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그림자
세시일분
05. 강요의 이해
"ㅇㅇ씨, 저 왔어요."
준면씨의 가지런하고도 단조로운 목소리에 세훈은 고개를 들더니 나를 지긋히 째려본다.
뭐 어쩌라는건지. 나는 그런 세훈의 표정을 깔끔히 무시한채 문을 열었다. 준면씨의 뒤에서는 햇빛이 새어나오고 그것은 준면씨의 외모를 더욱더 당당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렇게 준면씨와함께 들어온 준면씨의 그림자에 갇히게 되었다.
준면씨는 방안을 쓱 훑어 보더니 이불속안에서 꼼지락대는 세훈이를 보고 시선을 거두었다. 시발. 누가봐도 오해할 상황이네.
자, 이제 가죠. 하고 준면씨를 밖으로 내보내면서 세훈에게 눈치를 주었다. 야 오세훈. 들어가라고 했잖아.
세훈이는 그것을 무시하면서 여전히 덥고 습한 이불속에 꼼지락댔다.
* * *
준면씨와 들어간 곳은 뭐랄까, 예상밖이였다.
그의 분위기와 인상으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동네 짜장면집.
내심 준면씨가 매우 비싼 정식 레스토랑에 갈까 두려워 쌈짓돈을 지갑에 구기고 온 내가 조금 우스울 지경이였다.
가만히 준면씨를 쳐다보자 준면씨가 해맑게 웃으면서 오늘은 짜장면이 땡기는 날이네요, 하고 말했다.
내가 돈이 없어 보여서 그런가. 준면씨에게 다른 곳 더 좋은데로 대접해 드리고 싶다고 이야기말하자 준면씨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저 오늘 진짜 짜장면이랑 탕수육 먹고 싶었어요."
결국 쌈짓돈을 구깃구깃 넣은 지갑을 고이 내 가방에 두고 우리는 동네 짜장면집으로 들어가서 점심을 해결하게 되었다.
내심 미안한마음에 이것저것 시키려고 하자 준면씨가 그것을 제제하며 자신은 더 먹으면 살찐다고 ㅇㅇ씨나 많이 드세요, 하고 내입을 막았다.
짜장면 두개랑 탕수육 중자로 주세요. 하고 단조로운 주문이 끝나자 주인은 어슬렁 거리며 주방에 들어가게 되었고 테이블위에는 어색한 침묵만 맴돌았다.
으, 싫다. 침묵을 깨고 먼저 감사하다고 하는게 예의인듯싶어 감, 감사합니다 라고 찐따같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저 기억안나요?"
네? 순간 준면씨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너무 당황스러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쿵,쿵, 엇박으로 마구 뛰기 시작했다.
뭐지?뭐지?뭐지?
나의 당혹스러움이 얼굴에 다 드러났는지 준면씨가 어색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게 있잖아요. 하고 머뭇거리다가 준면씨는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이 아는 사람인가? 전에도 조금 예상은 했다만 이렇게 지인에게 들키는 건가? 어쩌지? 우선 이사부터 가야하나? 왜 갑자기 나를 찾는 거지? 준면씨는 뭐지?
준면씨가 무엇을 이야기하려 입을 열었으나 갑작스럽게 미친듯이 뛰는 심장때문에 그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렇다 쳐도. 세훈이는?
이리저리 휘몰아치는 생각들에 잠식되어있는데, 준면씨가 한숨을 내쉬더니 내 손을 잡았다.
"안말해."
안말해.
준면씨와 나의 눈이 서로 맞닿으면서 부딪쳤다. 안말해. 암묵적으로 준면씨는 내가 누군지 안다는것을 알렸다.
"진정해."
진정해.
준면씨는 또박또박 한글자 한글자 짚어가며 이야기를 했다. 나는 갑작스런 눈맞춤에 놀라 탁자에 얼굴을 숙였다.
암묵적으로 준면씨는 자신이 나의 편이라는 것을 알렸다. 사실일까?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보고싶었어..?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뭐지?
고개를 들자 준면씨가 다가오는 주인을 알아채고 손을 뗐다. 아, ㅇㅇ씨. 우리가 시킨거 나왔어요. 하고 헤실 웃는다. 뭐야. 뭐냐고.
모든 것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뭐지? 그래서 준면씨는 아버지가 시켜서 나를 찾은게 아닌가? 우리 아버지랑 무슨 관계지? 나는 도망쳐야하나?
휙, 하고 고통의 잔해가 남은 골프채가 날아온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머리에 알싸하게 퍼지는 고통은 피하지 못했다.
가만히 생각에 집중하면서 깨작거리자 준면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선 먹기나해. 다른 건 우리 나중에 생각해요. 내가 다 말할게."
* * *
탕, 하고 차문을 닫는 그녀의 몸짓과 함께 어리숙한 그녀의 목소리가 차 안에 깊게 스며들었다. 안녕히 가세요.
준면은 그런 그녀를 보고 씨익 웃었다. 그녀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입의 가식적인 웃음을 거두었다.
준면은 머리를 가만히 숙이며 깍지낀 손에 가져다 대었다. 지금 이상황을 정리하자면 대충이렇다.
과거에 매우 그리워했던 그녀가 유학을 간줄알았는데 보니 어떤 이름도 모르는 달동네에서 껄렁한 양아치와 동거 중이다.
그녀는 항상 좆대가리 같은 씨발놈들을 곁에 두고 다닌다. 마음에 안들어.
매우 놀라운 매출로 승승장구를 하는 그 회사 회장의 딸이 이런 달동네에서. 준면은 어이없는 전개에 픽, 하고 조소를 흘렸다.
지금까지 찾아온 그녀가 이렇게 허무하게 달동네에 있었다니. 준면은 가만히 그녀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지금 준면소유의 엔터테인먼트의 매출을 올리려면 주식을 먼저 올려야하는데, 이 계열의 단연 최고의 그 기업의 대주주의 힘을 빌려야한다.
더군다나 지금까지의 통계를 보았을때, 그 기업의 회장만 잘 꼬시면 앞으로의 매출은 무조건 평타이상을 칠 수 있다.
그런 의미로 그녀는 매우 가치가 크다. 그 기업의 외동딸이니.
그렇게 숫자적인 가치를 머리속에서 매기다가 준면은 순간 뇌리에 스치는 과거의 기억 한편이, 그 지긋지긋하게 되풀이 되었던 그 기억에 순간 움찔거렸다.
어쩌면 준면은 이 지긋지긋한 기억을 기억해내기가 싫어 굳이 매기지 않아도 뻔히 아는 그녀의 가치를 매겼을 지도 모른다.
그 날, 내가 진실을 알았던 그 날.
* * *
"안녕? 내이름은 준면이라고 해."
엄마아빠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끌려온 준면이는 자기 앞에 있는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리저리 다니는 모임이라서 그런지 준면은 모임에 만나는 또래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같이 지내는지 알고있었다.
준면은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항상 사랑받고 인기도 많은 그런 아이였기때문에. 이렇게 퉁명스런 얼굴을 한 여자아이도 한번에 같이 사이좋게 지낼 그런 자신.
하지만 아무 미동도 안하는 여자아이의 입술은 변함없었고, 준면은 그런 여자아이에게 오기라고 해야할지, 미움이라고 해야할지.
준면은 자신을 사랑해주지않는 여자아이가 너무 야속하게 느껴졌다. 니까짓게 뭐라고 내가 이렇게 무시당해야하는거지?
그렇게 여자아이에 대한 미움이 그녀를 만날때마다 하나하나 커지고, 이제는 대놓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여자아이가 가지고 노는 인형 머리카락을 다 짤라버린다든지. 물을 다 엎질러두고 아무말안하는 여자아이에게 다 뒤집어 시킨다든지.
자신의 자존심이 마구 밟혀진게 너무나도 처량하여 그랬다. 너도 느껴봐.
그것은 관심을 바란 객기였을까 아니면 단순한 미움이였을까. 어찌되었건 상관없다. 하지만 준면이는 그런짓을 그만두었다.
여자아이가 화장실에서 자기가 한 괴롭힘으로 여자아이의 아버지에게 싸대기를 맞는걸 보았기 때문이였다.
그 아스라진 잔상은 준면의 눈을 콕콕 찔렀다. 그렇게 박힌 잔상들은 녹아내려 준면의 심장에 깊게 스며들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철없던 재벌 2세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잔상이였다. 마냥 돈 속에서 행복한 가정과 함께 자라온 준면에게는 더더욱.
그래서 그런지 준면은 자신이 한 모든 짓들에 죄책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항상 인간관계에서 갑의 입장에 서왔던 준면에게는 힘든 일이였다.
그저 자신의 지시대로 모든것이 이루어졌던 철없던 관계는 그녀와는 통하지가 않았다.
아, 아쩌지. 나는 몰랐는데. 무식이라는 변명으로 그 죄책감을 없애려 했으나 역부족이였다. 그래서 준면은 나름대로 그 죄책감을 없애려 노력을 했다.
조용히 여자아이의 곁에서 맴돌며 지켜보고 자신이 막을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막았다.
그렇게 자신의 최선을 다해 나름대로 우렁각시 노릇을 해왔다. 그러면서 그녀에 대해 자세한 것을 알게 되었다.
부적절한 기사 아저씨와 그녀의 관계, 그녀가 항상 감수해야했던 고통들, 그리고....
사실 죄책감이라는 단어가 준면에게 큰 영향을 미친것은 사실이지만, 이정도로 그 여자아이에게 헌신적으로 된것은 단지 죄책감때문은 아닐것이다.
그렇다고 이유를 물으면 준면은 그 해답을 명쾌하게 낼 자신이 없었다.
준면은 그 여자아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단 한단어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준면의 감정은 깊게 서로 엉켜있어 그것을 하나로 정의하기에는 무리였다.
하지만 그 감정은 강제적으로 식혀지게 되었다. ㅇㅇ가 유학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감정은 찝찝하게 저기 거리의 딱 달라붙은 껌딱지처럼 준면의 마음에 남아있게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