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st Stars
얼마나 잤을까 잠에서 깼지만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겨우 눈을 뜨고 거의 기어가다시피 물을 마시러 주방으로 향했다. 고작 술 몇 잔 마셨다고 이렇게 숙취가 심하다니.. 이건 다 석진선배 때문이야! 괜히 선배에게 화풀이를 하는 나였다. 그런다고 바뀌는 건 없지만. 우습네. 베란다로 들어오는 햇살이 밝았다. 시간.. 세상에 3시? 오후 3시? 열두시간을 꼬박 잤단 말이야? 나도 참 대단하다.
허무한 웃음이 나왔다. 세수를 하려고 거울을 보니 눈이 팅팅 부었다. 이것도 다 선배 때문이야! 팅팅 부은 눈을 손으로 문질러봤지만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다.
피디님께서 괜히 묻고 그러진 않겠지? 제발 모른 척 해주세요 피디님.
그렇게 허둥지둥 5시에 있는 회의를 위해서 집에서 나왔다. 현관문을 잠그는데 뭔가가 툭하고 발에 차였다. 뭔가 싶어서 보니까 숙취음료수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연한 보리차 색깔의 숙취음료를 들어서보니 페트병에 글씨가 삐뚤삐뚤하게 적혀 있었다. 읽어보니.. 회의에 늦겠다는 걱정을 잊고 귀여워서 웃어버렸다.
-우리 작가 하도 어지러워 하길래.. 산 건 아니고 오다 주웠소-
오다 주워? 정말이지 말 하는 거 하곤 유치하기 짝이 없는데 그래도 귀엽다. 페트병에 겨우겨우 글씨를 써 내려갔을 피디님 모습을 상상하니 정말이지 귀엽다.
맞다. 오늘 비 온다고 한 거 같은데 우산은 챙겨가셨나 모르겠네. 나도 모르게 작은 우산 하나를 더 챙겨 내 노트북 가방에 넣었다. 절대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고! 고마워서 그런거다!
아차 빨라 가자 이러다 늦겠어
회사 바로 앞에 큰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오늘 따라 신호가 길다. 이러다 회의 늦으면 어떡하지? 그래도 기분이 좋은 걸 감출 순 없었다.
그렇게 바보같이 헤실헤실 웃고 있는데 빗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이제 비 오네. 서둘러 우산을 피려고 하는데 시선을 돌리다 보니 맞은편에 서있는 낯익은 누군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많은 인파 속에서도 정말 영화처럼 피디님만 뚜렷하게 보였다.
....곧 회의 시작인데 어딜 가시는 거지? 피디님을 보고 어리둥절한 날 깨우는 진동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우리 작가 비 오는데 하도 안 오길래 마중 나왔어요”
“뭐하러 그래요 저 우산 있어요”
피디님의 다정한 목소리에 괜히 부끄러워져 말투가 틱틱거렸다. 쑥스러움에 차마 피디님 우산도 챙겨왔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비 오는 횡단보도 맞은 편 피디님은 뭐랄까..
그냥 멋졌다. 참 별거 아닌데 누군가가 날 생각해 줬다는 게 그 사실이 너무 고마웠다.
“내가 우리 작가 걱정돼서 마중까지 나왔는데 그러기에요?”
“아뇨 그런게 아니라.. 아 피디님 음료수 잘 마셨어요 고마워요”
“아 그거? 별거 아니에요..”
말끝을 흐리는 피디님의 목소리에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피디님의 쑥스러운 표정이 바로 내 눈 앞에 보이는 듯 또렷했다. 다 큰 어른보고 자꾸 귀엽다 귀엽다 하면 실례인데..
진짜 피디님 왜 그렇게 귀엽나요.
“암튼 나 여기 서있을 테니까 빨리 뛰어와요”
“알았어요”
신호등의 불이 빨간색에서 초록색을 바뀌고 수많은 사람들 속을 열심히 가로질러 피디님 앞에 다다랐다. 횡단보도가 워낙 크고 길어서 그런지 잠깐 뛰었는데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상하네.
“탄소씨 잘 뛰네요”
“저 한다..면 다.. 자..잘해요!”
아이고 숨찬다. 그런 나의 어깨를 툭 치며 피디님은 말했다.
“요 앞에 내가 자주 가는 찻집 있는데 거기서 미팅하죠”
“둘이서요?”
“어? 못 들었어요? 정국씨는 좀 늦을 거 같다고 오늘은 회의 둘이서 하라고 하던데”
“아, 정말요? 그럼 가요”
그렇게 나란히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데 피디님의 옆모습에 괜히 마음이 설레였다. 분명 첫미팅은 지난주에 했는데 피디님과 알게 된지는 엄청 오래된 것 같다.
고작 일주일 조금 넘게 본 사인데 그냥 좋았다. 만나면 만나서 좋고 전화를 하면 목소릴 들어서 좋고 걸을 때 아무 말 없이 걷는 모습도 좋다.
근데 이런 마음이 커지면 내가 힘들어질 걸 알기에 나 스스로 피디님 모르게 선을 그어버렸다. 사실 석진선배같은 일이 다신 반복되지 않게 난 늘 마음을 누군가에게 깊이 주지 않았다.
근데 이상하게 피디님은 다르다. 그 때의 두근거림이 찾아오는 것 같아 기대되면서도 두렵다. 배신당할까봐. 나도 모르는 새 피디님과 멀어질까봐.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말 힘들어질 것 같아서.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피디님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피디님 얼굴을 슬쩍 슬쩍 훔쳐보다가 들켜버렸다. 피디님과 눈이 마주쳤다. 일기장을 들킨 사춘기 아이처럼 얼굴이 새빨개졌다. 비밀을 들킨 기분에 손에 땀이 나려했다.
“뭐야 수상해 탄소씨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 생각 안 했어요! 저..정말로!”
나의 신통찮은 대답에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산을 약간 뒤로 젖히고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피디님 때문에 우산을 떨어트릴 뻔 했다.
가까운 피디님 얼굴의 눈빛 안에는 정말 사심 하나 없는 장난스러운 느낌만 있었다. 그걸 알게 된 내가 미웠다. 뭘 기대한거야
“걸으면서 야한 생각하는 거에요?”
“아..아니거든요! 내가 언제 야한 생각을 했다고..”
“아님 말고 왜 화를 내실까”
“....빨리 들어가요 비 많이 와요”
“같이 가요 화 내지말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찻집에 도착했다. 찻집은 길에서 흔하게 보는 카페들과는 다른 매력을 가득 담고 있었다. 메뉴판부터 탁자 하나하나가 뭐랄까.. 적당히 예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그런 느낌이었다. 카페라는 말보단 찻집이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그런 곳이었다. 방송국 가까이 이런 곳이 있었다니.
피디님은 약간 젖은 머리를 털고 익숙한 듯 창가에 앉았다. 나도 쫄래쫄래 따라가 앉았다.
“머리 젖었네. 뭐 마실래요?”
“저는 유자차..”
“그럼 나도 같은 걸로”
“근데 피디님 이런 곳은 어쩌다가 알게 된 거에요?”
“여기 좋죠? 갓 입사했을 때 선배 작가랑 회의 할 때 자주 왔어요”
“그랬구나”
“여기 음악들도 좋아요 신청곡도 틀어주고”
“정말요? 신기하다”
“신청하고 싶으면 저기 가서 말하면 되는데 내가 말해줄까요?”
“우와! 그럼 저는.. 흠.. lost star"
"아 그 영화 봤구나. 알았어요“
“근데 나 아까 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뭔데요?”
“눈이 왜 그렇게 부었어요..?”
결국 들켰네. 피디님만큼은 모르길 바랐는데. 딱히 생각나는 변명이 없어 당황했다. 어쩌지
“술 먹고 자면 원래 얼굴이 좀 부어요! 피곤하기도 하고..”
“그래요?”
피디님이 노래를 신청 해주고 몇 분 후 음악이 나왔다. 잔잔한 기분에 비 오는 소리가 어우러져 더 좋았다. 그렇게 피디님과 이런저런 회의를 하며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회의말고도 다른 잡담도 나눴지만. 피디님과 가까워지는 이 시간이 좋으면서도 걱정되었다. 이렇게까지 가까워질 줄이야 상상도 못했는데..
그렇게 소소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방송국으로 돌아갔다. 7층 휴게실에 슬쩍 가보니 아직 정국이는 안 온거 같았다.
피디님은 방송 준비때문에 스튜디오로 가고 나는 원고나 한번 더 훑어보기 위해 작가실의 내 자리로 갔다. 내 책상을 보면 입사하던 첫 날이 생각난다.
좁지만 나만의 공간이 직장에 생겼다는 자체가 감동이었다. 책꽂이도 이쁜 걸로 하나 장만하고 벼르고 있던 스탠드도 하나 사고. 아직 새 거 냄새가 나네 좋다.
피디님과 새 책상으로 인해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니 작은 쪽지가 보였다. 누구지? 정국인가? 아니다.. 정국이가 아니다..
[탄소야 나 석진이야. 오랜만이다. 그 날 나 못 알아 봤었지? 하긴 몇 년만에 만나는 거라 기억 못 했을 수도 있지.
암튼 그냥 반갑고 잘 지냈나 궁금해서. 같은 방송국 작가라니 정말 반갑다. 시간 되면 같이 커피라도 한 잔하자.]
노란 포스트잇에는 석진 선배의 글씨가 정갈하게 적혀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쪽지에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바보같이 선배의 글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옛날 딱 한번 봤었는데도 기억하고 있었다. 병신같이. 당황스러운 감정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설마 내가 아직도 선배를 좋아하는 걸까..
그렇게 허무하게 단 칼에 잘려버린 사랑이 다시 꿈틀거리는 거면 어떡하지. 확실히 그 때 고백을 했어야 했던 걸까 결말이 아직 나지 않은 탓일까. 미련이었으면 좋겠다 사랑이 아니라.
원고 다시 보려고 했는데 망했어. 근데 그런 선배가 밉지만은 않았다. 모르겠어 그래서 짜증나.. 무엇보다 선배가 아직도 날 기억하고 있다는 게 놀랍고 한편으로는 싫으면서도.. 내심 좋았다.
맞아 엄밀히 얘기하자면 선배가 잘못한 건 없다. 단지 고백을 하기 위해 불러냈는데 그곳에서 키스하는 걸 봤고. 선배는 내가 선배를 좋아했다는 걸 몰랐으니까.
아냐 왜 내가 선배 편을 들고 있냐고.. 김탄소 미쳤지 진짜
결국 엎드려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며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는데 누군가가 날 톡톡 건드렸다.
“김탄소 고개 들어봐”
태형이? 태형이가 이 시간에 작가실에 왜? 그건 그렇다치고 태형아 너가 작가실에 이렇게 맘대로 오면 어떡하니
"......태형이? 니가 왜.."
"그냥 빨리 나와 안그러면 나 큰소리로 니 이름 부른다?"
"뭐야 갑자기.."
태형이를 보는데 괜히 눈물이 더 나려고 했다. 이상하게 태형이 앞에선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다.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기분이다. 근데 그래도 태형이가 좋다.
내가 유일하게 나여도 되는 사람이니까.
내 손을 잡아 이끄는 힘에 결국 작가실 밖으로 끌려나갔다. 태형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내가 우는 걸 알아챈거겠지..
결국 7층 비상계단으로 끌려간 나는 태형이를 퉁퉁 부은 눈으로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왜 울고 있어.."
"몰라"
"....그 사람 때문이야?"
"아냐 정말로 아닌ㄷ.."
"귀신을 속여라 김탄소
내가 아무리 눈치 없어도 넌 내가 다 아는데"
"정말 아냐 정말로.."
태형이의 눈도 못 마주치고 열심히 거짓말 중이다. 이런 건 왠지 들키기 삻다. 너무 쪽팔리잖아.. 그 때 비상계단의 문이 열리고
선배가 들어왔다. 결국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망했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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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진 암호닉 꼭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