켰지만 사실 그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때 묻지 않은 그 웃음에, 그게 뭐라고 내가 대답이 없으니 귀가 살짝 빨개져서 덧붙이는 말에 이유 모를 설렘을 느꼈던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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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작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하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