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알겠어. 알겠다고 좀 떨어져."
"아싸! 진짜? 진짜지?"
옆에서 방방 뛰어대며 내 팔을 잡고 흔들어대는 정호석에 나는 기어코 그와 약속을 잡고 말았다.
길 한복판에서 도로에 일렁이고 있는 아지랑이가 보이는 만큼 무더운 날씨에 등줄기에 땀이 흐를 지경인데 아까부터 치근덕대는 정호석의 떼장에 결국 내일 야구경기장에 같이 응원을 가기로 했다. 원래부터 나는 운동경기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지만, 시험 전 정호석이 광적으로 좋아하는 축구경기를 보러가기로 했던 약속이 내가 병원에 입원하는 통에 취소되어 버리는 바람에 그 일이 자꾸 마음에 걸려 부탁을 단칼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내게서 긍정의 대답을 들은 정호석은 덥지도 않은지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다니며 웃는다.
"어지러워, 앉아."
내 부름에 총총 뛰어와 옆자리에 바짝 붙어앉아 계속 말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진짜다, 너? 내가 꼭 기억해둘거야."
쨍알쨍알 옆에서 혼잣말을 뭐 그리 많이하는지 이젠 혼자 얘기하는 정호석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좀 떨어져, 더워."
야구 경기를 보러가는게 그리도 기쁜지 더운 날씨에 얼굴이 찌푸려질만도 한데 아까부터 계속 배시시 웃어보인다. 덕분에 더위에 짜증을 느끼던 나도 사르르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하루는 정호석의 수다를 들어주느라 바빴던 탓인지 피곤해진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알람을 맞춰두고 잠에 들었다.
밖이 소란스럽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핸드폰의 시계를 보니 아직 약속시간이 되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부스스 일어나 잠에 덜깬 상태에서 화장실에 들어가 씻고 나왔다. 대충 머리를 말리고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소란스러운 그 목소리가 정호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특유의 촐싹대는 억양과 말에 녹아있는 웃음에 딱 정호석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무래도 기분이 들뜬 나머지 잠도 제대로 못자고 일찍부터 단단히 준비를 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도르륵 눈을 굴려 그가 앉아있는 우리집 식탁을 보고, 그 앞에서 앉아 같이 떠들고 있는 엄마를 보고 뒤돌아 내 방으로 들어섰다.
미리 꺼내둔 옷을 챙겨입고 머리를 빗고 나갈 채비를 다 한 후에 다시 방 안에서 나왔을 때, 정호석은 내가 일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퇴근하면 집 대문 앞에 앉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강아지마냥 방 문 앞에 서있었다.
"이제 갈까?"
그 물음에 대답 하지않고 스쳐지나가 신발장 앞에서 신발을 신었다.
"아 진짜 신난다. 오늘 가서 완전 놀고와야지!"
"빨리 나와, 가게."
"응!"
입에 호선을 그리며 벌떡 일어난 정호석이 밖으로 나와 먼저 앞장섰다. 조용히 정호석의 등을 보며 걷던 나는 푸스스하고 웃음이 흘러 나왔다. 표정이 보이지않는 등에서도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있는지 다 보이는 듯 했다.
야구 경기장에 도착하자 정호석이 미리 예매한 티켓을 받아들고 좌석을 찾아 앉았다. 더운 여름날인데도 땡볕에 서서 운동하는 선수들을 보니 괜스레 나도 같이 더워지는 듯 했다. 이런 나와 달리 정호석은 보고 싶은 운동경기를 봐서 기분이 좋은지 생글생글 웃어보이며 경기에 집중한다. 옆에서 빤히 정호석을 바라보다, 금방 더워질 것 같아 시원한 음료수를 뽑아서 정호석에게 가져다주었다. 한번쯤 돌아볼 법한데 경기에 집중하느라 바쁜지 흘깃 음료수를 내려보고는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려 '고마워'하고 말한다.
틱틱 음료수 캔을 따서 목으로 넘기니 시원한 느낌에 기분 좋았다.
운동경기에 관심이 없는 나는 꽉 차있는 관중석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아이와 함께와서 보는 가족, 우는 동생을 달래주는 오빠, 애인과 함께 응원하는 커플 등 다양한 사람들을 보았다. 계속 보다보니 중간에 전광판 광고가 나오며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 휴식시간이 된 것 같았다.
경기를 보며 진을 뺀 정호석은 내가 건네주었던 음료수를 마시고선 나를 바라보았다.
"같이 와줘서 고맙다."
정말로 기쁜지 평소의 정호석보다 더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 뿌듯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니 내 끄덕임을 보고선 전광판 위의 점수표를 보기 시작했다.
휴식시간이 끝나가고 비워졌던 관중석이 점점 채워지자 급하게 화장실이 가고싶어진 나는 조용히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자마자 관중석의 큰 함성소리가 들렸다. 개의치 않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정호석이 내 손목을 덥썩 잡았다.
당황스러움에 고개를 돌려 정호석을 내려보자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나를 좌석에 끌어앉혔다. 영문모를 상황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니 정호석이 눈을 접고 입꼬리를 올리며 손가락으로 전광판을 가르켰다. 정호석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니 광고나 선수가 나와야할 전광판에 나와 정호석이 잡혀있었다.
아, 이거..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정호석을 바라보니 아까와 같이 바뀐 표정없이 웃어보인다.
"키스타임 잡혔네. 이거 해야되는데."
능글맞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넨 정호석은 이어진 관중들의 소리에 조용히 나를 바라본다.
"눈."
"..."
"감기싫으면 뭐 어쩔 수 없지."
"..."
순식간에 내 얼굴 위로 정호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다.
입술사이의 간격이 생기고 내게서 떨어진 정호석은 여전히 웃고있었다.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붉게 상기된 볼을 다급히 손을 올려 가렸다.
우리를 끝으로 몇 사람이 더 키스타임을 갖고 전광판의 카메라가 그라운드의 선수들을 잡았지만,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뛰는 심장만 진정시키기 바빴다.
사르르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정호석이 입을 뗐다.
"좋아해, 많이."
안녕하세요!
|
민망하지만 오늘 글잡담이 무료라고 해서 단편 빙의글을 들고왔습니다. 여름 느낌이 나도록 최대한 열심히 썼는데 조금 시원설렘하셨나요? 고생하며 썼지만 글에 쓰이는 단어들이 성숙하지 못한 것 같아서...
곧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꼭 다시 만나요.
아 너무 많이 티낸 거 같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