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라고 불러봐.”
이 새끼는 왜 또 지랄일까.
“싫어. 항구 도착한 다음부터.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덜 됐어.”
단호한 대답에 구준회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렇게 오빠 소리가 듣고 싶어? 넌지시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직은 안 돼, 내가 듣기에도 얄미운 어투로 대꾸하고 재빨리 뛰어 공항 밖으로 나갔다.
한빈 오빠는 모든 수속과 비자 문제를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그가 세워놓은 계획상 우리 멤버들은 나와 구준회를 제외하고는 배에서 서로 모르는 척을 해야 했다. 오빠가 공항에서 수속과 비자 문제를 마무리 짓는 사이에 나는 구준회와 함께, 나머지 멤버들은 각각 따로따로 항구로 가 타이타닉에 탑승하면 되는 것이었다.
뛰쳐나온 공항 밖 하늘은 맑았다. 영국은 적지 않게 왕래하던 나라 중 하나였다. 그 잦은 방문을 통해 내 기억에 남은 영국은 우중충한 하늘과 비뿐이었다. 이렇게 맑은 날씨의 영국을 마주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가만히 서서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찌푸리고 있자니 뒤따라온 구준회가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어차피 앞으로 이 주 동안은 그렇게 불러야 할 텐데.”
그의 큰 손이 내 정수리를 꾹 눌렀다. 새끼야 키 작아져! 소리치며 머리를 뒤로 살짝 빼는데 그의 손이 그대로 내 머리를 따라왔다. 아으, 진짜! 고개를 들어 구준회를 올려다보았더니 그는 씩 웃고는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택시 타자.”
공항 앞에는 탑승객을 기다리는 택시가 바글거렸다. 가장 가까이 있는 택시의 문을 열고 들어가 좌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곧이어 구준회가 내 옆에 앉고는 택시 문을 쾅 닫으며 목적지를 말했다.
“Southampton, please. (사우스햄프턴으로 가 주세요)”
“Where did you learn that accent? (그 억양은 어디서 배운 겁니까?)”
거울에 비친 택시기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동양인이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것도 놀라울 텐데, 구준회는 심지어 완벽한 영국식 억양으로 말한 것이었다.
갖은 외국어를 배우면서도 가장 혹독하고도 고달픈 훈련이 이루어진 것은 단연 영어였다. 단순히 발음을 배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영국식 억양과 미국식 억양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만 했다. 외국의 상류층 인사를 만날 때, 영국식 영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무시당하기에 십상이었다. 평소 우리는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다가도 주요 인사와 마주할 때는 영국식 억양을 사용해왔다.
“We grew up in London. (런던에서 자랐어요.)”
스파이 짓 한다고 영국식 영어, 미국식 영어, 따로 배웠고요, 여기 영국에 왔으니까 영국 억양으로 말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영국에서 자랐다는 핑계면 되겠지, 하는 마음에 구준회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내가 미리 대답해버렸다. 택시기사는 아직 의문이 풀리지 않은 듯싶었고, 그는 질문을 이었다.
“그래서, 사우스햄프턴은 왜 가는 거요?”
타이타닉을 타러 가요, 말해도 될까, 싶어 구준회를 쳐다보았다. 나를 마주 본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턱으로 기사 아저씨를 가리키자 구준회가 입을 열었다.
“타이타닉 타러 가는 겁니다.”
“신혼여행?”
“아-“
아니요! 저희 남매예요- 말하려던 내 입에 구준회의 손이 올라왔다. 아, 씨발! 신혼여행은 무슨 쟤랑 신혼여행. 읍읍거리며 몸을 비트는데 구준회는 쉿, 하라며 제 입술에 반대쪽 손을 올렸다. 완강한 그의 손에 이내 포기하고 몸을 축 늘어트리니 내 볼을 톡톡 치고 손을 내렸다.
“네, 신혼여행이요.”
“아직 어려 보이는데, 좋은 곳으로 가는구먼.”
동양인의 흔치 않은 완벽한 영국 억양에, 타이타닉을 타고 신혼여행을 간다면 말은 다 한 것이었다. 아주 잘 교육받은 어디 아시아의 상류층쯤 되겠지, 하고 기사 아저씨는 결론지은 듯싶었다. 의문이 모두 풀린 듯, 그는 이제 더는 묻지 않고 운전을 계속했다.
나는 한숨을 쉬고 아저씨의 눈치를 살피다 한국어로 구준회에게 말했다.
“신혼여행은 무슨 신혼여행이야.”
나도 모르게 입을 삐죽이고 있었나 보다. 구준회는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집어넣어, 말했다. 고개를 도리질 치며 상체를 뒤로 빼자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냥 기분 한 번 내 보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 둘이 무슨 신혼여행이냐?”
“그렇게 싫어?”
“어! 완전 싫어!“
“너무 그러지 마라, 오빠 상처받아.”
완전 싫다는 내 말에 구준회는 잠시 상처받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으며 대꾸했다. 아, 오빠래, 시발. 아직도 농담할 정신이 남았구나, 싶어 그냥 나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대박.”
항구에 도착한 나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크다, 화려하다, 엄청난 호화 유람선이었다. 말만 무성했던 타이타닉은 생각보다도 훨씬 웅장했다. 햇살을 강하게 받은 검은 선체가 유려한 자태를 뽐내며 항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작전 수행,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었다. 야심 차게 기획한 제 2의 타이타닉, 이 호화 유람선에서 바벨탑의 설계자들은 거짓 웃음을 흘리며 AFT의 수장을 찾아내야만 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엄청나게 중요한 미션을 앞둔 긴장감이 내 몸을 엄습했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눈앞의 배를 두고 설렘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타이타닉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캐리어 바퀴가 나무판자로 된 바닥에 긁히며 드르륵 소리를 냈다. 출항 삼 일 전이라 그런지, 항구는 아직 한산했다. 한적한 항구 중심에 정갈하게 정박한 배는 출입 통로조차 드리우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 탑승할래? 아니면 주위 호텔에 있다가 출항 날 아침에 탑승해도 되고.”
“지금 탈 수 있어? 입구도 아직 안 열었는데…….”
“한빈이 형이 다 준비해놨겠지, 이미 국빈급 탑승객들은 타 있을걸.”
“우리도 국빈급이야?”
눈을 크게 뜨며 반문하자 구준회는 짧게 미소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국가 최고급 스파이의 지위는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미션을 위해 우리는 재벌 가문의 아들, 딸을 연기해야 했고, 그 역시 출항 전인 배에 탑승할 만큼의 권력이 있는 역할이었다.
구준회는 배 앞에 서 있던 선원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가 싶더니, 구준회가 수트 안주머니에서 위조 명함을 꺼내 건네주자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배 허리에서 통로가 천천히 내려왔다. 배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소음조차 없었다. 깔끔한 검은색 페인트로 도색된 계단이 쿵, 하는 짧은 진동과 함께 항구에 드리워졌다.
“올라가자.”
구준회는 나를 향해 손짓했고, 나는 앞에 세워둔 캐리어의 손잡이를 다시 붙잡고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정식 출입구로 만들어둔 게 아니고 직원과 관계자들만이 이용하는 곳인 터라 계단은 폭이 좁았다.
“캐리어 줘.”
열심히 옷을 꾹꾹 눌러 담은 캐리어가 무거워 계단 위로 들어 올리려 낑낑대고 있는데, 먼저 올라가던 구준회가 뒤돌아 계단을 다시 몇 칸 내려왔다. 그는 그의 캐리어를 왼손에, 내 캐리어를 오른손에 잡더니 그대로 쭉 올라갔다.
“야, 야, 안 힘들어? 내가 들어도 되는데.”
“오빠가 동생 캐리어 정도는 들어줄 수 있잖아, 안 그래?”
아, 맞다, 항구에 도착하면 오빠라고 한다고 밑밥을 깔아 둔 터라 이제 더 빼기도 어려웠다. 은근하게 나를 살피는 그의 눈치에서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으, 응, 그렇지. 고마워.”
대충 얼버무리고 계단을 계속 올라가는데, 앞에서 구준회가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몰라, 최대한 호칭을 피하면 되겠지, 이름이건 뭐건 안 부르면 되는 거야.
선박 내부로 들어가자 승무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승무원은 고개를 살짝 숙여 우리에게 인사하고,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좁고 복잡한 복도를 지나 차가운 복도에 어울리지 않는 목재 문을 열자 환한 빛과 함께 타이타닉 로비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영화에서 본 장면이 그대로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얀 대리석 타일이 깔린 홀에, 떡갈나무 목재로 기둥과 계단이 들어서 있었다. 넓은 계단은 2층으로 이어졌고, 클래식한 분위기의 복도가 이어졌다. 잭과 로즈가 만났던 바로 그 벽시계, 그리고 계단의 정중앙을 장식하는 고풍스러운 조각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에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듯했다. 타이타닉의 내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지금껏 언론에서 떠들어대던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백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내부는 그 명성에 걸맞게 우아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제 작전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한빈 오빠의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 작전명 타이타닉. 대원들의 활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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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바벨탑 / 신 / 주내 / 마그마 / 토마토 / 준회원 / 준회 / 카누 / 준회(오빠) / 뿌요를 개로피자
안녕하세요, 맥심화이트골드예요.
시험 끝나고 바로 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못난 저를 매우 치세요
제가 진짜 다 잘못했어요 독자님들 죄송해요ㅠㅠㅠㅠㅠㅠ
많이 기다리셨죠? 뵐 낯이 없네요... (한숨)
기다려주신 독자분들께 정말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S2...
앞으로 자주 오겠다는 확실한 약속은 못 드리겠지만, 최대한 빨리, 많은 분량, 좋은 퀄리티로 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텀이 아무리 길어진다 하더라도 연중을 하지는 않을 거예요.
완결까지 독자님들 손 붙잡고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
항상 감사하고, 죄송하고, 사랑합니다ㅜㅜ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