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니."
"아, 그게... 잠깐 밖에 좀..."
꿰뚫는 눈빛이 거북해 고개를 숙였다.
"전사장님 곧 오신다는구나."
"엄마."
"그래, 나 네 엄마야."
"..."
"그러니까"
"..."
"엄마 좀 이해해줘."
"...엄마."
"엄마가 이렇게 부탁할게."
오랜 세월을 거친 곱지 않은 여자의 꽤나 아름다운 얼굴은 오래 바라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집어 들었던 품이 큰 가디건을 다시 침대 위에 내려 놓았다. 단 10분 나를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달려왔을 마르고 야윈 몸이 지금 밖에 있을텐데. 감히 겉옷을 걸칠 생각도 못하고 달려 왔을텐데. 애매한 시선으로 방문을 열고 나간 엄마의 뒷모습을 보다 눈을 감고 힘이 잔뜩 들어간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꽤나 거친 숨을 내쉬며 들리는 목소리.
-나 가로등. 늦었지, 미안해.
"...태형아."
-...응.
"미안해."
-괜찮아.
"뭐가, 괜찮아."
-목소리 들어서 좋다.
"...김태형."
-얼굴 못 봐도 괜찮아. 목소리 들려줘서 좋아. 그러니까...
"..."
-포기하지마.
"..."
-...나, 기다려.
"..."
-그 새끼한테... 마음까지 주지마.
"..."
-...다른건 다 이해할게. 마음은 주지마. 사랑해.
"...나도."
-오늘 또 예쁜거 입겠네. 보고싶은데.
"..."
-너 마음 불편하니까 내가 먼저 끊을게. 그리고,
"..."
-울지마.
전화는 끊겼다. 아직도 가로등 밑에서 가만히 서 있을 그 마른 몸이 떠올랐다. 어쩌지. 그 사람은 다른건 다 필요 없다는데. 마음을 달래. 마음만 달래 태형아.
"아무래도 풀빌라가 좋겠어. 너 수영을 꽤나 좋아한다던데."
"그렇게 하세요."
"네 연습실도 하나 만들고."
"네."
"의상실도 하나 만들고."
"네."
"네 이름을 딴 콩쿨도 열고."
"네."
"내 아이를 낳고."
"네."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운전대를 잡고 앞을 보고 있는 그의 표정에서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말실수 했어요."
"곧 부부가 될 사인데 아이를 낳는다는게 어떻게 실수야."
"장난할 기분 아니에요."
"누군 그런 기분으로 보이나봐."
"전정국씨."
"내 이름도 알고 있네. 영광이야."
"..."
"김태형. 스물넷. 인대 파열로 군면제. S대 법학과 출신에 지금 사법고시생. 내년 상반기 고시 예정. 홀어머니 밑에서 잘 자랐네 바르게. 외동 아들에."
"...지금, 무슨..."
"더 이상 나 자극하지마."
"..."
"다음엔 이딴 종이 쪼가리로 그 새끼 만나진 않을거야."
"지금, 나 협박해요?"
"그 새끼가 너한테 협박할 만큼의 파급력이 있다는 사실이 열받는데."
"..."
"그것도 매우."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상관없어."
"..."
"내가 널 사랑하고 있으니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자에게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봤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태형아, 언제 올거야. 너, 언제오는데. 나... 언제 데리러 오는데 너.
"김태형. 누가 너 찾아왔어."
"네? 엄마가 오셨나..."
"아니."
"..."
"존나 돈 많아 보이는 남자던데."
책을 정리하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오래된 샤프를 쥔 손이 자연스레 떨려왔다. 숙여진 고개에 시선은 내 옷차림에 머물렀다. 아주 초라하고 낡은 티셔츠. 휴게실 싸구려 플라스틱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는 지독히고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겨우 앞으로 다가가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로..."
"이런 곳에서 먹고 자고 산다는게 놀라운데."
"용건부터 말씀하시죠."
"아니. 자기소개부터 해야지."
"..."
"BH사장이라고 하면 아나."
"..."
"아니면..."
"..."
"전정국이라던가. 그것도 아니면..."
"..."
"네 여자친구의 약혼자라고 할까."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내가 곧 네 여자친구랑 결혼을 한다는거야."
"그쪽을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납치하듯이 데려가 하는 결혼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가난한 고시생이랑 하는 결혼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보단 큰 걸 줄 수 있지."
"불쌍한거, 압니까 그쪽."
"뭐 꽤 들어 그런 소리."
일어선 남자가 나를 내려다 보는 이 순간을 난 영원히 잊지 못한다.
"나랑 동등해 질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 찾으러 와봐 한번."
당당한 그 남자의 목소리.
"그때가 되면 이미 그 여자는 나를 사랑하고 있을테니까."
곧, 갈거야.
"아니어도 상관없지만."
꼭.
널 찾으러 갈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