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저더러 뭐 어쩌라는 겁니까.”
“우리 기업에 투자 좀 해주시죠.”
구준회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씩 웃었다.
“저기, 바텐더- 한 잔만 더 주세요.”
어색함을 참지 못한 나는 김동혁을 또다시 부르고야 말았고, 그는 걱정스럽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봐도 저 둘은 좀 오바스럽지 않냐. 나라면 어색해서 아는 척도 안 하고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갈 것 같은데, 그들은 한 기업의 차기 CEO, 그리고 투자자로서의 대화를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나누고 있었다.
“괜찮으시겠어요?”
한 잔 더 달라는 말에 김동혁은 재차 확인하겠다는 듯 눈썹을 올리며 물었고, 네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알았어요, 뒤를 돌았다. 각종 병과 칵테일글라스를 꺼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금세 칵테일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무알콜이예요, 몸 챙겨야지.”
“고마워요.”
대답하고 괜히 양 옆 눈치를 보았다. 아직도 나를 사이에 앉힌 채, 김한빈과 구준회의 팽팽한 자존심 싸움은 진행되고 있었다. 동혁아, 가지마, 눈으로 쉴 새 없이 신호를 보냈건만, 동혁이는 결국 바 안쪽으로 들어가버렸다. 하긴, 쟤도 빨리 타이타닉 메인 시스템 접근해야 침몰도 막고 하겠구나, AFT와 수장 관련된 정보도 알아봐야 하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경직된 분위기에 내 마음은 계속 동혁이를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그쪽 기업은 이번 일만 끝나면 훅 갈 기업 아닙니까. 투자 가치는 없어 보입니다만.”
“그러는 그쪽 재산도 이번 일만 끝나면 휴짓조각 아닙니까? 속는 셈 치고 한번-“
“그냥 먼저 일어나시죠.”
워, 세다. 칵테일만 홀짝홀짝 마시다가 한빈 오빠의 말에 놀라 손을 잠깐 멈췄다. 구준회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허, 숨을 내쉬었다. 한빈 오빠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살짝 저은 후 턱짓으로 바 안쪽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는 김동혁을 가리켰다.
“저 친구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리고, 동생분도 챙기셔야죠.”
“진작 말씀하시지.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구준회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더니, 내 손을 잡고 의자에서 내려오게 했다. 아, 미친, 나 칵테일 덜 마셨는데. 김동혁이 무알콜이랍시고 만들어준 칵테일은 생각 외로 맛있었다. 토닉워터 베이스에 과일 시럽이랑 향료 조금 넣은 것 같은데, 달달한 게 술술 넘어갔다. 잔을 들고 갈까, 망설이는데 내 손을 잡아 끄는 구준회의 손길에 맥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
“재밌었냐?”
객실 비밀번호를 누르며 구준회에게 물었다. 그는 내 이마를 검지로 꾹 누르더니 나를 내려다보고 웃었다. 새끼, 키만 커 가지고……. 괜히 꽁한 기분에 문을 열고 들어가 소파에 푹 앉았다. 구준회가 수트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권총을 빼 테이블 위에 두고, 수트는 소파에 걸쳤다.
“어, 완전.”
“연기가 아주 남우주연상 급이더만.”
“우리가 맨날 하는 일 아니냐.”
매일 밥 먹듯이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인 척 몰래 잠입해 정보를 빼내오는 것이긴 했지만, 내가 누군지 다 아는 사람에게 모르는 척 얼굴에 철판 깔고 연기할 배짱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레 대화를 이어나간 구준회와 한빈 오빠에게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근데 다 알고 있는 사람 앞에서까지……. 대단해, 진짜.”
비웃음과 감탄이 동시에 섞인 내 말투에 그가 픽 웃었다.
“안 피곤해? 나랑 한빈이 형 사이에 끼어서 아주 불편해 죽으려고 하드만.”
“알면서 그랬던 거야, 둘이?”
“그럼 몰랐겠냐, 얼른 씻고 자라. 오빠는 내일 수행할 작전 하나 생겼다. 아가는 방에서 푹 쉬고 있어.”
미친, 아가래, 김지원한테 옮았나.
“수행할 작전? AFT 말단 요원이라도 찾은 거야? 언제?”
“아까 우리한테 말 걸었던 그 로펌 남자. 존나 낌새가 안 좋아.”
아, 그 남자. 출항 축하 파티에서 자신을 로펌 소속 기업 변호사라 칭했던, 그. 나는 주머니를 뒤져 그가 준 명함을 꺼내보았다. Clifford Chance, Mark Evans. 클리퍼드 챈스 로펌, 마크 에반스. 가지런한 글씨로 인쇄된 그의 명함은 소속, 이름, 그리고 짧은 이메일 주소가 전부였다.
“이 사람?”
명함을 보여주자 구준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 그런데 넌 그 새끼 명함이나 받아서 실실 웃고나 있고.”
“뭐! 야, 내가 역으로 이 사람한테 접근해서 정보 빼 올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내가 정보 다 빼 올 수 있는데, 고맙습니다, 인사는 못 할망정.”
“됐어. 내일 조용히 한빈이 형 만나고 올 테니까, 너는 방 안에만 있어라, 알았지? 씻고 자, 이제.”
“네, 알았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짜 방 안에만 있게 될까. 옷을 챙겨 씻으러 들어와서도 우리의 작전이 자꾸 떠올랐다. 구준회가 그렇게 걱정할 정도면 내가 아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도 엄연한 ‘바벨탑의 설계자’ 멤버였고, 타이타닉 작전에 책임이 있었다. 내가 맡은 임무는 아니었지만, 뒤에서 서포트쯤은 해줄 수 있었다. 괜히 앞에 나서서 일을 벌이다가 민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했지만, 최소한의 노력은 보이고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샤워를 하여 풀린 몸을 침대에 누였다.
객실에 딸린 침실 안에는 혼자 눕기에는 조금 큰 크기의 침대가 두 개나 있었지만, 지금으로부터 삼 일 전, 타이타닉에 탑승한 이래로 두 개 중 하나의 침대는 사용된 적조차 없었고, 나머지 한 침대는 나 혼자 사용해왔다. 아무리 우리가 어릴 때부터 같이 훈련받고, 함께 자란 사이고, 따로 침대를 쓴다고 해도 같은 방에서 자는 건 안돼, 객실에 처음 짐을 풀고 잘 곳을 정할 때 구준회는 말했다. 그럼 어디서 자게? 밖에 소파 있잖아, 거기서 자면 돼. 야, 그래도 그렇지, 소파는 불편하지, 같은 침대 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침대 하나씩 쓰면 되잖아. 안 돼, 여자애가, 조심성이 없어, 야, 넌, 우리 멤버들도 조심해야 해, 남자 무서운 줄 모르고.
완강하게 소파에서 자겠다고 고집하던 구준회에게 미안했지만, 고맙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순수하지도, 깨끗하지도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이 남자한테 접근해서 정보를 빼 오는 일이니. 그나마 다행인 건, 몸을 섞은 적까지는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직전 순간까지는 가야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받는 일이나, 극비 문서를 빼내 오거나, 모두 침대에 기어오르기 직전의 상황까지 가서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국가는 항상 위험하리만치 아슬아슬한 타이밍까지 끌고 가기를 요구했지만, 그 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보장해주었다. 어쨌거나, 나는 각종 장소에서 내 몸에 올라오는 중년 남자들의 손을 참아내야만 했고, 성적인 희롱도 받아내야만 했다. 그런 임무를 몇 번이고 받아왔던 나에게, 이런 신사적인 대우는 미안하리만치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밖에서는 구준회가 씻고 있는지 물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메일을 확인하려 앱을 실행시켰다. 늦게 확인했다고 구준회한테까지 면박을 또 받고 싶지는 않았다. 다들 출항 파티에 아직 참석 중이니, 메일 올 것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메일함에는 한 통의 메일이 도착해있었다. 불과 7분 전에 발송된 메일이었다. 제목은 R#. 보낸 이는 역시 비어있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우리의 코드네임과, 사용하는 객실 번호가 나열되어 있었다. 위저드 네메시스. 김동혁이 보낸 메일이었다. 뭐, 언젠간 쓸 일이 있겠지. 나는 메일을 중요메일로 분류해두었다.
“안 자?”
꺼지지 않은 불을 보고 들어왔는지, 구준회가 젖은 머리를 방문으로 들이밀었다.
“메일 확인하고 자려고.”
그가 내 침대에 털썩 앉았다.
“자, 내일 아침에 오빠 없어도 걱정하지 말고.”
“오빠는 무슨.”
“……수장 누군지 밝혀낼 때까지, 다 잊고 놀아. 그때 한 번만, 딱 한 번만 고생하자, 응?”
안 어울리게 걱정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구준회에 괜히 마음이 시렸다. 가장 힘든 일은 다 자기가 하면서, 남 걱정하는 꼴이라니. 따지자면 제일 불쌍한 새끼가.
“짜식, 나는 걱정 안 해도 돼. 너나 몸 잘 사리고 다녀, 가장 위험하게 노는 게.”
나름 걱정해준답시고 한 말인데 더 불쌍하게 만들지는 않았나, 걱정되었다. 그런 내 걱정을 털어버리듯, 구준회는 환히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았어. 이제 자라. 불 끈다.”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자 그가 부스스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고, 주위는 캄캄해졌다. 타이타닉의 첫 출항 날, 나는 이불을 끌어안고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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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자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침실에서 나가니 거실 소파는 비어있었다. 멤버들과 함께한 지 얼마나 됐다고, 가슴에 저며오는 공허함이 야속했다. 혼자 있는 것이 가장 익숙했었는데, 고 며칠 같이 있었다고 외로움 타는 것 좀 봐. 이번 작전이 끝나면 다시 평소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게 되겠지.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합동 작전인 만큼, 완벽하게 끝내고 싶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기도 했다. 하루빨리 AFT의 수장을 찾아 타이타닉의 침몰을 막아야 했다. 구준회는 수장이 밝혀질 때까지 쉬라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다들 수장을 찾아 고군분투하는데, 나라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크 에반스. 탁자 위에 올려둔 명함은 그대로 있었다. 나는 명함에 적힌 주소로 이메일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에반스 씨, 로 시작하는 그 메일은 그럼, 언제 한 번 뵙고 싶어요, 로 끝을 맺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보를 빼 오는 것이었고, 그럴만한 대상은 마크 에반스밖에 없었다. ‘바벨탑의 설계자’ 촉은 틀린 적이 없었다. 구준회가 꺼림칙하다고 말을 했으면, 분명 뭔가 있는 것이었다. 에반스는 어떻게든 AFT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었다.
초선의 환생, 내 코드네임이 왜 그것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할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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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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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회 분량 과다...8ㅅ8....
독자님들 언제나 사랑하는거 아시죠 헤헤
잠이 오지 않아 새벽에 업데이트 합니다 (이제 자야죠...ㅎㅎ)
아침에 기분좋게 읽어주셨으면 좋겠네요 :)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