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었다. 웨이터들은 접시에 칵테일과 각종 핑거푸드를 얹은 채 연회장 곳곳을 돌아다녔고, 탑승객들은 미소를 띠며 연신 인사를 나누었다. 세계 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엘리트들의 모임이었다. ‘그사세’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이리 눈을 돌리면 할리우드 배우가 지나가고, 저리 눈을 돌리면 영국의 국회의원이 웃음 지으며 우아하게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 이 배를 침몰시키려 뒤를 꾸미고 있는 AFT의 수장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었다.
가장 주목받는 테러 단체의 수장인 만큼, 꼭꼭 숨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중동인으로 알려졌었지만, 의심을 피하고자 서양인, 혹은 동양인처럼 보이도록 성형 수술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타이타닉은 약 두 주일 후면 뉴욕에 정박했다. 그때까지 AFT의 수장을 찾아내고, 테러 계획 문서를 빼내고, 침몰 테러를 막아야 했다. 어디에서 테러를 터트릴지, 그것마저 모르는 상황이라 더더욱 절박했다. 최대한 빨리 AFT의 수장을 찾아내고, 테러 계획을 파악해야 했다.
그를 색출해내는 것은 사실상 동혁이와 지원 오빠가 할 일이었지만, 내 눈동자가 굴러가며 수상한 사람을 찾아내려 애쓰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Nice to meet you, (만나서 반갑습니다)”
연회장을 눈동자로 훑으며 탑승객 하나하나를 주시하는데, 구준회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니, 준수한 외모의 서양 남자가 옅은 미소를 띤 채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살짝 잡고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었다.
“로펌에서 일하는 기업 변호사입니다, XX기업의 자제분들 맞으신지요.”
설정상 나와 구준회는 XX기업 CEO의 아들, 딸이 맞았다. 물론, 그 기업은 동혁이가 모든 수치를 조작하여 만들어둔 가상의 기업이었고, 실존하지 않았다. 만약 타이타닉 내에 XX기업에 근무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모두 한빈 오빠가 심어둔 비밀 요원일 것이었다. 이메일로 지시가 내려왔던 것처럼 그들은 목깃에 금빛 브로치를 달고 있을 것이었다.
“맞습니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준회는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대꾸했다.
“타이타닉에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만약 기업과 관련된 문제가 생긴다면, 연락해주십시오. 있는 힘껏 돕겠습니다.”
남자는 명함을 내게 건넸고, 나는 살짝 받아 들고 감사합니다, 대답했다. 아가씨, 그가 나를 다시 불렀고, 네? 하고 그를 다시 주시하니,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꼭 연락해주세요, 덧붙였다. 네, 네에, 대답하자 그는 고개를 까딱한 채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구준회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계속 응시했다. 꺼림칙해 하는 눈치였다.
“야, 아니, 오빠, 카지노나 갈래?”
구준회의 관심을 돌리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19세기 분위기가 물씬 풍겨오는 연회장이 슬슬 지루해지던 차였다. 항상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의 쿵쿵거리는 파티만 즐겨오다, 고상한 척 하하호호 떠드는 타이타닉의 연회장에 있자니 답답했다. 가서 딜러로 일하는 지원 오빠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또 얼마나 여자를 홀리고 있을지, 궁금증이 솟아올랐다.
구준회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
지원은 여유롭게 웃으며 앞에 앉은 남자에게 턱짓했다.
카지노가 열린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았건만, 그는 타이타닉 카지노의 가장 인기 있는 딜러가 되어 있었다. 러시안룰렛, 바카라, 슬롯머신 등에도 사람들은 퍼져 있었지만, 지원이 자리 잡은 포커테이블에 가장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올인.”
5명으로 시작한 게임은 어느새 모두 파산하고 딜러인 지원과 단 한 명의 플레이어, 둘만이 남아 있었다. 남자는 호기롭게 올인을 외쳤고, 지원은 그를 빤히 응시했다. 남자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지원은 자신의 패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올인.”
지원 역시 올인을 외쳤다. 남자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자신의 패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베팅은 끝났고, 오픈(open)만이 남아있었다.
남자는 카드를 뒤집었다.
“Four of a kind. (포카드)”
포커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던 구경꾼들의 입이 벌어졌다. 포카드를 이길 수 있는 패는 스트레이트 플러쉬밖에 없었다. 스트레이트 플러쉬는 나올 확률이 0.03%에 불과했다. 지원이 이길 확률은 매우 희박했다. 드디어 딜러를 이기는 사람이 나타났구나, 사람들은 감탄했다. 남자는 득의양양하게 지원을 쳐다보고 웃었다.
지원은 무표정하게 카드를 뒤집었다.
스페이드 3, 스페이드 4, 스페이드 5, 스페이드 6. 여기까지 뒤집고 지원은 잠시 손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숨을 헉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지원이 마지막 카드를 뒤집었다.
스페이드 7.
“Straight Flush. (스트레이트 플러쉬)”
남자는 이를 갈았다.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나올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지원은 능청스레 눈썹을 찡긋하며 테이블의 칩을 모두 끌어갔다.
인파 속에서, 풋 하고 웃는 소리가 작게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나왔다며 수군대느라 이를 듣지 못했지만, 지원은 그 소리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지원은 고개를 들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 사람들 틈에 끼어 즐거운 듯 미소 짓고 있는 한 여자를 보자, 지원은 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나는 똑똑히 보았다. 웃음소리가 터져 나와 급히 입을 막았지만, 입가에 번진 웃음까지 감추기는 힘들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나는 구준회의 머리를 살짝 끌어당겨 그의 귀에 대고 조용히 물었다.
“야, 너 봤지?”
“어, 존나 골때리네.”
구준회 역시 우스움을 감추지 못했다.
스트레이트 플러쉬래, 저 딜러 진짜 미쳤나 봐, 객기 부리는 줄 알았더니만. 주위에서는 끊임없이 지원 오빠의 스트레이트 플러쉬에 감탄하는 와중에, 속임수를 눈치챈 나와 구준회는 웃음을 참느라 한바탕 입술 안쪽을 깨물어야만 했다.
애초에 지원 오빠의 패가 상대 남자보다 좋다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어떤 패가 나올지만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스트레이트 플러쉬라니, 너무 티 나지 않나. 아니,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로 안 한 게 다행인가.
오빠는 카드를 나누어줄 때, 미리 계획해둔 패를 덱의 가장 밑에 깔아두고, 플레이어의 카드는 위에서부터, 자신의 카드는 밑에서부터 뺐다. 지원 오빠는 일의 특성상 카지노를 가장 많이 들락거리는 인물이었다. 그런 손재주는 이미 스무 살도 되기 전 마스터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의 빠른 손놀림은 매우 숙련된 딜러도 알아채기 어려운 일이었다.
구준회는 내 허리를 팔로 감싸고 포커테이블에서 뒤로 빠졌다.
“어디 가?”
“오빠랑 한잔 해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하는 그에 웃음이 터졌다. 새끼, 내가 김동혁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할 때마다 뭐라고 하더니, 이렇게 먼저 가자고 말할 거면서.
칵테일 바는 카지노 내부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동혁이는 원래 카지노 안에 있는 칵테일 바가 아닌, 라운지 바에 있어야 했지만, 오늘만큼은 여기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한빈 오빠가 조치해두었다.
“애플 마티니.”
구준회는 바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동혁이는 바 안쪽에서 칵테일글라스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 얇고 고운 손을 분주히 움직이던 그는 동혁이는 구준회의 목소리에 빠르게 뒤돌았다. 그의 얼굴에 반가움이 묻어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옆에 아가씨는-”
김동혁은 나를 응시했고, 그 눈빛이 살짝 어려웠다. 한국 숙소에서 동혁이가 나를 위해 개발했다는, 그 칵테일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동혁이는 그 칵테일의 이름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여기서 야, 나 저번에 해줬던, 그 칵테일 해줘, 말할 수도 없었다. 입만 삐죽이며 그거 말고 또 뭐가 있지, 화이트 레이디? 샹그리아? 되뇌는데,
“제가 특별히 해 드리고 싶은 게 있네요, 그걸로 괜찮을까요?”
“네, 네. 그걸로 해주세요.”
그가 웃으며 제안했다. 아, 역시 김동혁. 눈치 빠른 거 봐. 기분이 좋아져 발을 달랑거리며 칵테일을 제조하는 동혁이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하얀색 와이셔츠가 그의 몸을 딱 맞게 감쌌고, 부드러운 몸 선이 움직이며 쉐이커를 흔들었다. 나는 진짜 곱다, 넋 놓고 감탄하며 동혁이를 쳐다보았다.
“애플 마티니, 그리고 스페셜 칵테일 나왔습니다.”
“고마워요.”
잔이 유리가 깔린 테이블에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옅은 녹색을 띤 잔은 구준회에게 살짝 밀어주었고, 붉은 칵테일은 내 앞에 놓았다.
바에서는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고, 느긋해지는 분위기에 나는 몸의 긴장을 풀었다.
오빠, 건배하자, 구준회에게 제안했다. 칵테일 가지고 무슨 건배야, 핀잔을 놓으면서도 그는 잔을 들어 보였다. 나는 김동혁의 눈치를 살폈다. 김동혁은 줄곧 잔을 닦으며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텐더, 같이 건배할래요? 기다렸다는 듯, 그는 그러죠, 뭐, 하며 생긋 웃었다. 남자애가 웃는 건 더럽게 예쁘다니까. 구준회가 잔을 먼저 들었다. 우리는 잔을 쨍 하고 마주치고, 건배, 작게 외쳤다. 웃음이 터졌다.
와르르 웃음을 터트리는데, 누군가 내 옆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드라이 마티니.”
한빈 오빠였다.
“아가씨,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오빠는 느긋한 미소를 띠고 물었다. 미친, 김한빈이 저런 표정으로 저런 말도 할 수 있었다니, 뒤통수를 한 대 갈겨 맞은 느낌이었다.
한빈 오빠는 언제나 철벽과도 같은 모습만을 보여왔다. 감정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단호하다 못해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말투만을 고집했다. 이거 해, 저거 해. 그 앞에서 어리광을 부렸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국정원장보다도 무섭고, 하늘 같은 존재가 바로 김한빈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한빈 오빠는 지금 내 앞에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고 있었다.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능글맞은 모습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리고 있던 차였다.
“제 동생입니다.”
구준회가 끼어들었다. 한빈 오빠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의 표정은 굳었는데도, 내 마음은 그제야 풀어졌다. 그래, 저런 표정을 지어야 김한빈이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저한테 허락받으시죠.”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아, 제발, 이런 건 익숙하지 않았다. 한빈 오빠가 이렇게 연기를 잘할 줄은 몰랐다. 구준회가 거기에 또 자극을 받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능글맞아진 김한빈, 쓸데없는 자존심 세우는 구준회, 나는 그 둘 사이에 낀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술 때문인지, 머리가 아파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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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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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맥심화이트골드예요.
훠 새삼 정말 빨리 왔네요..
글을 원체 느리게 써서 그런지, 이렇게 빨리 오다니 역대급인 것 같아요 허허
얼른 사건을 착착 진행시켜서 빨리 뒷부분 독자님들께 보여드리고 싶어요ㅠㅠㅠㅠ
지난 화에도 말했지만 초반보다 후반이 강렬한 글이라..!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독자님들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