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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톡 상황톡 공지사항 팬픽 만화 단편/조각 고르기
김남길 몬스타엑스 이준혁 강동원 엑소
42 전체글ll조회 588l 1

산은 싫었다.

모기가 많아서.

바다도 싫었다.

저 캄캄한 심해 깊은 바닥은 나를 끝도 없이 끌어당겨 죽일 것만 같았다.


가자. 가야 할 것 같아. 이 짧은 두 문장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빽빽한 빌딩 숲과 버스를 한 번 타려면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을 계산해야 하는 서울의 중심부에서만 자라오던 나는 산과 바다가 펼쳐진 시골 중 깡시골로 오게 된 이유는 내 빌어먹을 기관지 때문이었다. 아 그리고 심장도. 돈 많은 엄마와 아빠는 나를 한국에서 탈출 시키고 싶어 하셨다. 스웨덴이나 스위스나 이런 이름부터 쾌청한 나라로 가자고 말했지만, 나는 안다. 엄마와 아빠는 본인들의 직업을 버릴 수 없으며, 나는 그곳에서 완전히 고립될 것이다. 차라리 개거지 같지만 말이라도 통하는 한국에 있는 게 속 편했다. 엄마, 아빠랑 연락도 잘 되고 말이다. 엄마, 아빠는 주말마다 내가 있는 곳으로 오시기로 했다. 아픈 딸을 놓고 그게 가능한가 싶었지만 나는 그냥 존중하기로 했다. 나의 가치관은 내 부모님과 많이 다르다고 나 자신을 이해시켰다. 엄마, 아빠는 그냥 거기에서 1년 만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으라고 했다. 공부도 하지 말라고 했다. 대학은 안 가도 되니 그냥 건강해지기만 해달라고, 돈은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엄마, 아빠가 물려주겠다고.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안 그래도 아픈 몸, 고개를 저어가면서까지 불효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서울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차를 타고 깡촌에 도착했다. 이름조차 입에 잘 붙지 않는 곳이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타고 들어가서 제일 먼저 보이는 파란 지붕이 이제 내 집이었다. 서울라이트로 살아온 게 몇 년인데, 에어컨도 없고, 또래도 없는 이 마을이 정말이지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엄마, 아빠는 걱정을 한 아름 안고 떠났다. 일요일 저녁이었으니 최대한 늦게 가는 거였다. 나는 흰색 롱 카디건을 입고 배웅했다. 엄마는 이 옷을 싫어했다. 병원에 아주 오래 있는 환자 같다고 내가 이 옷을 입으면 갈아입기를 100번 권했다. 그래서 입었다. 반항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할 말이 없고, 억눌러졌던 패션의 야망을 펼치는 거라고 생각해도 역시나 할 말이 없다. 차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쯤, 집으로 들어왔다. 파란 지붕 집은 아담한 집이었다. 큰 집은 싫다고 했다. 무서울 것 같아서.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것도 싫다고 했다. 내가 아픈데 누가 누굴 책임지겠다고. 방 하나에 부엌, 소담한 거실, 마당. 리틀 포레스트에나 나올 법한 집과 그 주변 풍경이었다. 인테리어는 엄마가 다 바꾼 모양이었다. 허름한 외관에 이런 내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엄마랑 비슷한 취향이라 썩 마음에 들었다. 거실에 우두커니 서서 대충 집을 둘러보고 냉장고를 열었다. 엄마, 아빠가 일일이 포스트잇을 붙여놓은 건지 노란색 종이가 꽃잎처럼 뭉쳐져 있었다. 각종 약과 영양제, 채소는 어떻게 손질하는지, 부엌에는 이 도구는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빨래는 어떻게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세세하게 적혀있었다. 집 이곳저곳에 붙은 포스트잇을 떼어와 하나하나 읽었다. 요리는 자신 있었다. 혼자 해 먹은 경력이 좀 있어서 걱정은 안 했다. 문제는 세탁기였다. 아무래도 친해지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공부도 안 하고 하루 종일 티비보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시간이 텅텅 남아돌았다. 이장님께 자전거를 얻어 마을 이곳저곳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는데 이제 그것도 질려서 그만뒀다. 원래 금방 질려 하는 성격인데, 진짜 원망스럽긴 처음이었다. 자전거로 20분 거리에 떨어진 슈퍼에는 최소한의 생필품과 유제품, 가공류 말고는 없는 게 더 많았다. 서울에서 즐겼던 MSG의 맛을 아는 사람에게 이곳의 군것질은 각설탕을 먹은 다음에 먹는 과일과 같았다. 밍밍하고, 아무 맛도 없었다. 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우울해진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래서, 주말은 제외하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근처 바다 목장에 알바로 취직했다. 언덕 위에 있는 작은 목장에는 산양들이 있었다. 할 일은, 밥 주고 똥 치우고, 가끔 일손이 모자랄 때 우유도 짜기. 그리고 정할 일이 없으면 팔팔하게 날뛰는 1개월 아기 산양들을 데리고 산책을 하는 것. 출근 시간은 상관없었다. 그냥 저녁때 농장 주인분께서 한 번 검사하기 전까지만 관리가 싸악 다 되어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꼬박꼬박 목장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맨날 산양이랑 얘기하고 건초 주고, 똥 치우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산양유도 전부 다 짜놓고 살균까지 시켜놨다. 농장 주인분은 이장님의 아드님이셨다. 그래도 40대시지만. 그렇다 보니 나는 매일 삼시 세끼를 이장님 집에 가서 같이 식사했다. 일도 잘하는 아가씨가 와서 아주 속이 편하다고 이장님이 이뻐하셨다. 좋았다. 텅텅 비어버린 냉장고를 보면서 이제 뭘 해 먹어야 하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같이 밥상을 나눌 상대가 있으니 좋았다. 드디어 이곳 생활에 만족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

퇴근 후에 저녁을 먹고 이장님 집 대청에 앉아서 요구르트 하나를 디저트로 때려주고 있을 때 사모님-이장님 아내분- 이 내 옆에 앉으셨다. 나와 똑같은 요구르트를 손에 들고 모자를 벗으셨다. 시원한 요구르트를 까서 원샷으로 들이키셨다. 끄하- 소리를 내면서 하늘을 바라보셨다. '새 아가는 시골에 와서 뭐 심심하지는 안 혀?' 사모님은 나를 늘 새 아가라고 부르셨다. 새로 이사 온 뽀송뽀송한 아가니 새 아가가 맞담서.

"목장에서 일하기 전까지는 되게 심심했는데 이제는 재밌어요."

"몸도 약하다면서 너무 무리하지는 말어. 난중에 그럼 몸 쓰겄냐."

"여기 공기가 맑아서 저 완전 건강해졌어요. 아프지도 않아요. 저 진짜 좋아진 것 같아요."

"그려, 다행이여. 새 아가는 여기 설화 들은 적 있나 모르겄네."

"설화요? 여기에 설화가 있어요?"

"그러엄, 있구말구. 함 들어볼텨?"

옛날에 조선, 몰러 하여튼 고때쯤에 워떤 여자가 밤만 되면 자꾸 바닷가만 서성거리다고 혀서 동네 사람들이 그 여자를 쫓아갔는디 오밤중에 바닷속에서 어떤 거시기한 것이 쑥 올라왔다고 아주 난리가 난겨. 그때는 그럼 무조건 마녀여. 고 여편네가 마녀로 몰려가지구 사또가 무신 악령이랑 소통했는지 물어보는디 세상에 그렇게 모질게 고문을 당했는데도 입을 안열데. 참~ 나 같으면 바로 불어버릴텬디. 그래가지고 마을이 발칵 뒤집혔제. 그러니께 사또가 대가리를 굴리기 시작한것이여. 여자를 그냥 풀어준 다음에 야밤에 건장한 사내놈들 데리고 그 거시기한 게 나타난 곳에 숨어있응께, 시상에 여자가 나타나니까 바다에서 시방 뭐가 팍 튀어올랐데야. 자세히 보니께 고것이 인어였던 것이여. 고때 시방 사또가 여편네를 잡으러 가니까 인어가 놀래서 여자를 데리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린겨. 인어가 모가지에 아가미가 뻐끔뻐끔거리니께 숨을 쉬었겠지만시롱 우리겉은 인간은 워떡햐. 그래서 고 여편네가 죽어버렸제. 사또가 이게 시방 뭔일이 일이당가 싶어서 다음날 다시 가봤는데 시상에, 여자가 파도에 밀려서 모래사장에 떡하니 있던 것이여. 죽었가꼬 그냥 묻어두고 장례나 치뤄주려는데 시방 고 여편네 입에 진주가 시상에 한 주먹이나 나온겨. 마을 사람들은 고때 그 진주랑 같이 묻어주자고 그렇게 말을 혔는디 사또가 귓구녕이 막혀부렀는지 그 진주에 눈이 멀어가꼬 여편네 장례고 뭐고 진주만 만지고 세월아 네월아 보내고 있응께 시상에, 바다에서 폭풍이 와서 마을을 싸~악 다 쓸어부렀어. 고때부터 인제 우리 마을에서 인어제를 지내는 것이여.

그리고 그 인어제가 일주일 뒤라고 하셨다.

나는 일주일 뒤가 인어제라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인어 얘기는 재밌었지만, 인어제는 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모님은 그 진주가 아직까지 마을에 남아있다면서 진주도 꺼내서 보여주셨다. 근데 내가 성격이 설화는 그냥 설화로 남겨두는 편이라 크게 믿지는 않았다. 사실이라면 진짜 신기한 거고, 아니라면 그냥 재밌는 이야기로 남겠지. 목장으로 가는 길이 이상할만치 조용했다. 하다못해 복순이가 짖는 소리라도 나는데 정말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뭐야, 다들 어디로 가신 거야. 목장에 가서 늘 똑같이 건초를 밥통에 담아주고, 똥을 치우고, 우유를 짜고, 살균을 시켰다. 유독 손이 빠르게 움직여서 꼬맹이 산양들을 산책 시킬 시간도 생겼다. 꼬맹이들의 몸에 밧줄을 단단히 묶어주고 목장 밖으로 나갔다. 바다를 따라 걸어야겠다.

마을에서 바닷가라고 불릴 만한 모래사장이 있는 곳은 딱히 없었다. 예전에는 있었는데 항구로 쓰려고 다 매워버려서 선착장이나 방파제로 가득했다. 마을 입구에는 선착장, 내가 걷고 있는 마을 뒤편은 방파제와 콘크리트 계단 정도였다. 날씨가 오늘따라 더 맑은 것 같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고, 바다는 연둣빛을 띄었다. 콘크리트 계단을 조금조금 내려다가 보면 그대로 바다에 들어갈 수 있다. 세 칸 정도만 내려가도 파도에 발이 젖어서 그쪽으로는 절대 걷지 않았다. 젖는 건 아무래도 좀 질색이라. 힘 좋은 꼬맹이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질질 끌려갔다. 한참을 쫓아가다 꼬맹이들도 지쳤는지 걷기 시작했다. 나는 바다 가까이로 걸었다. 짠 바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을 살짝 감고 바다 아주 가까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었다.

"너 뭐해?"

응? 이 마을엔 내 또래가 없었다. 나와 나이가 제일 비슷한 사람은 30대 중후반 정도 이신 빨간 지붕 아줌마였다. 이렇게 앳된 그러니까 나랑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애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목소리를 무시하고 다시 눈을 살짝 감았다. 환청이겠지...

"너 그러다 빠진다?"

눈이 번쩍 뜨였다. 뭔데. 뭐야. 어디서 들리는 건데. 두 번째로 들리는 건 내 청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진짜 목소리였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있다 해도 갑자기 나타난 남자애는 좀 이상했다. 이 마을에는 청소년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었다.

"나 여기에 있는데."

그래 그러고 보니까 목소리가 밑에서 들렸다. 고개를 바로 밑으로 숙이니 금발 머리 남자애가 어깨만 내놓은 채로 바다에 동동 떠있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채로 나에게 손을 들어 인사까지 했다. 이게 세상에, 무슨, 너무 놀라서 비명이나 꽥 질렀다. 꼬맹이들도 놀랐는지 내 비명 소리에 같이 매애매애 거렸다. 금발 머리 남자애는, 아니 이번에는 갈색 머리였다, 갈색 머리 남자애는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여전히 바다에 둥둥 떠있었다. 나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너무 놀라서 무리가 갔는지 숨이 가빠졌다. 그제서야 남자애는 좀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 야 많이 놀랐어?"

내가 가슴께를 부여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남자애는 여전히 물속에서 첨벙거렸다. 나는 천천히 숨을 쉬려고 노력했다. 들이 마 쉬었다, 다시 내쉬고, 남자애는 옆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천천히, 그리고 옳지 그렇게.' 내가 다시 정상 호흡을 되찾자 남자애는 시키지도 않은 자기소개를 했다.

"근데 너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여기에 혼자 온 거야?"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 인어제 하는 날인데 너는 왜 안가? 처음 와서 잘 모르나? 춘자가 말 안 해줬어?"

"알아요."

"알아? 야 그럼 더 갔어야지."

"까먹었어요."

"뭐,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아 그리고 너랑 나랑 액면가는 비슷한데 왜 존대를 쓰냐? 그냥 반말해!"

"... 응"

"어! 야 니 산양 도망친다! 뛰어 뛰어!"

그렇게 인어제때 한 번 본 인어는 내가 산양을 쫓아가고 돌아왔을 땐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나는 그 길로 그냥 꼬맹이들을 목장에 돌려놓았다. 그리고 곧장 이장님 댁으로 갔다. 인어제가 끝난지 얼마 안 된 건지 집 안은 어수선했다. 내가 대문에 우두커니 서 있는 걸 보신 이장님은 왜 인어제에 오지 않았냐고 아쉬움 가득한 말씀을 하셨다. 잊어버렸다는 말에 다음에는 꼭 같이 인어제에 가자면서 약속을 받아내시고 오토바이 헬멧을 쓰셨다. 이장님이 오토바이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시고 나는 사모님을 찾았다. 안방에 앉아 티비를 보면서 사과를 깎으시던 사모님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인어제 얘기에 잊었다는 말을 한 번 더 반복하고 나는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인어에 대한 설화가 더 없냐는 내 보챔에 사모님은 골똘히 생각하시더니 사과를 포크에 찍어 내 손에 쥐어주시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집에 돌아와서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이불을 덮고 계속 생각했다. 사모님이 해주신 인어 얘기가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오늘 내가 인어를 본 게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현실감각이 없어서 그런가, 그냥 꿈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았다. 사모님이 해주신 인어 얘기는 이랬다. 그 인어를 본 사람들은 각자 말하는 생김새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고 했다. 큰 눈에 오똑한 코, 얇실한 얼굴까지 곱상하게 생겼고, 머리색은 노란색이다, 갈색이다, 검은색이다, 본 사람마다 다르다고. 인어의 눈물은 진주가 된다고 했다. 슬퍼서 흘린 눈물은 모양이 울퉁불퉁해서 못생겼지만, 행복해서 흘린 눈물은 동그란 모양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모님이 보여주신 진주는 울퉁불퉁하게 생긴 게 진짜 못생긴 진주였다. 그리고 하나 더. 인어는 뭍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다고 한다. 인어가 목소리를 내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고 했는데 그건 잘 모르신다고. 그럼 아까 걔는 목소리를 어떻게 낸 거지? 생김새는 빼도 박도 못하게 똑같았다. 큰 눈, 오똑한 코, 얄쌍한 턱, 곱상하게 생긴 게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남자애가 아니라 여자애로 착각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바닷가로 뛰쳐나갔다. 눈곱만 겨우 떼어내고 머리는 여기저기 뻗친 채로 바닷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제랑 비슷한 시간대에 와야 볼 수 있는 건가? 뭔가 허탕친 기분이 들어 씁쓸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에, 물살을 가르고 무언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의령아! 나 찾은 거야?"

"나 의령이 아닌데."

"알지, 의령이 아닌 거. 근데 그냥 의령이라고 부를게. 너 이 이름이 잘 어울려."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의령이라니. 뭔가 겁나 거창한데 올드하다. 근데 부르지 말라고 해서 말라고 해서 안부를 거 같지도 않고, 그냥 수긍했다. 내가 계단에 걸 터 앉았다. 남자애는 머리 색깔을 계속 바꾸면서 계단 끝 쪽에 매달렸다. 비늘이 상체 위까지 드문드문 올라와 있었다. 등은 보이지 않았지만 등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걔는 그렇게 방실방실 웃으면서 나만 바라봤다. 내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으면 정말 계속 저렇게 나를 볼 것만 같아서 아무 말이나 막 입 밖으로 꺼냈다.

"목소리는 어떻게 내?"

"아~ 목소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조금 나눠 받으면 돼."

내가 조금 이상한 표정을 지었는지 남자애는 '잠깐만'이라고 말하고 바다 밑으로 사라졌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벌떡 일어섰다. 정말 얼마 안 있어 수면 위로 보글보글 거품이 일었다. 그 애가 머리부터 바다 위로 나타났다. 계단에 팔을 걸쳤다. 그러더니 팔을 다시 쭉 뻗어서 내 발끝에 커다란 소라 고둥을 내려놨다. 팔과 손가락을 타고 물이 뚝뚝 흘렀다.

"인어끼리는 서로 언어가 있으니까 목소리가 필요없는데 인간은 좀 다르잖아, 인간이 이 고둥에 목소리를 담아서 인어한테 불어 넣어주면 우리도 목소리가 생기는거지."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해? 꼭?"

"그렇더라구."

"인어가 만약 그 인간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면?"

"목소리가 깨지는거지. 그러면 인어는 목소리를 잃고, 뭍으로도 못 나와. 목소리는 상상 그 이상으로 힘이 세거든."

"새로운 인간을 사랑하게 되면 다시 뭍으로 나올 수 있어? 목소리도 생기고?"

"그런가봐. 난 아직 그런 적이 없어서 잘 모르는데, 다들 그렇다고 하더라."

"신기하네..."

"그치? 나도 신기해. 너랑 나는 말도 통하고 그런데, 진짜 다르다."

멀리서 이장님이 나를 부르시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애는 점점 물 밑으로 들어갔다. '해가 지고 여기서 다시 봐.'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 애는 물 밑으로 헤엄쳤다. 맑은 물 아래로 커다란 꼬리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보였다. 얘기할 때는 하나도 안 보였는데 비늘이 달린 꼬리를 보니까 정말 인어라는게 실감이 났다. '새 아가 뭐혀~' 이장님의 걱정 어린 말에 그냥 바다 산책 나왔다고 웃어 넘겼다. 이장님은 내 팔짱을 꼭 끼셨다. '아침 먹으러 가야혀~ 지금 니 뭐라도 멕이겠다고 부엌이 아주 그냥 난리여 난리!' 눈은 자꾸 등 뒤 바다를 향했다.

'오늘 어디 가야 해?' 이장님 아들인 목장 주인분이 물었다. 해가 지고 만나기로 한 인어가 있어서요... 한 번도 급하게 움직인 적이 없었는데 오늘 유난히 빨리 빨리 해결하려 하는 게 눈에 보인 듯 싶었다. 귀촌하신지 얼마 안되신 사장님은 -호칭이 애매해서 그냥 사장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유려한 표준어로 물었다. 나는 그냥 애매하게 웃으면서 어두워지기 전에 산책이나 한 번 하려 했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나부랭이를 술술 말했다. 그리고 사장님은 오늘 열심히 했으니 그냥 가라면서 일찍 보내주셨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그 가파른 언덕을 뛰어 내려왔다. 바다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노을이 질 시간이다.

아침과 같은 자리에 앉았다. 숨 막히게 뛰어오느라 호흡이 엉켰다.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땀에 젖어 얼굴 여기저기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빨간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점점 사라지고 하늘이 분홍과 보라로 번짐이 일자 그 애의 머리가 물 위로 나타났다. 그 애는 참 이쁘게 웃었다. 순한 얼굴이 갖고 있는 미소는 인어 여럿 울렸을 법 했다. 이번엔 내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 그 애도 같이 손을 흔들었다. 아침과 똑같이 계단에 팔을 걸쳤다. 이번에는 내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있잖아, 인어 눈물은 진짜 진주야?"

"응. 우리는 인간처럼 눈물이 아니라 진주가 퐁퐁퐁 나온다. 봐봐."

그 애는 일부러 하품을 했다. 눈에 진짜 진주가 맺혀서 도르륵 굴러 떨어졌다. 떨어지는 진주를 잡고 팔을 뻗어 내 발치에 놓았다. '이건 선물.' 또, 예쁘게 웃었다. 그 애의 몸은 위 아래로 작게 움직였다. 아마 밑에서 열심히 꼬리를 흔들고 있겠지.

"또 궁금한거 없어?"

나는 그동안 숱하게 들었던 인어에 대한 얘기를 줄줄이 물었다. 인어 비늘을 이마에 붙이면 인간도 바다에서 숨을 쉴 수 있다던데 진짜야? 글쎄 그건 내가 아직 안해봐서 잘 모르겠다. 너가 해볼래? 인어는 노래 정말로 잘 불러? 못 부르는 애도 있는데 나는 잘 불러. 인어 왕국은 어때? 어떻게 생겼어? 딱 인간 세상 같아. 별로 다른 건 없어. 인어는 마법 같은 거 못 써? 응. 난 못 써. 같은 바다에 사니까 저기 대서양 너머에 있는 인어랑도 얘기가 통해? 인어끼리 쓰는 언어는 똑같아서 다 말 통해.

"와, 진짜 신기하다."

"이제 궁금한 거 다 물어봤어?"

"하나만 더. 너는 지금 이 목소리 누가 나눠준거야?'

나와 덩달아 같이 신이 난 표정으로 답해주던 그 애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내가 못 물어볼 걸 물어본건가. 혹시 이런 걸 묻는 게 인어 세계에서는 실례인가.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이 마구 들고 있을 동안 그 애는 내 눈을 피한 채로 답했다. '오래 전에. 예쁜 애가.' 아. 되게 오랫동안 사랑하는 앤가보다. 표정이 아까와 비교될 정도로 어두워졌길래 나는 목소리에 대한 얘기는 피했다.

"너 이름은 뭐야?"

"범규. 최범규."

"범규... 이름 예쁘다. 잘 어울려."

범규는 머리색을 바꿨다. 금발이었다. '머리색은 어떻게 바뀌는 거야? 진짜 신기하다.' 내가 범규 머리에 정신이 팔려 머리만 빤히 바라봤다. 범규는 머리 털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퍽 부드러워 보였다. 강아지 같기도 했다. '몰라, 그냥 내 맘대로 바뀌던데? 근데 가끔은 내 기분 따라서 바뀐다고도 하더라고.' 우와 신기하다. 범규는 더 다양하게 색깔을 바꿨다. '그러면 비늘 색깔도 바뀌나?' 범규는 팔을 쭉 뻗었다. 범규 머리 색깔에 따라 비늘 색도 다채로운 색을 냈다. 끊임없는 내 감탄에 기분이 좋아진 건지 범규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인어들은 인어마다 진주가 다르니까 만약에 내가 바다에 없으면 이 진주를 던져. 그러면 내가 너 인줄 알고 바로 올라올게.'

나는 몸을 앞으로 땡겨 진주를 손에 쥐었다. 예닐곱 알 정도 되는 진주는 맨들맨들했다.

"근데, 너 왜 나랑은 얘기해? 다른 마을 사람들하고는 얘기 안하면서."

"너무 늙어서. 장난이야, 아마 내 나이가 더 많을 걸?"

범규는 손가락으로 볼을 톡톡 두드리면서 고민했다.

"오랜만이라서. 인간이 오랜만이라서 그랬나봐. 보고 싶었기도 했고, 만나고 싶었기도 했고."

"내가?"

"의령이가."

저는 별하면 늘 범규가 가장 먼저 떠올라요!

별이라는 단어에서 주는 어감, 억양, 이미지가 왠지 모르게 범규 같달까?

저는 인어는 별로 좋아하는 소재가 아닌데 바닷속asmr을 듣다 갑자기 범규를 인어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썼어용

여러분의 추측이나 생각 댓글로 마니마니 남겨주세용!

처음으로 제가 떡밥을 던져봅니다ㅋㅋㅋㅋㅋ

그리고 이번에도 럽 미 레스와 같이 여러분이 빙의되는 이 아이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려 되게 많은 노력을 했어요큐큐큐

몰입에 방해될 게 전혀 없으니 얘가 나다!! 라고 시원하게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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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범규가 그 인어설화 인어고 의령이가 그 때 죽은 여편네인데 새아가가 의령이랑 닮아서 놀란 범규가 호다닥 나온건가..?? 글분위기 넘좋아요
4년 전
독자2
너무 좋다..범규가 인어라니 아주 오래전이라고 했으니까 위에 독자님 말 처럼 설화속 인어가 범규였을 것 같아요....나이도 많다고 했고 의령이라는 이름이 조선시대(? 이름 같기도 하고...
4년 전
독자3
아악 ㅠ 작가님 진심이세요? 이렇게 글 올라오는 속도가 빠르시면 어떡해요 ㅜ ㅜ 난 42님에게서 헤어나올 수가 없어... 투바투를 42님 띵글로 입덕하고 있어... 머리색 찬란하게 바뀌는 범규 설정 넘 좋고요... 목소리 설정도 참 발리고요... 마을 이장님부터 챙겨주시는 분들 다 정감있어서 따뜻하구요 ㅠ
4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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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원 보보경심 려 02 1 02.27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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