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질 3일의 결과
거실에서 몇 시간째 흘러나오는 음악의 볼륨을 낮추고 이리저리 나뒹구는 술병을 치우는 중이다. 처음 거실의 광경을 봤을 때는 술병이 너무 많아 걱정했는데
막상 치우면서 보니 병을 오픈하고 다 안 마시고 또 오픈하고 그런 병들이 많았다. 어쩐지 생각보단 안 취해 있더라. 태형이의 주량은 내가 잘 안다. 잘 마시는 척 하면서 실은 많이 못 마신다.
대학시절 나름 어리다고 건강에 자부하던 시절 나랑 한 번 같이 진탕 마셨다가 다음 날 둘 다 집에서 토하고 몸살 걸리고 난리가 났던 탓에 그 후론 태형이나 나는 절대 자기 주량을 넘게 마시지 않는다.
지나고 보니 다 추억이네. 그 땐 진짜 딱 죽고 싶을 정도로 아팠는데. 태형이의 헝클어진 머리와 손에서까지 나던 술냄새가 안 잊혀진다.
그래 태형아. 이렇게 술병만 봐도 너와의 추억들이 다 떠오르는데 어떻게 너랑 다시 안 만날 수 있겠어. 난 안돼 태형아. 친구든 뭐든 우리 추억이 기억이 너무 소중해서 너와 헤어질 수 없어.
그렇게 태형이와의 기억들을 되새기며 거실을 금세 치우곤 환기를 시키기 위해 거실 맞은편의 넓은 창을 열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눈에 비치는 도시 야경은 나름 괜찮았다.
서울에 산 지 어언 10년 가까이 되어가지만 왠지 모르게 정이 안 가는 도시였는데 지금은 나름 볼만하다. 태형이는 잠든 건지 조용하다. 창을 반쯤 닫고 살금살금 방에 가보니
역시나 불편하게 침대에 기대 잠들어 있다. 깨울까하다가 베개를 살짝 뉘어주고 침대 위에 있던 담요를 덮어주었다. 가만보니 이 담요도 내가 준거네
한 2년전? 태형이가 겨울동안 하필 야외 예능을 반고정으로 출현하게 되었는데 야외 촬영이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돈 좀 들여서 그 당시 엄청 좋은 담요로 선물한 적이 있다.
얼마나 좋아하던지 담요 공장 하나를 차릴 뻔 했다. 틈틈이 예능을 보면서 태형이가 그 담요를 두르고 있는 걸 봤는데 얼마나 뿌듯하던지.
이제 방에서 나와 치킨 샐러드를 사러 집 밖을 나갔다. 불과 한 시간전엔 덜덜 떨면서 지나친 아파트인데 지금은 한결 마음이 편하다. 아직 약간 혼란스럽긴 하지만.
혹시나 내가 착각을 하고 있는 거라면 빨리 단정지어야 한다. 누구에게도 상처 줄 순 없다. 절대 그럴 마음도 없고. 누군가가 나 때문에 힘들어 하는 거 그건 너무 괴로운 일이니까.
기다릴 태형이 생각에 서둘러 치킨 샐러드를 사고 숙취음료를 사기 위해 편의점에 들어갔다. 음료 코너에서 문득 눈이 가는 음료가 있었는데 바로 예전에 피디님이 갖다 줬던 그 음료였다.
피디님 생각에 괜히 찔려 일부러 다른 음료를 골랐다.그 순간 왜? 라는 의문이 마음속에 가득 찼다. 태형이랑 같이 있는 거 그게 왜 찔리는 일이지.
그냥 지금 내가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런 거 일거야. 그래 그런거야. 제발..
도망치듯 편의점을 나오고 서둘러 태형이의 아파트로 뛰어갔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태형이가 보고 싶었다. 빨리 먹고 집으로 가야지.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니 아직도 자고 있다.
깨울 수도 없고 어쩌나 싶어 딱 30분만 기다리자는 마음으로 거실에 나와 창을 닫고 소파에 앉았다. 뛰어오느라 지친 두다리를 뻗고 피디님께 전화를 드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냥 왠지 하면 안될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은. 집에 가서 전화 드리자. 딱 30분만 기다리는 거야. 그렇게 마음먹고 소파에 앉으니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고 잠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결국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김태형 시점
무거운 눈을 겨우 뜨니 푸르스름한 새벽 달빛이 머리맡을 비추고 있었다. 앉아서 잠든 탓일까 몸이 뻐근했다. 그러고 보니 잠드는 바람에 너랑 치킨샐러드도 못 먹고.. 뭐 이러냐 김태형.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베개와 담요로 날 덮어둔 너의 흔적에 마음이 더 크게 요동쳤다. 이 담요 내가 아직도 매일 덮고 잔다는 거 니가 아는지 모르겠네.
크게 기지개를 키고 물을 마시기 위해 방을 나갔는데 거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탄소가 불도 안 끄고 갔을 리가 없는데.. 음악도 잔잔하게 켜져 있고.
괜한 기대감으로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거실에 나가보니 꿈처럼 니가 소파에 앉아 잠들어 있었다. 잠이 덜 깬건가 싶어 급한 마음에 머리도 때려보고 팔도 꼬집어 봤지만
역시나 니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소파 밑에 앉아 널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이뻤다. 자는 모습도. 거실의 술병도 말끔히 치워져 있고 너의 묶은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안 그래도 작은 몸이 더 작아보였다.
우리 탄소 머리카락도 이쁘고 얼굴도 이쁘고 손도 이쁘고 다 이쁘네. 문득 고갤 숙이고 보니 너의 양말이 하나는 분홍색, 하나는 갈색인 걸 보고 미안해졌다. 급하게 오느라 그랬겠지.
니가 혹시 깰까봐 살며시 손을 잡았다. 손을 잡고 거실의 어두운 전등에 비친 손을 보니 손톱이 엉망이다. 물어뜯었구나 보네. 내가 예전에 고쳐줬었는데. 내 걱정 많이 했구나 우리 탄소.
탄소야 니 손도 내꺼였음 좋겠고 니 머리카락도 내꺼였으면 좋겠다. 나 그러면 정말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너에게 차마 건네주지 못한 남아 있던 진심을 니가 잠든 틈을 타 마구 내뱉었다.
어차피 못 들었겠지만. 한참 너의 손을 잡고 가만히 널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가보니 아직 따뜻한 치킨샐러드와 숙취음료가 놓여 있었다. 옆에 작은 쪽지도 함께. 니 글씨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태형아 치킨샐러드 놓고 갈게. 다음엔 니가 나 사줘야 한다? 약속한거야. 그리고 콘서트 잘 하고와. 나도 그동안 열심히 고민해 볼테니까 내 걱정 절대 하지 말고. 고마워 태형아.]
그래도 미안하다고는 안 썼네. 귀엽게도 간다더니 결국 거실에서 잠들어 있는 니 얼굴이 떠올라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치킨샐러드 너랑 아침에 먹어도 되겠지?
니가 준 숙취음료를 마시려다 왠지 아까워 그냥 다시 냉장고에 넣고 냉수를 마셨다. 벌써부터 아침에 일어나 깜짝 놀랄 니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자꾸 새어나왔다.
김탄소 이번엔 너 집에 안 보내야지. 다시 거실에 가 곤히 잠든 니 옆에 앉았다. 늦은 새벽 우리 집에 너와 단 둘이 있는 이 순간 행복하면서도 슬펐다. 니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모르겠어서.
늦은 새벽 좋아하는 여자와 단 둘이 있는 이 순간 나도 역시 남자인지라 너의 옆에 있다간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너의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 넘겨주곤 서둘러 방에 들어갔다.
니가 너무 이뻐서 좋아서. 이번 한 번만 욕심 부려도 될까 탄소야..
*다시 김탄소 시점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 서서히 눈을 떠보니 밝은 햇살에 눈이 부셨다. 찡그린 얼굴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니다. 우리집이 아니야.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설마 어제 태형이집에서 잠든 건가? 주윌 둘러보니 어제의 마지막 기억 속 거실 그대로다. 소리 없는 절망이 머릿속에서 왱왱 거렸다. 서둘러 시계를 보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오전 8시이다.
다행히 라디오 녹음은 내일이니까 적어도 오늘 출근은 안 해도 된다. 그 와중에 라디오 걱정을 하는 걸 보니 다행히 아직 정신이 나가진 않았구나 싶어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태형이는 어딨지?
태형이의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목이 잠겼는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몸도 아프고. 힘겹게 소파에서 일어나 태형이를 찾아다녔다. 그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부엌으로 가보니
어제 내가 사온 치킨샐러드를 예쁘게 접시에 옮겨 담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태형이의 뒷모습이 햇살에 비춰 밝게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만 빼면 어제와는 달리 나름 괜찮아 보였다.
“태형아...”
나의 부름에 뒤로 돌아 태형이는 날 보며 어제완 다르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놀란 나와는 다른 표정이었다. 그래 김태형 내 표정이 우습다 이거지? 얄밉네 은근.
“일어났네. 이제 먹자 어제 못 먹은 거”
“나 깨워서 집에 보내지.. 오늘 라디오 없어서 다행이긴 한데..”
“그럼 된거지 뭘. 니가 잠들어 놓고 나한테 뭐라 그러냐. 빨리 먹자”
“먹고 바로 갈꺼야”
“그럼 바로 가야지 나랑 더 있고 싶어?”
태형이의 대답에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내 앞까지 얼굴을 슥 들이밀며 더 있고 싶냐고 장난스럽게 말하는데 예전 같았으면 그냥 얼굴을 밀어버렸을 텐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얼굴이 확 빨개졌다.
재빨리 뒤로 돌아 세수 하고 오겠다고 하고 화장실로 도망가듯 달려갔다. 날 부르는 태형이의 목소릴 무시하고 화장실의 문을 잠갔다. 왜 그랬지 방금.
뭘 새삼스럽게 민낯을 한 두번 보여준 사이도 아니고 부끄러워 한거냐고 김탄소 이 구제불능아! 세수를 거칠게 하고 익숙하게 수납장 안의 수건을 꺼내 얼굴을 벅벅 닦았다.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부엌으로 슬금슬금 가니 탁자에 앉아 의자를 통통 치며 빨리 앉으라고 성화다. 의자에 앉으니 치킨 샐러드 뿐 아니라 베이컨도 있고 토스트도 있다. 나름 신경 쓴 모습에 고마웠다.
“왠일이야 요리도 하고”
“이런 건 기본이지”
“많이 컸다 김태형”
“뭐래 빨리 먹자 너 때문에 다 식었어”
“응. 자 그럼 잘 먹겠습니다!”
별 대화 없이 아침식사를 마치고 잠깐 멍하니 의자에 기대 앉아있는데 태형이가 나에게 혼잣말 하듯 말을 걸었다.
“내일 라디오 녹음 끝나고 간다”
“응 알아. 잘 다녀와 다치지 말고”
“너도 밥 좀 잘 챙겨먹고”
태형이는 그런 날 잠깐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를 치웠다. 나도 도와주곤 설거지는 내가 하겠다고 말하곤 태형이를 거실로 보냈다.
근데 태형이는 아까부터 다시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날 쳐다보고 있다. 부담스럽게시리 가라니까. 등에 꽂히는 시선이 간지러웠지만 애써 무시하고 설거지를 끝냈다.
앞치마를 벗고 뒤를 돌아 거실로 가려는데 태형이가 작게 말했다. 듣지 말걸. 태형이의 낮은 목소리에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마다 이랬으면 좋겠다”
못 들은 척하고 빠른 걸음으로 거실로 가 어제 챙겨온 지갑과 휴대폰을 챙겨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태형이가 데려다준다고 했지만 극구 사양하고 아파트를 빠져 나왔다. 어제와는 다른 느낌의 공기.
편안하면서도 불안한 이 느낌. 택시를 잡아 편의점에 들러 빵과 간식을 잔뜩 사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파트에 들어서자 익숙한 한 형체가 보였다. 햇살이 강렬한 탓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피디님이란걸 단숨에 알아채고 아는 체를 할까말까 고민에 빠졌다. 어제 일이 너무 미안해 어떤 식으로 사과를 해야할지 주저하고 있는데 결국 피디님이 날 보고 먼저 다가왔다.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태형이집에서 자고 온 일이. 물론 남녀 사이에 일어날 법한 일은 없었지만 나나 피디님이나 태형이나 마음이 싱숭생숭한 상황이니까.
피디님의 얼굴은 하룻밤 새에 많이 늙어있었다. 나 때문이겠지. 미안한 마음에 아무 말도 먼저 건낼 순 없었다.
“어디 갔다 와요?”
역시나 우려했던 질문이 내 귀에 들어왔다.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어제 핸드폰도 확인 안하고 연락도 안했고 의도가 어찌되었든 태형이집에서 자고 왔으니까.
나 자신이 이렇게까지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는데.. 결국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는데 피디님이 작은 실소를 지었다. 불안한 마음에 고갤 들어 피디님의 얼굴을 보았다.
피디님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내가 어제오늘 탄소씨 연락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죠
걱정되서 탄소씨 집 앞에까지 몇 번이나 왔다갔다 했는데
혼자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연락도 안하고 기다렸는데“
“......미안해요”
“어디 갔다 왔어요? 말 안해주면 나 진짜 화낼겁니다”
“...태형이집이요”
결국 작은 목소리로 대답해버렸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다. 삼류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삼각관계. 내 구차한 모습에 저절로 부끄러워 고개가 숙여졌다. 죄를 지은 듯 마음이 무거웠다.
어쩌면 죄 지은 게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피디님 앞에서 지금 난 점하나 없이 순수한 마음이 아냐. 결국 흔들려버렸으니까.
피디님은 그런 날두고 먼저 아파트로 들어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잡으려고 했지만 선뜻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멍청하게 아파트 앞에 서서 피디님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고스란히 눈 안에 담았고
결국 눈에는 찬 눈물이 고였다. 피디님 나도 날 모르겠어요. 태형아 어떡하지. 너가 남겨둔 3일의 결과가 지옥이 될 거 같아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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