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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O/도경수김민석김종인] 터닝 포인트 (Turning point) 1 | 인스티즈

도경수,김민석,김종인

그리고 너의 이야기.





빌리어코스티-너 떠난 오후











"뭐해? 안 건너?"

"담배 한 대 피고 건너가게. 금연이니까. 버스 정류장."

"아, 그래."



종인의 말 끝에 '먼저 가던가.'하는 말이 숨어있는 것을 알면서도 여주는 자연스레 멈춰섰다. 그녀가 종인의 말에 우뚝 멈춰선 것에,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단순히 뛰기 싫었을 뿐. 그녀는 땀을 흘리는 것도, 운동을 하는 것도 지독히도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번쩍이던 초록등은 곧 소등했다.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종인과 여주, 둘의 그림자가 나부꼈다. 여주의 콧속으로 종인이 피우는 박하향 담배냄새와 부대껴 옅은 비 냄새가 비집고 들어왔다.


예보에 저녁에 마지막 비가 내린다더니, 슬슬 비가 오려나. 여주가 코를 찡긋거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하늘은 밤이 되어 어두워졌을 뿐 여느때와 다름없이 맑았다. 근데 왜 꼭 비가 올 것 같지. 하늘을 바라보니 어쩐지 여주는 제 가슴을 툭툭 쓸어내리고 싶어졌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늘임은 분명한데, 그 하늘을 바라보는 제 자신이 평소같지 않아서 그런가. 하고 생각하다 애써 떨쳐냈다. 눈 밑이 아직 따가웠다. 종인의 앞에서 또 눈가를 만지는 것은 어쩐지 자존심이 상해 괜히 팩트를 꺼내 얼굴을 보고 말았다.


여주가 멀리 던진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다 종인과 눈이 마주쳤다. 마음을 뚫어보는 듯한 종인의 곧은 시선이 불편해 그녀가 붉게 타들어가는 담배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마저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종인의 시선때문에 아예 초록불이 켜진 옆 도로의 신호등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냥 아까 뛰어서 건널껄.'하는 생각을 하며 버스카드를 찾으려 주머니에 꽂은 손을 더듬거렸다. 이것저것 잡다하게 카드로 긁어대 받아낸 수많은 영수증과 오늘 이곳으로 오며 수없이 받아든 전단지들 사이에서 어렵게 버스카드를 찾은 여주가 그것을 꼭 손에 쥐는데, 바닥에 발을 부비는 소리와 함께 종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넌."



여주가 건너편 도로의 초록불이 깜빡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종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종인이 삐딱하게 주머니에 손을 꼽고 발 끝을 땅에 툭툭 쳤다. 곧 고개도 삐딱해졌고 턱에 힘이 들어갔다. 불만이 있고, 그 불만을 말하기 직전에 나오는 종인의 안좋은 버릇이었다. 내가, 내가 저거 턱관절 생긴다고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하지만 이번엔 그 잔소리는 그저 속으로 삼켰다. 이제 내가 저 새끼가 턱이 빠지든, 빠개지든 뭔 상관이야. 그런 삐뚠 생각도 든다. 여전히 그 힘이 들어간 종인의 턱엔 시선이 가지만.


아무튼, 그런 종인의 버릇이나 습관들을 줄줄이 꾀고 있는 것은 세상 천지에 여주뿐이었다. 종인이 그동안 어느 여자들과 얼마만큼 오래 알아왔던, 오래 사귀었던, 깊게 마음을 주고 받았던 가벼운 몸관계만 가지었던간에 그 많은 여자들 중 누구도 몰랐던, 오로지 여주만이 알고있는 김종인만의 크고 작은 버릇들.


여주의 시선이 종인의 신발 끝에 머물다 다시 종인에게로 올라섰다. 힘이 들어간 종인의 남자다운 턱이 움찔거리다 퉁명스런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왜 나한테 담배 끊으라고 안 했어?"


'안 했어?' 과거가 되어버린 종인의 말 끝에 잠시 멍하니 입술을 벌리고 있던 여주가 종인에게서 휙 시선을 떼며 말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뭐야? 왜 네 건강 안 챙겨줬냐는 원망?"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나온 뾰족한 말투에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그런 여주의 옆 얼굴선을 타고 입술을 잠시 바라보던 종인의 얼굴에 질렸다는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종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여주의 앞에 켜진 초록불을 보곤 말없이 여주를 지나쳐 횡단보도로 내려섰다. 자신을 지나치는 종인을 따라 자연스레 종인의 곁에서, 아니 그보단 조금 더, 조금 많이 떨어진 상태로 횡단보도를 건너며 여주가 말을 이었다. 조금, 망설이는 듯한 말투였다.




"너…내가 끊으라면 끊었을거야?"

"아니."



조금도 망설이지 않은 종인의 대답에 '에이ㅆ…'하고 욕을 뱉던 여주가 막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아 귀에 대며 종인을 노려보았다. 종인의 뒤로 멀리 신호에 걸려있는 여주가 탈 버스가 보였다. 종인과 여주는 가까운듯 멀리 떨어져서 각자의 버스를 기다렸다. 종인은 귀에 이어폰을 꼽은지 오래였고, 여주는 '와하하!' 그녀다운 호탕한 웃음소리를 뽐내며 통화를 하기 바빴다. 여주는 친구와의 전화통화를 하며 다가오는 버스를 향해 걸었다. 이미 종인은 자연스레 지나쳐간 뒤였다.


막 버스문이 열리고, 여주는 한 쪽 발을 계단 위에 올리고 나서야 종인이 생각난듯 잠시 뒤돌아 종인을 바라보았다. 종인은 여전히 귀에 이어폰을 꼽은 채 무관심, 무감정, 무기력… 여주가 가장 싫어했던 그 눈빛으로 여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종인을 향해 여주가 대강 눈인사를 하곤 삑 카드를 찍고 제일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종인의 쪽은 아예 쳐다도 보지 않을 심상인지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창틀에 팔꿈치를 기대고 몸을 안쪽으로 틀어버렸다. 친구의 우스개소리에 승객들의 눈치를 보며 큭큭대며 여주가 창문에 머리를 기대자, 몇 초 뒤, 앞 문이 닫히며 버스가 출발했다.


여주의 버스가 출발하고, 종인 또한 가볍게 시선을 돌려 뒤이어 오는 자신이 탈 버스를 향해 걸었다. 둘이 탄 버스는 같은 신호를 받아 동시에 출발했다. 그리고, 한참을 한 도로를 타고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같이 달리던 두 대의 버스는 곧 여주의 버스가 먼저 우회전을 하며 떨어져 나왔다. 종인이 탄 버스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앞만 보며 달렸다.



우습지만, 오늘은.


종인과 여주가 2010년 2월, 고등학교 졸업식때 13년간의 불알친구관계를 청산하고 시작한 '연인관계'를 '다시' 청산하고, 그들이 5년전 그대로, 친구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터닝포인트

; 불알친구와 웬수, 그리고 구남친의 상관관계

w.미니스톱



1화










3년 뒤






<오늘 전국 대부분 지역에선 맑은 하늘 아래 초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낮 동안에는 자외선에 대비하셔야겠는데요. 자세한 날씨는 야외에 나가있는 기상 캐스터 연결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여주 캐스터!>


네! 저는 지금 청계천에 나와있습니다. 현재 하늘은 참 맑은데요.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면서 마치 초여름처럼 덥게 느껴집니다.>



튼튼해 보이는 커다란 모니터 스피커를 통해 초여름 날씨처럼 청량한 여주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화면 속의 동영상에서 라임 색의 원피스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여주의 얼굴이 보였다.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미소가 꽤 프로다웠다. 하지만 그 영상에는 미련이 없다는 듯 모니터 앞에 앉은 여자는 미련없이 스크롤을 휙 내려버렸다. 스피커를 통해 자외선이 강하니 양산과 모자를 이용하라는 여주의 목소리도 곧 그녀의 손에 의해 쑤욱 줄어들었다. 몸집에 비해 다소 커 보이는 회색 반팔티와 무릎이 나온 가로줄 무늬 트레이닝 바지, 질끈 말아 올린 머리, 매끈한 뒷목과 보송보송 튀어나온 잔머리가 귀여운… 화면 속의 여주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김여주가 맞았다. 하지만 벅벅 스크롤을 내린 그녀는 댓글을 읽으며 무언가 성에 차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야, 밥 먹어."




노크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리며 종인이 들어왔다. 다시 문을 닫고 나가려다 미동도, 반응도 없는 여주의 뒷모습을 보고 그 특유의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여주 곁으로 다가왔다. 집중하느라 삐죽 튀어나온 여주의 입술을 한번, 주름진 미간을 한번 보곤 종인 또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막 화면의 댓글 중 첫 번째 글자를 읽는 데, 여주의 불만스런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야, 솔직히 내가 평범한 얼굴은 아니지 않냐 내가? 내가 어딜 봐서 평범해!! 이 새끼 주변엔 전지현 한예슬 이런 여자밖에 없나? 아니 내가 어딜 봐서!"



흥분에 찬 여주의 목소리를 듣던 종인이 피식 웃었다.



"왜, 전지현, 한예슬보단 네가 못한 것 같냐?"

"… 나도 양심은 있거든?"

"양심 있는 애가 맞는 말에 화를 내면 안 되지. 말 잘했네, 얘가. 핵심 콕 집어서. 평.범."



종인의 말에 여주가 울컥하며 양반다리를 하고 있던 다리를 풀러 종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윽 소릴 내며 앞으로 밀려난 종인이 눈을 부릅뜨며 '엉덩이 차지 말랬지.'하고 낮게 말했으나 여주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흥! 하고 코 푸는 소릴 내곤 '밥 먹어야지~'하고 신나는 발걸음으로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여전히 이를 으득거리며 여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종인이 모니터 화면으로 휙 시선을 던졌다가 열린 방문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열린 방 문 사이로 여주가 종인의 엄마 미정에게 '아 엄마~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해놓기 있기없기~'하고 애교를 피우는 소리가 들렸다. 무릎 하나를 의자에 걸친 채 종인이 스크롤을 올려 방금까지 여주가 읽고있던 댓글들을 읽기 시작했다.


갖은 음담패설과 외모찬양부터 비하까지… 그저 뉴스에서 일기예보만 편집해 올린 인터넷뉴스치고 꽤 많은 댓글이 달려있었다. '잘 안 보여서 그렇지 가슴이 씨컵은 될 듯' '잘 xx주게 생겼네' 정도를 넘어선 댓글에 저도 모르게 종인이 쥐고 있던 마우스에 힘이 꽉 들어갔다. '얜 이런 댓글을 왜 보고 있어? 변태야?' 하고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댓글 옆에 빨간 신고 버튼을 누르니 우습게도 '이미 신고 접수한 댓글입니다.'하는 알림창이 떴다. 음란한 댓글들 모두 다 이미 여주가 신고를 해놓은 모양인 듯 모두 같은 알림창이 떴다. 그제야 종인이 픽 웃으며 '아 김종인 뭐하냐!'하고 소리 지르는 여주의 목소리에 모니터를 끄고 방을 나섰다.




"여주 이번에 보니까 노란 계열도 참 잘 어울리더라. 라임? 정아가 라임 색이라던데, 맞나?"

"네! 라임 색이요! 그 원피스 예뻤죠! 저도 제일 맘에 들었어요!"

"응응. 잘 어울려서 정아랑 예쁘다고 얼마나 칭찬했는데. 어 아들 왔어? 앉아."

"넌 뭘 하길래 늦었어?"




미정에게 말하던 말투와는 확연히 틀린 퉁명스런 말투에 미정이 픽 웃으며 종인과 여주를 번갈아 살폈다. 이미 그 말투가 익숙한 종인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의자를 끌어 여주의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된장국을 한술 떠먹은 미정이 잠시 망설이는 듯 괜히 물 한 모금을 마시곤 '음… 너네…'하고 느리게 입을 뗐다.



"다시 사귈 마음은 없니?"



막 국을 뜨던 종인이 흠칫하는 것이 눈에 보였고, 여주는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어 콜록댔다. 그런 반응에 미정이 민망한 듯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주책 맞은 거 아는데, 그래도 둘이 살면 싸우기는 많이 싸워도 알콩달콩하게 잘 살 것 같은데…둘 다 지금 애인도 없고 말이야…'하고 중얼거리듯 조용히 말했다.



"아 엄…"

"내가 쟤 결혼식 사회 봐주기로 했어. 쟤랑 누가 결혼해줄지는 모르지만."



잔기침을 하면서도 막, 말을 뗀 여주의 말을 끊고 종인이 말했다. 콜록, 콜록 계속 잔기침을 하면서 여주가 종인을 흘겨보았다.




"종인이 발 냄새 많이 나서 싫어요, 저. 엄마 이해하죠? 쟤 발 냄새."

"아 이게 진짜… "

"너 발 냄새 나니? 이리 줘봐."



미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식탁 밑으로 종인의 바지 끝을 잡아당겼으나 종인이 질색을 하며 뿌리쳤다. '좀 나는 것 같기도 하고…'하는 미정의 말에 종인이 '안나!'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종인을 향해 미정이 눈을 치켜뜨곤 '이게 엄마한테…'하며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내려놓았다. 여주는 상황이 재미있는지 킥킥거리며 웃었고 종인은 미정의 눈치를 살피다 여주를 노려보았다. 여주는 '어쩌라고?'하는 눈빛으로 혓바닥을 삐죽 내밀곤 '아 진짜 간이 딱 맞네 딱 맞아. 엄마한테 시집가고 싶네! 내가.' 하는 능청을 부리며 소고기볶음을 가득 집어 입에 밀어 넣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활기차게 인사하는 여주를 향해 스텝들이 손을 흔들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등 답을 보냈다. 방송국 스텝들 사이에서, 아니 남자 스텝들 사이에서 여주의 인기는 꽤 좋았다. 싹싹한 성격에 댓글에선 '평범'이라 말했지만, 흔히 말하는 평범해 보이는데 내 주변엔 없는 그런 순수한 얼굴과 적당히 잘 빠진 몸매가 모두 다 인기의 요인이었다. 여자 스텝들 사이에선 물론 그녀를 좋게 보는 사람도 많았으나 몇몇 인물들 때문에 여주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진 못했다.


막 스튜디오를 나서던 여주가 반대로 스튜디오로 들어오던 종인과 마주쳤다. 슬쩍 눈을 돌려 다른 스텝들 눈치를 보던 여주가 '야, 끝나고 곱쏘 콜?'하고 속삭였지만 종인은 '바빠.'하고 짧게 대답하곤 '종인 선배님! 잠시만요!'하고 애타게 부르는 신입 스텝을 향해 '뭐.'하는 그 특유의 불퉁한 대답을 하며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그는 입사한 지 2년 만에 방송국 간판 뉴스 FD자리로 들어간 운도 좋고 실력도 좋은 남자였다. 미래가 창창한. 그런 종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불퉁한 표정으로 '싸가지.'하고 중얼거리며 여주가 스튜디오를 나섰다.




"김여주, 나 커피."



퇴근을 하려고 사무실로 들어오는 여주를 향해 여주에게 밀려나고 2~3%대 정오뉴스로 밀려난 전 아홉시뉴스 기상캐스터 정찬미가 거들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 스텝들 사이에서 여주의 이미지를 안좋게 만든 그 '몇몇'에 우두머리쯤 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여자이기도 했다. 고개를 숙인 채 인상을 찌푸리던 여주가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아메리카노 연하게에 덜 뜨겁게 맞으시죠?'하고 묻자 당연한 걸 뭘 묻느냐는듯 표정으로 여주를 바라보았다. 속으로 이를 으득 갈며 문을 다시 나섰다. 사실 기상캐스터는 아나운서와 달리 프리랜서에 가까워서 기수가 따로 없기 때문에 '선배'라고 말하기도 우스웠지만, 찬미는 늘 여주에게 '선배'노릇을 하고 '선배'대우를 받고 싶어 했다. 대체 근데 저 여자는 왜 맨날 이 시간에 여기 와서 있는 거야. 제 방송 녹화시간은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거칠게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막 1층 커피숍으로 내려온 여주가 막 주문을 하려다 지갑을 사무실에 두고 온 것을 알아차리곤 황급히 다시 사무실로 올라갔다. 속으로 쓰벌,쓰벌 욕이 절로 나왔다. 아, 지갑 놓고 갔다고 그러면 진짜 늦는다고 쌍욕에 멍청하다고 쌍욕을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자신에게 밀려 뒷방늙은이 신세가 되어버린 정찬미가 안쓰럽기도 해서 여주는 어깨를 으쓱하곤 사무실 문을 열었다. 멀리 정찬미의 뒤통수가 보였다. 몰래 지갑을 가지고 나가려는 여주의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누가 그랬다. 귀가 먹었어도 내 욕하는 소리는 잘 들린다고.



"국장 첩이라니까? 말이 되니? 내가 쟤보다 뭐가 못나서 밀려나? 빽 아니면 못 그러지. 안 그러니?"



여주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찬미의 반대편에 앉아있던 신입 아나운서들과 여자스텝들이 난처한 얼굴로 찬미의 뒤에 있는 여주를 바라보았다. 여주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아직 눈치 못 채고 있는 찬미의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맘 같아선 달려가 저 뒤통수에 족발당수를 달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꽤 잘 쌓아온 이미지를 한번에 날려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드디어 분위기를 눈치챈 찬미가 움찔 뒤돌아 여주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왜 이렇게 늦게 와!' 하고 소리 질렀다. 무표정으로 찬미를 바라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 씩 웃은 여주가 찬미의 곁에 앉아있던 방송일을 시작한 지 한 2개월쯤 된 라디오 기상캐스터 미연을 바라보았다.





"야, 신입!"




찬미는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여주와 제 옆에 앉은 미연을 바라보았다. 미연은 찬미가 꽤나 아끼는 '후배'였다. 물론 그것은 미연이 자신의 자리를 꿰차지 않아서기도 했고, 자신보다 못하다는 라디오국에서 기상캐스터를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연이 주변 눈치를 살피며 '네…?'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르는데 거기서 그냥 '네?' 이러고 있는 거야? 어? 빠졌구만?"



여주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미연이 찬미의 눈치를 살피다 후다닥 여주의 곁으로 다가갔다. 뛰어오는 미연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다 여주가 찬미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가서 커피 좀 사와. 내껀 아니고, 저기 찬미 '선배'꺼. 돈은 뭐… 난 맨날 내 돈 들였거든? 넌 뭐 가서 달라고 하던가."

"아…"

"아메리카노 연하게. 얼음 세 개 띄어서 두개,네개 안된다. 꼭 세개. 1층 커피숍 아니면 절대 안 드신다고 하시니 3층 커피숍 컵 들고 오면 커피 세례 맞을 각오 해야 할 거야."




한 2개월 전 첫 커피 심부름 때 찬미에게서 커피 세례를 맞았던 것을 떠올리며 여주가 웃으며 미연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뜨거운 커피가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다. 뜨겁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때 커피 세례를 맞고도 왜 저 년의 머리채를 안 잡았지. 그런 생각을 하던 여주가 아, 그래. 신입이었지. 이미지 챙기느라…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제 앞에 있는 미연 또한 신입이 아니었음 제 머리채를 잡아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억울해하지 마. 이게 바로 내리사랑이라는 거야."




여주의 말에 찬미가 기가 차다는 듯 '야!'하고 소리 질렀지만 여주는 웃으며 의자에 걸쳐둔 가디건과 가방을 챙겨 들었다. 미연은 눈치를 살피다 쭈뼛쭈뼛 사무실 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미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찬미를 보고 웃으며 여주가 차 키를 든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녀의 손가락에 걸린 차키가 짤랑거렸다.




"자, 그럼 저는 퇴근해보겠습니다! 수고들하세요!"












▼▲







집에 돌아온 여주가 켜진 센서 등 밑에서 어두컴컴한 집 안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2년 전까진 부모님과 그리고 3개월 전까진 독립해서 룸메이트와 함께 살아 혼자 살았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여주는 완벽하게 독립한 지 3개월이 된 지금까지 깜깜하게 꺼진 방이라던가, 식기건조대에 하나씩만 나와 있는 식기류들이 영 적응이 되질 않았다. 룸메이트로 같이 살던 종인과 마찬가지로 죽마고우인 미소가 얼마 전 결혼을 하게 되면서 나가게 된 것. 물론 그녀가 결혼을 한 것에 제일 축하를 하며 부케까지 받아 챙긴 것은 여주였으나 마찬가지로 가장 아쉬워했던 것 또한 여주였다.



가지런히 놓아둔 실내용 슬리퍼를 무시하고 터벅터벅 맨발로 집안으로 들어온 여주가 스텐드만을 켠 채 털썩 침대에 엎어졌다. 걸을 때마다 들렸던 딸그락거리는 가방의 체인소리마저 없어지자 방은 완전히 적막이었다. 이명처럼 들리는 냉장고 소리가 찝찝해 괜히 흡 헛기침을 하며 천장을 보고 돌아누운 여주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별안간 자신의 도발에 씩씩거리던 찬미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에. 



여주는 절대로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자존심도 강했고, 승부욕도 있었으며, 그래서 때때로 필요에 따라 잦지는 않아도 거짓말도 능숙하게 할 줄 아는 여우같은 여자였다. 이제까지 몇 개월간 찬미의 커피 심부름을 했던 건 단순히 방송국 내에서 거의 안방 기상캐스터로 활약하던 찬미의 자리를 빼앗게 된 것에 대한 미안함과 동정심 때문이었지만 기어주니 이제 아예 밟으려 드는 찬미의 태도를 더는 봐주고 싶지 않아졌다. 내가 무슨 국장 첩이야. 국장 얼굴도 딱 한 번뿐이 못 봤는데. 말이 되는 소릴 해야 말처럼 들어주지.


여주가 찬미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것도 사실 오로지 찬미와 찬미를 애정 하는 몇몇 골수팬들의 생각이었지 그저 좀 더럽긴 하지만 '신선함'이 떨어진 기상캐스터가 '신선한' 새 기상캐스터로 바뀐 것 뿐이었다. 게다가 찬미 그녀는 이미 증권가 찌라시에 '공주병에 걸린 기상캐스터 A양'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을 만큼 초심을 잃기도 했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냥 자연스런 순리대로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된 건데, 내가 미안해야 할 필요는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카락이 맞닿아 바스락거리는 이불 소리가 기분 좋았다.


스텐드의 주황빛으로 도배된 방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여주가 고픈 배를 슥슥 쓰다듬었다. 



"생리할 때 됐나… 왜 이렇게 식욕이 돋지…"



곱창에 소주 먹고 싶다. 야채 곱창. 오돌뼈랑 주먹밥도… 그런 생각을 하다 여주는 아까 매몰차게 '바빠'하고 인사도 없이 휙 스텝에게 가버린 종인이 생각나 성질이 확 돋았다. 나쁜 놈. 아무리 맨날 본다고 해도 수고했다는 말도 한마디도 없냐. 잘 가란 말이라도 하면 좀 좋아. 괜히 센치해지는 마음에 진짜로 생리 때가 다가오나 싶어 오늘이 며칠인지 알면서도 괜히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밝혔다. 화면이 밝아지기 무섭게 다시 어두워지며 전화가 걸려왔다. 종인이었다.




"양반은 못 되네… 왜!"

-전화 매너 하고는.

"뭐! 바쁘신 분이 웬일이랴~?"



한껏 비꼬는 여주의 말에 종인은 몇 초 말이 없었다. 여주가 귀에서 핸드폰을 떼 화면을 확인하곤 다시 귀에 갖다 대곤 '왜 말이 없어!'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나와.

"아니 뭐 갑자기 다짜고짜…"

-곱창에 소주.

"어?"

-먹고 싶다며.



종인의 말에 괜히 여주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종인이 전화를 멀리 뗀 듯 조금 멀리 들리는 목소리로 '누나 여기 야채 곱창이랑 후레쉬 한 병이요!'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앞에 포차로 나와. 시켜놓는다. 10분 안에 안 오면 다 먹는다 내가.

"어? 뭐? 야!! 야야야! 김종인!"

-뭐.

"오돌뼈랑 주먹밥도!"



여주의 말에 전화기 너머 종인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리다 곧 '이모 오돌뼈랑 주먹…'하는 먼 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쫑ㅋㅋ>으로 찍힌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던 여주가 튕기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디건을 벗어던지는 손길이 꽤 다급해 보이면서도 신이 나 보였다.

















제목의 도경수김민석김종인은 남자주인공 셋을 가다가순으로 나열했을 뿐 최종 주인공과는 관련이 없음을 알립니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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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신알신하구싶은데 필명이 없으셔서 못하네요ㅠㅠㅠㅠㅠㅠ 기상캐스터와 FD라니 신선하고 좋은것같아요
여주성격도 화끈하고 여우같아서 답답하지도 않고 좋은것같아요! 그그그그그리고 곱쏘랑 오돌뼈는 ..............후...... 먹고싶다

8년 전
미니스톱
이런 왜 필명이 안 올라갔죠......분명 설정했는데....감사합니다 덕분에 알았네요!! 반갑습니다 미니스톱이라고 합니다~!!!!
8년 전
독자2
흐흐 신알신하고 가겠습니다~~
8년 전
미니스톱
감사합니다~!!!♥
8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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