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너를 만난다면 15.完
내리자마자 구겨져 있던 몸을 쫙 풀고 있는데 코로 바다 내음이 훅하고 들어왔다. 짭짤한 냄새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처음 우리가 갈 곳은! 맛집이야! 기차에서 주워 먹긴 했지만 제대로 된 점심을 먹지 못하고 몇 시간이 지나 허기가 졌다. 그래서 잡은 첫 번째 계획은 밥.
"배고파"
정국이가 배를 손으로 쓸었다. 고프겠지. 근데 가려고 했던 곳이 여기서 조금 걸리는데...
"기다려봐! 우리가 가려던 곳이..."
열심히 적어온 종이를 펼쳐보는데 정국이가 내 손을 잡고는 날 끌었다.
"거기까지 언제 가요. 그냥 아무 데서 먹자"
이럴 줄 알았지... 거기까지 가기엔 나도 지금 배가 고프니까 그냥 참는다... 벌써부터 아무 쓸모가 없어질 것 같은 종이를 구겨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하긴 뭐. 계획을 짰다고 그거대로 가는 게 많은 경우는 아니다. 대개 그때그때 바뀌지. 근데 왜 우린 처음부터 어긋나는 거냐!!
내 손을 잡은 정국이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성큼성큼 걸었다. 그러다 정말 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간단하게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점심은 자기 때문에 계획대로 안 되었으니 그다음은 내가 짠 계획대로 따라와 주겠다는 정국이 말에 소심하게 다시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괜히 구겼네.
다음 계획은 아쿠아리움! 인터넷을 뒤져가며 얼마나 열심히 계획을 짰는데 내가! 그중에 단연 볼 곳은, 아쿠아리움이었다.
곧장 그곳으로 향했고 처음엔 다 커서 무슨 아쿠아리움이냐며 투덜거리던 정국이도 막상 안에 들어가니 눈까지 커지며 우아 우아- 연신 감탄을 해댔다. 거봐 오길 잘했다니까?
"우아- 이거 봐봐! 봤어, 지금? 와!"
나보다 더 신이 나서 온 구석구석을 다 돌아다녔다.
쭈욱 다 보고 출구로 나가려는데 정국이 표정에선 아쉬움까지 보였다.
아쿠아리움을 먼저 보려고 지나쳤던 바다를 드디어 눈에 담기 위해 나왔다. 해가 져 노을 진 하늘과 함께 보고 싶어서 일부러 더 보지 않고 얼른 들어갔던 것도 있었다.
드디어 밟아보는구나 모래밭!
발이 푹푹 빠지는 게 이 나이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사긋사긋거리는 모래사장을 걷고 있는데 문득, 정국이가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마냥 신나할게 아니라는 것.
먼저 앞서가는 바람에 뒤로 떨어졌던 정국이를 조심조심 돌아보았다.
실은 아까 역에서 내려 '부산'이란 단어를 마주했을 때, 정국이가 어떨까 꽤 걱정했는데 아무렇지 않아 보여 넘기긴 했지만. 자신을 삼켜버린 바다와 마주한 정국이는 또 어떨까 다시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리 심각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날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띠어줄 뿐.
아까보다 표정이 가라앉기는 해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오랜만에 밟는 모래에 기분이 좋아서 날뛰는 나라니.. 참 내가 미웠다.
"왜"
눈치를 보며 쳐다보니 그런 날 느꼈는지 정국이가 물었다. 물어볼 수도 없고. 정국이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 텐데. 내가 먼저 물어볼 수도 없었다. 기다려야지.
"아니야!"
크게 대답을 하고 다시 정국이 옆으로 뛰어가 손을 잡았다.
"이제 가자"
"벌써?"
내 말에 정국이는 눈을 크게 뜨며 내 주머니를 뒤졌다.
"저녁 먹기 전까지 여기서 시간 때우는 걸로 돼있는데"
"아냐. 거기 멀어서 지금부터 가야 돼"
정국이 손에 들린 종이를 뺏어들며 말하니 뭔가 이상하다는 듯 정국이는 눈썹을 씰룩거렸다.
그런 정국이에게 싱긋 웃어준 뒤 함께 자리를 떴다.
자기는 나름 티 안 내려 하는 거겠지만 내게 보이는 처져있는 정국이 표정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미 다 알고 있고 정국이가 지금 힘들어하는 것도 알고 있는데 생각 없이 바다 위를 뛰어다니고 싶지 않았다. 이유를 몰랐다면 정국이 표정을 보고 왜 그러냐며 자꾸 물었겠지.
그런 걸 보면 알고 있는 게 다행인가 싶다가도.
의견을 물어도 알아서 하라고 듣는 둥 마는 둥. 계획을 짤 때 그저 내게 맡기더니 딱 한 곳. 꼭 가보고 싶다는 곳이 있었다. 그곳이겠지. 정국이가 사고가 난 곳. 그곳에서 말해주겠지.
저녁을 먹고 그곳으로 향하는 게 우리 계획이었다.
억지로 계획을 앞당겨 출발해서 그런지 참 빨리도 도착했다. 점심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덜먹을 거라는 우리 예상과는 달리 아쿠아리움에서 힘을 빼고 돌아다녀서인지 둘이 많은 양을 흡입했다.
바다에서 보았던 정국이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평소처럼 해맑은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같이 맘 놓고 웃어주지 못하는 날 보고 차라리 몰랐으면. 싶었다.
**
달리는 택시 안에서 마주 잡은 두 손만 가운데에 두고 서로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아꼈다. 창문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만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다 먼저 정적을 깨는 건 정국이었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건지, 아는 거지"
놀라서 얼른 정국이를 쳐다보면 정국이 시선은 여전히 창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구나. 하긴, 모를 리가 없었다. 정국이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내 감정을 숨기는데 서툰 편이니까. 평소와 다른 내 모습이 너도 신경 쓰였겠지.
"응"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깜짝 놀래주려 했는데 벌써 알고 있으면 어떡해요"
날 돌아보며 씽긋 웃는데 그 표정을 보니 나는 더더욱 웃을 수가 없었다. 날 위해 애써 그런 표정을 지어주는 게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그런 표정 짓지마. 난 괜찮은데"
안 괜찮으면서. 아까부터 잡고 있던 손이, 떨리고 있다는걸. 날 보며 웃어주는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는걸.
나도 알고 있는데 말이다. 자기는 모르겠지. 티 안 난다고 생각하겠지.
"괜찮은 척 안 해도 돼. 그냥 힘들면, 나한테 기대"
차라리 힘들다고.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다고. 솔직히 겁난다고 해주는 게 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억지로 참고 괜찮은 척하는 게 날 더 힘들게 해.
정국이가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그래도.. 돼요?"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주니 잡고 있던 손을 당겨 나를 꽉 안았다.
"하..."
내 어깨에 기대 힘을 쭉 빼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쉽지 않을 거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기대도 괜찮아. 나는 니 상처를 다 알고 있으니까. 기대도 괜찮아.
"같이 와줘서 고마워"
토닥토닥. 정국이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런데 잊고 있었던 거.
"다 왔는데. 계속 달리까?"
여긴 택시 안이라는 거... 아, 까먹고 있었어... 기사 아저씨의 목소리에 어색하게 떨어져 요금을 내고 얼른 택시에서 내렸다.
와.. 창피해...
"역시 우린 분위기 잡는 게 참 힘들어"
정국이가 뒷머리를 쓸며 멋쩍게 말했다. 그러게...
"가요"
따뜻한 손을 잡아왔고 깍지까지 꽉 꼈다. 후- 나도 크게 한번 숨을 내쉬었다.
****
"생각보다,"
"...."
"괜찮네"
"정말?"
"응. 너랑 와서 그런가"
사람이 없어 한적한 바닷가를 나란히 걸었다. 바다가 보이기 전까지 여전한 긴장을 보여주더니 막상 마주하고 난 정국이는 다행히도 멀쩡했다.
날 보며 싱긋 웃어주기까지 하고. 그 웃음이 불안하지도, 억지스럽지도 않았다.
"이제 정말 괜찮나 봐. 왜 그렇게 겁을 냈을까"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잘 걷다가 우뚝, 정국이가 멈춰 섰다.
"저기, 보여요?"
손가락으로 어딜 가리키면서.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작은 섬 같은 곳이 보였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야"
또 천천히,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구나.
"솔직히 잘은 기억이 안 나는데 와보니까 저긴 기억나"
"...."
"그땐 내가 너무 겁이 없었나 봐요"
"...."
"누나도 알죠? 나 빨간색만 보면 환장하는 거"
알지 그럼. 너에게서 빨간색을 빼고 어떻게 말을 하겠니.
"어렸을 때도 난 빨간색이 그렇게 좋았나 봐"
"...."
"그때도 정말 신기하게 바위 틈에 빨간 꽃이 있는 거야"
"...."
"그래서 그거 꺾으려고 자꾸자꾸 바다 쪽으로 갔는데"
"...."
"그렇게 큰 파도가 날 삼킬 줄 몰랐어"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그럼에도 내 목이 오히려 메였다. 그 어린아이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너무해. 그 어린애한테. 괜히 바다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냈다.
"지금이었으면 멀쩡히 서서 파도한테 욕 한 바가지 해줬을 텐데"
"...."
"그땐 내가 어렸나 봐"
"...."
"근데 신기한 게 뭔지 알아요?"
"...."
"내 손에 그 꽃이 들려있었대요. 꼭 쥐고 놓지 않았대. 병원에 갈 때까지."
고집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고집은 여전했구나?
정국이를 보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까 일부러 시선을 피하고 있었는데 말을 마친 후 내 앞에 섰다.
"나 봐봐"
입술을 앙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
"이제 기억나요? 나랑 어디서 만났는지?"
눈물은 나오지 않아 잘 누르고 정국이와 시선을 맞추고 있는데 내게 물어오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난 여전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너와 내가 어디서 보았는지.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입술을 오물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 했다.
"아직도 안 나? 뭐야, 기억 해내요. 숙제야"
머리를 긁적거렸다. 기억이 안 나는데 뭘 어떻게 기억 해내란 거야... 자기도 맨날 까먹었던 주제에!
그래도 중요한 걸 까먹은 내 잘못이 크니 눈치를 보고 있는데 환하게 웃어주며 내게 다가와 날 꼬옥 안아주었다.
"하..."
아까와 같이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하고 나니까 시원하다"
"잘했어"
자기 등을 천천히 토닥이는 날 더 꽉 안아 품에 가두었다.
"나 지금부터 좀 감동적인 말할 건데, 아무 말하지 말고 그냥 들어봐요"
"응"
"말하지 말라니까?"
품에서 날 조금 떼 자기 이마로 내 이마를 콩- 찍고는 배시시 웃으며 다시 날 안았다.
"시작한다?"
"...."
"그날, 그 카페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
"날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줘서 고마워요"
"...."
"내 연락 받아줘서 고마워요"
"...."
"항상 멋대로인 나 따라와 줘서 고마워요"
"...."
"착하게 참고 나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
"그리고, 나 좋아해 줘서 고마워요"
"...."
"너는 내게 행운이야"
"...."
"고맙습니다"
"...."
"끝!"
우리가 분위기 잡는 게 힘든 데에는 정국이 몫도 있다. 끝이 뭐야 끝이. 한참 감동받으려 하고 있었데. 딱 깨요.
날 품에서 놓고 내 눈을 바라보며 뿌듯한 듯 웃었다. 나도 참 큰일 났지. 그 모습에 내 입꼬리도 쏙 올라갔다. 나도 고마워.
내가 정말 그날 그 카페에 가지 않았으면, 널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았으면 우리 둘이 이렇게 여기 오지도 못했겠지. 그걸 생각하면 사람 인연이란 게 참 신기하구나 싶었다.
너도 내게 행운이야. 너란 아이가 나와 함께 있어줘서 나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이제 말해도 돼?"
정국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고마워"
"끝이야?"
"응?"
"그게 끝이에요? 나 엄청 길게 말했는데"
뭘 더 어떻게 말하라고... 뭘 바라는 거야... 뭐라고 해줄까..?
"뭐라고.."
"아냐 됐어. 말하지 마요. 다 알아"
내 말을 끊더니 내게 가까이 다가와 그대로 입술에 꾸욱 도장을 찍었다. 우리 진짜 많이 발전했다, 그치?
살랑살랑 바닷바람이 온몸을 감싸고 나름, 우리 지금 나름, 분위기도 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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