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좀 일어나봐.”
동혁은 난처한 표정으로 앞에 널브러진 여자의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그녀는 잠시 뒤척이더니, 다시 테이블 위에 팔을 뻗고 고개를 늘어트렸다. 동혁은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어지러이 흩어진 흑갈색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그녀의 볼을 덮었다. 머리카락 밑에서는 살짝 벌어진 입술로 색색 숨이 들락거렸고, 동혁은 애써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피했다.
“아, 미치겠네.”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길래 계속 칵테일을 주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다행히 주사를 부리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그대로 푹 엎어져 얌전히 잠이 든 그녀의 모습에 동혁은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가 술에 취해 정신이 흐려질 무렵, 동혁은 그제야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제는 거의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익숙하게 손가락을 놀려 메일을 확인한 동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또 괜히 자신을 괴롭힌 것이었다. AFT 요원들이 ‘바벨탑의 설계자’들의 정체를 모를 리는 없었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정보망이 있었고, 타이타닉의 웬만한 탑승객의 정보를 꿰고 있을 것이었다. 한국의 정보요원 역시 AFT의 정보 아래 있을 것이 당연했다.
그와 동시에, 동혁은 타이타닉에 탑승한 AFT의 모든 조직원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바벨탑의 설계자’에서 어쩌면 한빈보다도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를 지휘하는 것은 한빈이었지만, 거의 모든 정보는 동혁의 손에서 얻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크 에반스가 클리퍼드 챈스 로펌 소속의 기업 변호사가 아닌, AFT의 말단 요원이었다는 것을, 동혁은 애초에 타이타닉에 탑승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네가 괜한 짓 했네- 동혁은 작게 속삭이며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밤 열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늦은 밤, 바에는 술을 찾는 손님이 점차 늘었고, 그녀 홀로 앉았던 바 테이블에도 사람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이미 깊게 잠들어버린 그녀를 언제까지고 데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점점 빗발치는 주문에 동혁은 마음이 급해졌다.
형, 여기 바에 와서 막내 좀 데려가요. 동혁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손끝으로 몇 번 두드렸다.
바쁜 한빈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조금 미안했지만, 지금으로써는 가장 적격인 사람이었다. 준회가 지금쯤이면 그녀를 찾아 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겠지만, 내일 아침에 그녀가 눈을 떴을 때 후폭풍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멤버들 중 가장 방탕한 삶을 즐기는 지원은 의외로 세심했고, 믿음직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그녀와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는. 동혁은 한빈에게 연락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빈은 바에 발을 들였다. 밀려오는 주문을 받으면서도 바 입구를 계속 눈짓하던 동혁은 한빈의 실루엣에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빈은 무표정하게 테이블 앞에 서서 동혁과 테이블에 고개를 묻고 잠든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빈이 동혁에게 가까이 한 발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구준회는 어디 가고, 왜 나 불렀냐.”
“형도 알잖아요. 준회가 조용히 객실에만 있으라고 했는데 나와서 에반스 만나러 간 거.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애, 혼내면 안 되니까요.”
한빈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마셨어?”
“조금.”
“너는 얘 술 마시는 거 말리지도 못하냐.”
한빈의 타박에 동혁이 웃으며 대꾸했다.
“예쁘잖아요.”
한빈은 동혁을 곁눈질로 흘겼다. 눈을 살살 피하며 미소를 숨기지 않는 동혁에 한빈마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임무 수행하러 와서 술 퍼먹고 쓰러지는 게 뭐가 예쁘다고. 한빈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미동도 없었다. 더 세게 흔들었다. 동혁이 한빈의 팔을 잡았다. 한빈은 후, 숨을 내쉬더니 늘어진 그녀의 팔을 제 어깨에 올렸다. 그녀를 업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생각보다도 훨씬 가붓하게 업혀온 그녀에 한빈은 동혁과 눈을 마주쳤다. 한빈이 입을 여는데, 동혁이 재빨리 선수를 쳤다.
“형이 많이 먹여요.”
한빈은 못 말리겠다는 웃음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내젓고는 그녀를 업은 채 출입문을 향했다. 몇 발짝도 가지 않았을 때, 한빈은 다시 뒤를 돌아 동혁을 보고는 말했다.
“보고할 거 재깍재깍 해. 여기에서는 네가 주축이야.”
“알겠어요, 형.”
담담하게 대답하는 동혁에 한빈은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발을 떼었다.
한빈의 목덜미에 자꾸 와 닿는 숨소리가 신경 쓰였다. 업힌 자세가 불편할 텐데도 숨소리를 내뿜으며 새근새근 잘도 자는 그녀에 한빈은 입 안쪽을 깨물며 흔들림 없는 자세로 묵묵히 발을 옮겼다. 객실 앞에 도착하자 한빈은 비밀번호를 눌렀다. 1022. 문이 열렸다.
1인용 객실에는 침대가 하나뿐이었다. 한빈은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남색 원피스 자락이 부채처럼 펼쳐졌다. 발을 꽉 죄는 하이힐을 신고, 원피스까지 입고 바에서 객실까지 꽤 먼 거리를 업혀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미동도 없이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하이힐이 신겨진 발에 한빈은 눈을 찌푸렸다. 옷도 잠을 자기에는 불편하기 턱없는 차림이었다. 한빈은 괜한 원피스의 흰색 카라만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었다. 그녀가 입고 잘 마땅한 옷도 없었고,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옷을 갈아 입힐 자신은 없었다. 마침내 한빈은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을 감싼 구두에 손을 가져갔다. 까만 스트랩이 발에서 벗겨져 나갔다. 침대 옆으로 살짝 삐져나와 대롱거리는 발을 침대 위에 올려주고, 남색 원피스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한빈은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마크 에반스,
여기까지 내용을 입력한 한빈은 잠깐 손을 멈췄다.
에반스가 AFT의 요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동혁이 넘긴 정보에는 배에 탑승한 AFT 요원의 신상이 빼곡히 나열되어 있었다. AFT의 끄나풀에 불과한 에반스는 진작에 타이타닉에 탑승하여 ‘아시아 국가 소속 정보요원’과의 컨택을 맡았던 것이었다. 수장은 미국 대통령, 영국의 여왕과 같은 거물들과 거래를 성사할 예정이었고, 한국 따위의 정보요원에는 관심조차 없을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AFT의 수장은 ‘바벨탑의 설계자’의 정체를 몰랐다.
굳이 에반스를 죽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멤버들이 눈치챈 이상 사살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바벨탑의 설계자’ 단독 작전. 작전명 타이타닉.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멤버들의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구준회의 죄책감을 덜어주고 싶기에 최소의 명령을 내렸지만, 이렇게 된 이상 에반스의 사살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사살하라. 바벨탑의 주인.
한빈은 메일을 전송한 뒤 손을 내렸다.
-
찌뿌듯한 몸을 애써 일으켰다. 불편한 자세로 잠을 잤나, 몸 구석구석이 쑤셨다. 어제 에반스를 만나고 충격에 무작정 김동혁을 찾아가 나와 같이 있어 달라며 찡찡거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미친, 생각해보니까 일해야 하는 애한테 민폐 쩔었네. 침몰을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 잘한다, 진짜. 미쳤구나, 내가.
침대 아래에는 어제 신었던 구두와 실내용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나는 어제 입었던 남색 원피스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불편해 죽겠네, 옷도 못 갈아입고 잠들었다니. 잠은 또 어떻게 잤던 건지, 옷이 잔뜩 구겨진 상태였다. 그나저나 여기 어디지. 나와 구준회가 쓰는 방은 아니었다. 다급히 주위를 훑는데, 어디선가 본듯한 검은 캐리어가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어 정리하며 일단 닫힌 문을 열고 나왔다. 술 마시다가 잠들었던 것 같은데, 동혁이가 데려왔겠지, 뭐.
대충 슬리퍼를 걸쳐 신고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졸린 눈으로 거실로 나오는데, 소파를 보자마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거실에는 한빈 오빠가 앉아 있었다. 몸이 순식간에 굳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손은 어설픈 위치에서 멈췄고, 실내용 슬리퍼를 헐렁하게 걸친 발도 굳었다.
이제 죽었다. 나는 재빨리 두 손을 모아 맞잡고, 허리를 쭉 폈다. 차렷 자세로 굳은 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오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소름 끼치도록 무표정했다. 그래, 이게 김한빈이었다. 숙소에서 다정하게 해장국을 끓여준 것은 몸에 밴 매너에 불과했고, 출항 첫날, 바에서 능글맞게 추파를 던졌던 것은 연기에 불과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리더, 그것이 김한빈이었다. 지금 그가 나의 뺨을 때린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함부로 했으며, AFT에게 우리의 정체를 들통 나게 한 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감정이 하나도 드러나지 않은 얼굴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한빈 오빠가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지금 이게 장난으로 보여?”
목소리가 높아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단조로울 정도로 일정한 목소리였다. 소리가 커지지도 않았다.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톤을 유지했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허공을 보며 덤덤하게 입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슬리퍼 끝자락만 쳐다보았다.
“탑승객은 이천 명이 넘는다. 심각성을 모르겠어?”
오빠는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작전이나 제대로 수행해.”
한빈 오빠에게 혼난 횟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만큼 그의 명령은 불가침의 영역이었고, 나는 언제나 그에 맞춰서만 움직여왔다. 냉담한 명령, 수행해온 작전에 대한 비판은 줄기차게 들어왔지만, 제대로 혼난 기억은 적었다.
“죄송합니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눈에 힘을 주고, 입술만 깨물어대며 꾹 참았다. 나는 몸을 돌려 현관을 향했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오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발을 멈췄다.
“밀실의 저격수에게 사살 명령을 내렸다.”
애써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어디 갔다가 이제 오냐?”
구준회는 소파에 앉아 총을 닦고 있었다. 그에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주춤주춤 들어가 그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권총이 아니라 저격용 소총이었다.
“구두는 어디에 버려두고, 웬 슬리퍼?”
발을 내려다보았다. 한빈 오빠의 객실에서 슬리퍼를 그대로 신고 온 것이었다. 정신이 덜 들었나, 그제야 구두를 오빠의 침대 옆에 버려두고 온 것이 떠올랐다. 아, 다시 가서 받아와야 하나, 무서운데.
“한빈이 형이랑 있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준회는 수건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있는 윤활유 병을 집어 들었다. 그가 손을 기울이자 좁은 입구를 통해 윤활유가 흘러나왔고, 소총의 이음매를 적셨다. 손가락의 모양을 그대로 유지한 채, 구준회가 고개만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눈물이나 닦아.”
황급히 뺨을 훔쳤다. 덜 마른 눈물이 찝찝하게 손등에 감겼다.
“혼나서 운 거 아니야.”
억지로 변명을 끄집어냈다. 맞는 말이었다. 혼날 때, 눈물은 참을 수 있었다. 내가 참지 못한 것은 나 때문에, 구준회의 임무가 늘어났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한 명 죽이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나 때문에 그는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또다시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나는 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눈물을 짜내며 힘겹게 숨을 쉬느라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힘없이 무너졌다.
“나 때문에, 괜, 히, 명령, 내려오고, 너는,”
“많이 컸네, 우리 막내.”
구준회가 웃으며 내 말을 끊었다. 그는 총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멀찍이 떨어져 앉은 나를 향해 옆으로 움직였다. 내 바로 옆, 거의 붙어있다 싶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온 그에 나는 호흡을 잠시 멈췄다.
“언제부터 그렇게 오빠 생각해줬다고, 응?”
“……원래 네 걱정 많이 해줬었는데.”
“네가 나 걱정한다는 것만으로도 좋다. 걱정하지 마, 괜찮으니까.”
그는 내 쪽을 살짝 곁눈질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의 총을 잡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방아쇠와 개머리판을 훑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 구석에 두었던 골프가방에 총을 집어넣었다. 세로로 긴 총은 골프채를 넣어두는 가방에 쏙 들어갔다. 그 누구도 골프가방에 저격용 총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었다.
“갔다 올게.”
구준회는 골프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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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맥심화이트골드예요. 글 내용에는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약간 내용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서 부득이하게 글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덧붙이려고 해요.
일단! 여주때문에 에반스가 '바벨탑의 설계자'가 한국 정보요원이란 걸 눈치챈 건 아닙니당 AFT에서도 정보가 있고.. 그러기 때문에 애초에 알고 있었어요 여주 뿐만 아니라 한빈이 지원이 동혁이 준회가 정보요원이란건 에반스가 진작에 알고있었답니다!
물론 한빈이랑 동혁이는 에반스가 AFT라는것도 알고 있었구요 에반스는 그냥 일개 요원이라 정보가 접근이 어렵지 않았지만 수장은 접근이 어려워요 그래서 에반스를 알지만 수장은 모르는거구요
수장은 '바벨탑의 설계자'나 뭐 한국 정보요원이나.. 다 몰라요 미국 대통령이니 그런 귀빈이나 신경쓰지 한국 정보요원 나부랭이는 대테러단체 수장이 신경쓸 급이 아닙니다ㅋㅋㅋㅋ 그래서 하위 요원인 에반스가 한국 정보요원을 밑에서 케어해주는? 걸 AFT에서 맡은거구요
여주때문에 들킨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빈이가 여주를 혼낸 이유는 뭐 간단해요 명령하지 않은 일을 했기 때문에! 스케일이 큰 작전인만큼 팀으로 움직이는게 중요한데 거기서 벗어난 행동을 했기 때문이예요
이해가 조금 어려우셨나요ㅠㅠ 제가 더 알아듣기 쉽게 썼어야 하는건데 망할 글실력...! 추가 설명으로 조금 더 잘 이해가 되셨길 바라요!
그럼 설명을 덧붙여야만 알아들을수 있는 못난 글을 쓴 저는 이만 총총.
독자님들 사랑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