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밝다........
....... 몇시지..?'
더듬더듬 침대 옆 스탠드와 나란히 놓여져있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는다.
9시 20분...
9시 20분....
9시 20.... 어?!
"...오늘 토요일이다."
".....아...."
"......"
"..아?..."
몸을 상체를 벌떡 일으키다 나를 안심시키는 목소리에 다시 뒤로 쓰러진다.
그러다 우리집에선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없다는게 떠올라서 고갤 홱 돌려본다.
녀석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금세 상황파악이 된다.
난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떠보려다 문득 몸이 휑하다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만을 들어 시선을 내려본다.
역시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다.
난 황급히 이불로 몸을 덮으며 몸을 옆으로 돌려버린다.
"어제 다 봤는데 뭘 가려."
"....그거랑은 다르지."
"...오늘 쉬는 날인데 어디 가고 싶은데 없어?"
'..너랑?'
하고 물으려다 한대 맞을 것 같아서 침과 함께 말을 삼킨다.
내가 말이 없으니 녀석이 누워있는 나의 허벅지를 손가락을 찔러온다.
"야, 없냐고."
"......."
"....혹시 아파...?"
"....?"
내게 물어오는 녀석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 내가 고갤 들어본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아서 고개를 반쯤 돌리고 있다.
난 이불을 주섬주섬 챙기며 상체를 일으킨다.
녀석의 고개가 살짝 아래로 기울더니 조용히 읊조린다.
"...난 부드럽게 한다고 했는데...."
"......"
"...아이씨..."
그렇게 말하며 짜증스러운 손길로 머리를 긁적거린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칼을 정리해주려다,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린다.
내가 이불을 더 세게 껴안으며 입을 연다.
"...녹차라떼 먹고 싶어."
"....뭐?"
"....녹차라떼."
두 번 물어온 것이 불쾌한 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더니,
몸을 돌려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녀석.
머리가 헝클어진 건 녀석보다도 내 쪽이었는지 녀석이 내 머리칼을 정리해준다.
"그래."
"......"
일단은 나왔는데, 전개가 이상하다.
지금 데이트를 하는 건가?
그럼 우린 데이트도 하기 전에...
아무튼 아이러니한 상황에 내가 운을 뗀다.
"...이거 데이트야?"
"......"
햇볕이 과하지 않게 들어오는 카페 안에서
커피잔을 들고 있던 녀석의 손이 멈추더니 한 쪽 입고리가 올라간다.
내가 눈이 동그래지니 멈췄던 손이 다시 움직인다.
"...뭐..."
"......."
어쩐지 녀석의 표정이 재밌어하는 것 같다.
내가 말없이 녀석을 바라보고 있으니 시선이 내게로 던져진다.
"어디 가고 싶은데."
"...그런 데 없는데."
"......"
나의 무심한 진심에, 좀전까지 씰룩거리던 입가가 뚝 쳐진다.
별 생각없이 말을 뱉은 나는 괜히 손으로 입술을 잡아 조물거린다.
녀석의 얼굴이 빙긋 웃더니 상냥한 소리로 입을 놀린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제 하던 것만 한다?"
"......"
"...나야 좋지."
"...알았어, 잠깐만..."
난 관자놀이를 누르며 어디로 가야할지 열심히 생각하고 있다.
주말에 놀이공원을 간다면 지옥일 것 같고,
그렇다고 사람이 너무 적은 곳으로 가면 어제처럼 녀석이 날 쪼물거릴 것 같아 두렵다.
영화관같은 어두운 곳은 더더욱이 안된다.
나는 눈썹을 열심히 꿈틀거리다 눈을 번쩍 뜬다.
"쇼핑."
"...사고 싶은 거 있어?"
"....아니."
"......"
"그, 그냥 구경."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네."
"...어?"
"...아무 것도 아니야.
다 마셨으면 일어나자."
트레이에 컵을 내려놓으니, 녀석이 자연스레 치워준다.
나를 부릴 줄만 알았던 녀석이, 오늘은 나를 배려해주고 있는 느낌이다.
내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녀석의 눈길에 아차 싶어 움직인다.
....
내 결정은 곧 후회가 되어 돌아왔다.
구름 한 점이 없이 맑아서 볕이 뜨겁다.
거리서 옷 구경은 커녕, 그늘로 숨기 바쁘다.
바깥에 나와있는 악세사리도 뜨거울 것 같아 함부로 손을 댈 엄두도 나지 않는다.
눈치를 쓱 보며 고갤 돌려보니, 녀석의 목에 땀줄기가 흐르고 있다.
"...그러게... 가고 싶은 데 없다니까...."
"....?"
"......"
내가 애꿎은 손톱만 깨작대고 있으니, 녀석이 내 팔을 붙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반갑게 우리에게 인사하는 종업원 언니와 상반된 얼굴로 녀석을 바라본다.
"무슨 옷 좋아해."
"...어?"
"셔츠? 원피스?"
"....그냥... 안 따지는데..."
"...이거 예쁘네."
녀석은 다짜고짜 바로 앞 행거에 걸려있던 이쁘장한 원피스를 집어들어 내게 대본다.
작은 꽃무늬 패턴이 그려져있는 원피스가 그닥 내 취향은 아니라서 난 얼굴을 찡그린다.
"..난 별론데."
"...입어."
그러고는 나를 탈의실로 쭉쭉 밀며 집어넣는다.
옷걸이 째로 원피스를 던져, 허겁지겁 받고는 내가 따지듯 묻는다.
"왜 입어야 되는데?"
"..내가 입히고 싶으니까."
"....하, 참.."
콧방귀를 마저 끼기도 전에 커튼을 쳐버리는 녀석.
울컥하는 마음에 주먹이 올라왔다.
몸을 돌려 거울 앞에 서서 한숨을 한 번 쉬어보고는 얌전히 옷을 벗는다.
땀으로 눅눅한 옷을 벗기란 참 불쾌하다.
옷을 입고 조심스레 나오니 팔짱을 낀채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나는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고 얌전히 녀석의 반응을 기다린다.
"얼마예요?"
"..뭐? 야, 됐어..!"
"됐으니까 가만있어."
도대체 이해를 할 수 없는 녀석이다.
인질처럼 끌고 다니다가, 갑자기 웬 선물.
난 녀석이 계산을 마치기 전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뻘쭘하게 서 있다.
"가자."
"...줘, 내 옷."
"....자."
녀석의 손에 들려있던 내 옷이 담긴 봉투를 들고 터덜터덜 걸어나온다.
아무런 말없이 싱글거리고 있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속이 메스껍다.
난 참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린채 녀석에게 묻는다.
"왜 자꾸 웃어? 기분 나쁘게..."
"......"
녀석은 조용히 나와 어깨동무를 하며 얄궂은 얼굴로 말한다.
"너 기분 나쁘라고."
"....또라이."
그렇게 바깥을 돌아다니다가 조금 어둑해진 초저녁이 되니
녀석이 집앞까지 배웅을 해준다.
난 당황스러운 친절에 몸 둘 바를 모르고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들어가서 쉬어."
"......"
"내일이면 또 학교에서 힘들어질테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뭐.... 또 그런다는 얘기지."
"....도대체 네 머릿 속엔 그짓밖에 없냐."
"어."
"......"
당연하게 대답하는 녀석을 노려보고 있으니
나를 돌려세워서 등을 떠민다.
멋쩍게 뒤를 돌아보니 녀석이 팔짱을 낀 채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
이 뭔가 아리송한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할까.
"다녀왔습니다."
"너 야자 빼먹고 어딜 싸돌아다녀!"
"친구네 집 갔다왔어."
"으휴!... 너 옷도 산 거야?!"
"...친구거야."
"너 자꾸 야자 빼먹기만 해 봐."
"아, 알았어...."
방으로 터덜터덜 들어가는 내 등 뒤에서 엄마의 쫑알쫑알이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내 머릿 속은 온통 녀석 생각 뿐이다.
방에 들어서자 마자 베게를 껴안고 이상한 기분을 달래기 바쁘다.
".... 또라이 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