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도 녀석과는 아무런 접촉이 없다.
눈이 마주쳐도, 평소 반 아이들에게 날리던 인사들 정도로 끝이었다.
자꾸만 이상해지는 기분이 싫어서 나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갤 숙이고 다녔다.
가끔은 이쪽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듯 했지만, 그건 곧 주변 애들의 부름에 사라지곤 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일상으로 돌아왔음에도,
내 정신만 돌아오지 못한 듯 하다.
그런 내 마음을 잘 아는 듯한 친구는 오히려 날 더 챙겨준다.
호의는 고마운데, 정신이 반쯤 다른 곳에 팔려있다.
"......"
"...야, 매점에서 뭐 사다주까?"
"...응, 나 치즈빵..."
"음료수는."
"..피크닉?"
"오케, 알았어. 금방 사올테니까 정신 챙기고 있어~"
내 기분을 풀어주려는 친구의 행동에 나갔던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다.
가만히 턱을 괴고 반을 둘러보는데, 반 문으로 들어오는 녀석이 보여 내 얼굴이 찌그러진다.
바로 앞에 우리 반 여자애와 맞닥뜨린다.
여자애가 궁녀 마냥 뒷걸음질을 치니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건네는 녀석.
그꼴도 왠지 봐주기 어렵다.
순간적으로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의 눈에 놀라, 난 몸을 휙 돌린다.
'...매점 심부름 시키지 말 걸.'
점심시간.
나는 친구와 밥을 먹고 나오며 답답해서 혼자 좀 걷겠다며 건물 바깥을 둘러보고 있다.
땡볕이라 그늘 쪽으로 숨어가다, 나도 모르게 코너에서 벽쪽에 몸을 숨긴다.
녀석이 있다.
나는 눈을 질끈감다, 원치 않게 도청을 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애... 있어?"
"......"
"없으면... 저..."
"..미안."
"...?"
"나 지금은 누구 사귈 생각 같은 게 없어서.."
'...매정한 놈. 끝까지라도 듣지.'
잠시 후, 여자애의 미안하다며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린다.
그러다 문득 나도 녀석을 도발해보고 싶은 마음이 충동적으로 일어난다.
마침, 돌아가려던 녀석과 마주친 나는 눈알을 굴리다 입을 연다.
"...좋아하는 애 있어?"
"......"
"나랑 사귈래?"
"......"
고갤 삐딱하게 들며 나를 바라보는 녀석을 난 말없이 호기심 어리게 바라보고 있다.
짧은 헛웃음 소리가 들린 것 같다.
내게 눈을 맞추며 정색을 하더니, 낮은 소리가 내려와 꽃힌다.
"웃기지마."
"......"
들려올 말을 기대한 것이 있었던가.
나는 어딘가 살벌한 그 말투가 꽂혀서 얼어붙어 있다.
굳어진 녀석의 얼굴이 풀리며 내 손목을 붙잡는다.
"..이제 이 정도면 됐어."
"......"
"...진도 뽑던 거나 마저 뽑아야..."
나는 녀석의 손길을 뿌리친다.
녀석에게 나의 동요를 감추려, 고갤 옆으로 돌리며 시선을 떨구고 있다.
녀석이 붙잡았던 손목이 뜨거운 것 같아, 내 손으로 덮는다.
"너 대체... 원하는 게 뭐야."
"......"
"..결국 내 처녀 뺏는 게 목적 아니였어?"
"...목소리 낮춰라."
"....됐다, 사이코 XX."
"......"
녀석은 말없이 다시 나의 손목을 붙잡는다.
이번엔 아주 강하고 확실하게.
입술을 깨물며 녀석을 바라보고 있는데, 녀석이 주위를 살피더니 한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아 들어올린다.
"...안 만져주니까 성 났냐."
"....XX.."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마. 오늘 안으로 끝내줄테니까."
"...!..."
"...핸드폰 내놔."
"......"
"빨리."
나의 부동자세에 손을 더듬거리는 녀석 때문에 난 고갤 옆으로 빼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낸다.
내밀기도 전에 채가는 녀석을 노려보고 있는데, 화면을 몇번 엄지로 누르더니 화면을 끄고 내게 돌려준다.
치켜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얄미운 입술이 움직인다.
"이따가 문자 줄테니까, 오늘 야자는 빼."
".....기가 막혀서..."
"...오늘 무리하지마라."
그 말을 하며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리는 녀석의 말에서 조금 진심이 느껴져 머뭇거려 버린다.
내가 또 다시 고갤 옆으로 빼니 조용히 자리를 뜬다.
그녀석의 등이 즐거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방금 차버린 주제에.'
교실로 돌아오니 아까 고백에서 차여버린 여자애가 우울해보여 어쩐지 괜히 찔리는 느낌이 든다.
'교복 갈아입고
1시간 뒤에 OO역 △△호텔로 와.
방호수는 도착해서 문자할게.'
기분이 묘하다.
나를 갖고 놀대로 갖고 논 줄 알았는데, 아직도 볼 일이 남았나.
그럼 왜 한동안 내 털끝에도 손대지 않은 걸까.
그리곤 이제와서 됐다니. 돼긴 뭐가.
집으로 도착하니, 엄마가 내게 물어오신다.
난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다.
교복을 입은 채로 갈아입을 옷을 둘러보다, 갑자기 인상을 팍 쓴다.
'뭘 골라. 그냥 아무거나 입지, 뭐.'
그리고는 얇은 긴 팔 옷을 주워입고 뽈뽈 거리며 집을 나선다.
뒤에서 엄마가 어디가냐고 물어오셨지만 대답도 하지 않고 도망치듯 나선다.
'506호'
다른 말도 없이 딱 방호수만 적어서 보낸 녀석의 문자를 보며 인상을 구긴다.
혹시나 호텔 주변에 우리 학교 학생이 있을까 무서워서 조심조심 몸을 사리며 건물로 들어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 중앙을 조심조심 걸어간다.
꼭 도살장에 제발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다.
침을 한 번 삼키고 506호 앞에서 걸음을 멈춰 문을 두드린다.
문이 열리자, 편한 옷차림으로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는 녀석이 보인다.
"왔어?"
"......"
말 없이 내 손목을 끌어, 안으로 들인다.
문을 닫고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가는 녀석을 나는 그저 빤히 바라보고 있다.
"......"
"..빨리 들어와."
"......"
조심스럽게 떨려오는 다리로 발을 떼본다.
느릿느릿 걸어오는 내가 답답했는지, 또 다시 성큼성큼 걸어와서 나를 질질 끌어 침대 위에 앉힌다.
나는 들어선 이후로 계속해서 녀석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어?"
"저녁부터 먹자."
들이자마자 겁탈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식사를 권한다.
나는 조금 의심스럽지만 가만히 녀석을 지켜보고 있다.
"뭐 먹을래..?"
"......"
"..그럼 내가 알아서 시킨다?"
"......"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
"......"
"...너는 좀 있다 잡아 먹을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