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장 민윤기랑 연애하기 02 (부제 : 잘못된 하루 속의 설렘이란)
w. 달비
02-1
"안 나올 거야?"
강의실 안으로 허겁지겁 뛰어 들어가면서 문 쪽에 누가 있다는 건 대충 느끼고 있었다.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던 이유는 일단 놓고 온 걸 뒤늦게 깨달았기에 강의실 문이 닫히면 어쩌나, 하고 뛰어갔는데 안에 있는 사람이 민윤기 일 줄은 몰랐다. 열린 문 사이로는 어둠이 들어오고, 강의실 안은 아직 빛으로 가득한 오묘한 분위기. 그리고 그 경계점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민윤기는 나를 벙찌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와씨. 심장 떨리게 멋있다. 민윤기를 보고 ‘잘생겼다.’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다. 그냥 피부가 하얗고, 웃을 때는 약간 귀여운? 그 정도였는데 지금의 민윤기는 미치도록 잘생겼다. 아, 나 아무래도 앞으로 민윤기를 볼 때마다 그렇게 느낄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별 것도 아닌 일들이 내게는 크게 다가왔다. 여고를 다녀서, 이렇다 할 남사친이 없어서. 그래서 그런지 혼자 착각에 빠질 때도 많았고, 의미부여를 하는 것도 내 특기라면 특기였다. 근데 그 원인이 이번엔 민윤기라니.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있는 각도며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들고, 시선은 나를 향해 있는 저 모습. 세상에. 나 지금 또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여주야."
"네?"
"안 나올 거냐고."
"아, 나가요!"
아까까지만 해도 긴 복도를 가득 메우던 시끌벅적한 소리는 이미 1층으로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고, 강의실 밖을 빠져나와 복도에 남은 건 나와 민윤기, 단 둘 뿐이었다. 열어둔 창문 탓에 차갑게 식어버린 복도 위에 가득 차있는 어색함은 분위기를 얼리며 나를 숨 막히게 했고, 그건 민윤기도 마찬가지인 듯 아무 말도 없이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채 긴 복도를 걸었다. 나는 패딩 주머니 안에서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 거리다가 이 뻘쭘한 상황들이 못 견디게 버거워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겠다 싶어 민윤기를 슬쩍 올려다봤다. 민윤기는 철저하게 앞만 봤다. 그런 무표정의 민윤기가 너무 차가워보여서, 무서워보여서 잠깐 주머니 밖으로 꺼내 땀을 식히던, 말을 걸기 위해 주먹을 쥐었던 손을 다시 조용히 집어넣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앞만 보고 걸었다. 정말 딱 앞만 보고. 그렇게 우리 둘 다 앞만 보고 걷는 복도는 발자국소리와 간간히 들려오는 바람소리를 제외하곤 엄청나도록 고요했다. 발자국소리와 바람소리마저 없었더라면 아마 서로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민윤기와 단 둘이 걷는 복도는 어딘가 미묘했다. 창문 틈으로 매섭게 들어오는 바람소리는 어두운 복도에서 무서운 효과음 역할을 톡톡히 했고, 복도에 가득한 냉기와 어색함은 불편했지만 이런 부정적인 느낌들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약간의 설렘은 나를 더 불편하게 하면서도 이 복도가 조금만 더 길었으면 했다. 불편한데 불편하지 않은, 불편하지 않은데 불편한. 이렇게 미묘한 복도는 구석부터 설렘을 채워 넣었다. 나는 그 설렘을 조금 더 찾고 싶어서 걸음을 늦추고 민윤기의 약간 뒤에서 걸었다. 춥지도 않은지 남방 하나만 걸친 민윤기는 몸을 떠는 기색도 없이 잘만 걸었다. 아, 나 자꾸 설레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시선은 민윤기 뒤통수에 고정시키며 걷고 있는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던 도중,
"아까 뭐 놓고 온 건데 그렇게 급하게 들어 와?"
숨 막히는 고요 속에서, 나는 훔쳐보다가 걸린 것을 인정하기라도 하듯 어깨를 흠칫 떨었다. 사실 민윤기가 먼저 말을 걸어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근데 진짜 이렇게 내게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지금 민윤기 뒤통수를 몰래 보는 중이었고. 생각만 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의 놀람인지, 아니면 조용한 곳에서 갑자기 들려온 사람 목소리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지금 내가 민윤기 뒤통수를 몰래 보고 있었기 때문인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자 민윤기는 대답이 없는 나를 살짝 돌아보더니 놀랐냐며, 갑자기 말을 걸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아까 강의실에서 정호석한테 했던 말들을 보면 정말 사과라고는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사과를 건네는 민윤기 모습에 또 당황하고 만다. 그러기를 잠깐,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리다 아까 했던 민윤기의 질문이 생각나 대답했다.
"아, 저 틴트요. 춤 연습 한다고 잠깐 빼뒀는데 그걸 깜빡했,"
"어둡다. 앞 보고 걸어."
대화 할 때는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예의라고 배웠기도 했고, 우리 과 선배니까 그냥 앞만 보고 대답을 하는 것은 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민윤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대답을 하려던 것이었다. 뭐, 정작 민윤기는 내 쪽을 안 보고 앞을 보고 있었다만. 덕분에 앞은 신경도 쓰지 않고 걸어갔고, 나는 코앞에 있는 계단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발을 디딜 뻔 한 순간, 민윤기가 내 팔뚝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으, 근데 어지간히 세게 잡았나보다. 아프다.
"아!"
"아. 아팠으면 미안. 너무 세게 잡았다."
"아, 아니에요! 잡아주셔서 감사해요. 하마터면 구를 뻔 했네!"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오빠한테 미안하다는 소리를 두 번씩이나 듣는 게 여간 마음이 편치 않아, 아닙니다! 저 따위에게 사과라니요!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라는 뉘앙스로 정말 감사하다며 오버 액션을 곁들여 목소리 톤을 조금 높였다. 근데 그게 민윤기 눈에는 웃겨 보였는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딱히 웃기려던 건 아니었기에 날 보며 웃는 민윤기를 보다가 아까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버 액션을 할 수 있었던 용기는 어디로 사라지고 부끄러움만 양쪽 볼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민윤기 웃는 모습이 또 멋있어 보여서, 다시 볼이 붉게 물드는 것이 얇은 피부 사이로 느껴지는데, 지금 이 복도를 적신 어둠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은 볼을 가리지 않아도 보지 못할테니까.
02-2
난 큰일 났다. 내가 장기자랑에 나가게 됐을 때부터 뭔가 잘못 됐다고 생각했어야만 했다. 아니, 사실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었고. 근데 그냥 단순히 내 착각이기를 바랐던 걸까, 그렇게 신경 쓰지 않고 있던 문제였는데 난 그냥 제대로 잘못된 게 맞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한테 이런 시련들을 핵폭탄 급으로 내려줄 리가 없잖아? 이 추운 날, 아무리 실내에 들어왔다고 해서 이만큼 손에 땀 차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근데 지금 내 손에선 무슨 홍수라도 난 것 마냥 축축하게 젖어 나는 그 손을 하루 종일 허벅지에 문지르기 바빴다. 아마 내 바지는 땀에 찌들었을 거야. 나 어떡해. 옆 테이블에 앉은 친구한테 누가 봐도 불쌍한 표정을 지어가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그 친구는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키득키득 거리며 힘내라고 말해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다시 우리 테이블로 고개를 옮기는 것이었다.
"이름이 뭐야? 어디 살아? 우리 과는 왜 온 거야?"
"...정호석, 시끄럽다."
"아, 형. 지금 물어보는 거잖아요. 후배한테 이런 것도 못 물어봐요?"
"……."
그래. 난 지금 학회장, 부학회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다. 하하! 부럽지? 에베베. 는 무슨, 집에 가고 싶다. 친구들이랑 놀 때는 곧 죽어도 들어가기 싫던 집이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에 들어가고 싶은 건지. 벌써 집에 들어가서 내가 할 일들을 생각한다. 난 집 들어가자마자 엄마한테 오늘 일을 징징거린 다음에 샤워를 하고 바로 침대에 누워버릴 거야. 정호석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덕분에 상상하는 일은 그만뒀다. 어디 사는데? 왜 하필 우리 과야? 노래는 누가 정했어? 시킨 메뉴가 나와야 입을 다물 생각인 건지, 지금은 절대 다물지 않을 것 같은 입에 이 땀에 젖은 손으로 내 귀를 틀어막든, 저 입을 틀어막든 둘 중 하나는 꼭 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호석을 제지하려던 민윤기도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휴대폰으로 시선을 옮겨버린다. 아니, 오빠. 조금만 더 말려주세요. 저도 휴대폰 만지고 싶단 말이에요. 춤추느라 답 못한 밀린 카톡들 보고 싶다고.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누가 봐도 어색하게 웃으며 눈치만 보던 그때, 드디어 음식이 나왔다. 할렐루야.
나는 음식이 나오면 정호석의 입이 다물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정호석은 한 입 먹고 질문 한 번 하는 스킬을 보여줬고, 덕분에 나는 이 맛있는 닭갈비를 입으로 넣는 건지 코로 쑤셔 넣는 건지 모를 만큼 정신없는 상황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정호석은 자기가 한 말에 혼자 까르르 웃기도 했고 중간중간 말하면서 민윤기 팔뚝을 치기도 여러 번, 민윤기는 그럴 때마다 말하지 않는 게 이득이라는 듯 입은 꾹 다문 채 무섭게 노려보기만 했다. 하지만 정호석은 그 정도쯤이야, 하며 개의치 않고 계속 재잘재잘 떠들었고, 처음에 우리를 향한 질문으로 시작했다면 이젠 학생회 일이 힘들다는 투덜거림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얘들아. 편하게 먹어, 알겠지? 천천히 먹고!"
"...네에."
"아 내가 불편한가? 형, 우리가 불편한가봐요. 왜지? 편하게 해, 편하게!"
너 때문에 불편한 거잖아요. 내가 살면서 밥 먹는 도중에 토할 뻔했던 적은 처음이다. 다른 사람보다 비위가 강한 편이라 밥 먹을 때 어떤 더러운 종류의 이야기를 하든 꾸역꾸역 잘만 먹었는데, 이건 좀 많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먹었다간 급체를 해서 백방 토할 것 같은 기분? 민윤기는 우리가 불편한 게 눈에 보이는 건지, 아니면 입을 열기 귀찮은 건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밥만 먹었다. 아, 중간 중간 정호석을 노려보긴 했다. 하지만 정호석은 아니었다. 정말 그 이유를 모른다는 듯 물어보는 저 눈.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너희한테 말 걸어주고 분위기 띄우면서 편하게 대하라고 하는데 내가 왜 때문에 어색하고 불편한 거야? 이런 느낌? 아마 저 사람은 신입생 때도 이랬을 것 같다. 안 봐도 뻔하다. 눈앞에 놓인 닭갈비를 보고도 마음껏 먹지 못하는 그런 서러움이란. 난 아마 오늘 이 음식들을 남긴 것을 백 번, 천 번이고 후회하게 될 거다. 내 닭갈비……. 괜히 울적해지는 마음에 신입생들끼리 모여 앉은 옆 테이블은 어떻게 먹고 있나 보는데 아주 살 판 났다. 우걱우걱 정도가 아니라 와구와구 먹고 있다. 부럽다. 나도 저 테이블 갔으면 저렇게 먹었을 텐데.
"먹어도 뭐라 안 하니까 편하게 먹어."
내 바로 앞에 양념에 맛있게 볶아진 밥을 놔두고 숟가락이 아닌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면서 옆 테이블만 바라보던 나한테 민윤기가 툭 던졌다. 그 말에 민윤기를 보면 고개를 숙인 채로 앞 접시에 떠다놓은 밥을 먹으며 그 와중에 시선은 휴대폰을 향하고 있는데 불편해 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저렇게 말을 건넨 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정수리에 눈이 달린 건가. 아무튼, 몇 시간 동안 춤을 춘 탓인지 배가 고프기도 했고, 먹는 게 남는 거라고 생각해서 젓가락을 내려놓고 숟가락을 들어 먹기 시작했다. 오, 여기 맛있다. 나중에 입학하고 얘네들이랑 한 번 더 와야겠다.
"윤기형. 오늘 술 마실래요?"
"뭔데, 갑자기."
"아, 그냥요. 원래 쟤네랑 마시기로 한 건데 형도 끼실래요?"
"나 오늘 별로. 너희끼리 마셔. 집 가서 작업해야 돼."
이게 바로 대학생들의 대화라는 건가. 술 마실래? 아니 싫어. 워후, 신기하다. 나도 곧 같은 대학생이 됨에도 불구하고 아직 갓 신입생인 나한테는 어딘가 연륜이 느껴지는 대화에 정호석과 민윤기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또 눈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얼른 다시 내리 깔려고 하는데. 왜, 너희가 낄래? 정호석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묻는다. 나는 아..하하. 아니요오. 하고 다시 밥을 먹는데 정호석은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어이구, 잘 먹네. 하면서 오구오구 거렸고, 다시 급속도로 불편해진 나는 살며시 숟가락을 내려놓고선 이제 배불러서 못먹겠어요. 라는 거짓말을 한다. 배부리긴 뭐가 배불러, 지금 여기 남은 거 내가 싹 다 긁어 먹을 수 있는데 말이야. 아, 시간 많이 늦었긴 한데 이 상태로는 안 된다. 집 가서 뭐라도 먹든가 해야지.
"다 먹었으면 나가자."
02-3
나 진짜 뭐가 끼인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한테‘만’ 이런 시련이 찾아올 리는 없다. 오늘 하루는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하루다. 아까 밥 먹을 때는 그래도 나 이외의 친구들 역시 불편한 자리였기에 그렇다 치지만, 이건 나 혼자 불편한 거잖아. 나 혼자. 정말 나 혼자. 아무래도 이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 며칠간은 이래야 할 텐데 그건 못하겠다. 아니, 저기요. 누가 이것 좀 봐요. 이게 말이나 돼요? 내가 지금 민윤기랑 단 둘이 버스정류장을 가고 있다는 게? 아까 강의실 앞에서는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지금은 그냥 불편하기만 하다. 하필 또 민윤기랑 버스정류장이 겹치는 건 뭐람. 하하. 하하하. 민윤기랑 걷는 밤길이라니. 학회장과 걷는 밤길. 참.. 좋...다...! 좋긴 뭐가 좋아!!!!!!!!! 나는 지금 집에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집에 가고 싶다. 그것도 굉장히. 민윤기는 여전히 말을 안 하고 앞만, 아니 이젠 핸드폰만 보네. 그리고 나도 말없이 카톡 프로필만 이리저리 넘겨보는 부질없는 짓을 하는 중이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어려운 선배라는 사실보다 내가 지금 어색해 금방이라도 숨질 것 같다는 생각에 무작정 말을 걸었다.
"오빠는 어디 사세요?"
"...어?"
내가 먼저 말을 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나보다. 처음엔 내 말을 듣지 못한 건지 휴대폰만 보다가 뭔가 이상한 듯 나를 쳐다보더니 내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자 당황하며 되물었다. 아니, 오빠 어디 사시냐구요. 방금 했던 질문을 다시 이야기 해주자 그제야 얼굴에 떠올랐던 당황스러움을 지워버리고 이 근처에 산다고 답했다. 어, 대박. 그럼 나랑 같은 버스 아니다. 워후! 다행이다. 같은 버스였으면 진짜 큰일 날 뻔 했다. 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싫어서가 아니라, 정말 그 넓은 공간을 가득 메워버린 어색함과 불편함이 나를 미치게 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어, 8분 남았네. 오빠는 3분 남았어요!"
"……."
조금이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버스정류장에 다다르자 내가 먼저 우다다 뛰어가 버스 예정시간을 본다. 내 버스는 8분, 민윤기가 탈 버스는 3분. 내가 3분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뭐가 됐든 같은 버스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뭐, 민윤기가 금방 버스를 타고 떠나면 나는 조금 더 일찍 이 숨 막히는 분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으니까. 눈치만 살살 보다가 의자에 털썩 앉는데, 내가 앉는 모습을 보던 민윤기도 슬쩍 내 옆자리에 앉는다. 윽. 이상하게 또 미묘해 지려는 분위기에 괜히 예정시간을 가리키는 화면만 노려보며 얼른 시간이 줄어들길 기도했다. 그러기를 몇 분, 3분을 가리키던 버스 예정시간은 금세 잠시 후 도착으로 바뀌었고, 휴대폰을 보고 있느라 못 본 건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민윤기를 보고 있자니 이대로라면 버스를 놓칠 것만 같아 어깨를 톡톡 쳤다.
"저, 오빠. 버스 잠시 후 도착이래요."
"버스 기다려줄게."
"...네?"
"내 버스 어차피 금방 다시 와."
"아니, 아니 그게, 괜찮아요! 먼저 가셔도 되는데……."
"여기 외진 곳이라 위험해. 기다려준다고. 토 달지마, 혼난다."
진짜 혼날 것 같아서 입을 다물긴 했지만, 이거 뭐지? 이 상황 뭐지 대체? 왜 민윤기가 내 버스를 기다려줘? 내가 외진 곳에 혼자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인 거지? 물음표가 꼬리를 물고, 또 그 꼬리를 물고 늘어지자 혼자 의미부여를 하려는 듯 머릿속은 금세 복잡해졌고, 그냥 토 달지 말라는 민윤기에 말에 따르기로 했다. 생각을 비우자. 그게 마음 편할 것이다. 의미부여의 끝은 언제나 쓰렸음에 나는 더 이상의 생각은 그만둔다. 민윤기는 자기가 타야 할 버스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뭐 그리 볼 게 많다고 휴대폰만 계속 들여다봤다. 그렇게 8분이 찍혀있었던 내 버스도 잠시 후 도착으로 바뀌어 있었고, 오빠 저 버스 잠시 후 도착이래요. 민윤기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예정시간을 보고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는다. 버스는 금방 도착했고, 나는 기다려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렇게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무심코 본 창밖으로 마주친 민윤기의 눈은 애써 진정시킨 시간이 무색할 만큼 빠르게 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렇게 버스에서 내내 민윤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내 방 바닥에 앉아있었다. 그러다 엄마한테 빨리 씻으라고 크게 한 소리를 듣고 나서야 향한 욕실에서도, 샤워를 마치고 다시 들어온 내 방에서도 아까 버스 창밖으로 내다 본 민윤기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당연히 휴대폰으로 고개를 돌렸을 거라고 생각해 아무 생각 없이 내다본 창밖이었는데 날 보고 있는 민윤기는 날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실 눈빛이라기 보단 그 상황들, 창밖에 서서 날 바라보던 민윤기의 그 모습. 그냥, 뭔가 이상했다. 남자가 내 버스를 기다려준다는 것도, 나를 배웅해준다는 것 자체 모두가. 계속해서 피어오르는 민윤기의 잔상에 어떻게든 지우려고 침대를 굴러다녀봤지만 돌아오는 건 더욱 더 선명해지는 민윤기의 모습이었다. 결국 나는 휴대폰을 집어 든다.
오빠 오늘 저녁 잘 먹었습니다. 감사해요! - 오후 10:12
그리고 버스 기다려주신 것도 감사하구요 ㅎㅎ
늦은 시간에 카톡해서 죄송해요 굿밤 되세요!! - 오후 10:13
고심 끝에 보낸 카톡, 보내자마자 사라지는 1들에 당황하며 카톡방을 나갈 틈도 없이 민윤기에게 답장이 온다.
그래. 너도 잘 자. - 오후 10:13
잘 자라는 말 한 마디가 이렇게 설렐 수도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아마 오늘 밤은 생각이 많은 밤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쉽사리 잠들지 못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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끕. 이번 편 쓸 때 적어도 보통 분량으로 채우자! 했는데 몇 번의 수정 끝에 해냈습니다 ㅠㅅㅠ! 대신 브금을 못 고르ㄴ...(쥐구멍) 원래 제가 뭘 읽을 때 노래 들으면 집중 못하는 편이라 뭘 들어도 뭐가 어울리는지 모르게써여.. 저번 편 댓글 몇 개 달리다 말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봐주셔서 증말 감동받았습니다 엉엉 앞으로도 열심히 쓸테니 지켜봐 주세요! 봐주시는 분들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