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회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하얀 천장 위로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조금 전만 해도 그녀와 입술을 맞대고 있던 것이 꿈만 같았다. 밤에 취했었나, 그는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불가능한 발상이었고, 실행으로 옮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요 며칠간 그는 이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이성은 그를 말렸지만, 새벽에 바다에 취한 그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입안을 계속 맴돌던 단어들이 어색한 배열이 되어 튀어나왔다.
-……이번 작전 끝나면, 나랑 도망가자. 멀리.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발언에 저 자신을 원망하며 입술을 깨물던 그에게 그녀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도망가자.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그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으로 다가갔다. 떨림이 그대로 전해지는 그녀의 입술에 그는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쌌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그녀와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는 생각에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같은 침대는 아니었지만, 겨우 이 미터 남짓한 거리에서 그녀가 자고 있었다. 준회는 참을 인자를 꾹꾹 새기며 눈을 감았다. 입안을 깨물며 끓어오르는 속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는데, 으응, 하며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씨발. 준회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늘 잠은 다 잤네, 하며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구준회, 어디 가?”
잠에 취한 목소리였다. 한창 잠긴 목에, 부스스하게 일어나 앉은 그녀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또 나가서 자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준회는 말끝을 흐렸다.
“침대에서 자, 너 팔도 아직 아프잖아. 아니면, 여기서 잘래?”
그녀는 제 옆을 팡팡 쳤다. 준회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여자애가 못하는 말이 없다. 물론 어렸을 때야 합숙을 한답시고 다 함께 뒤엉켜 자기도 하고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미쳤어?”
“농담이야. 그래도 밖에서 자지 말고 여기서 자.”
준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애매하게 선 그는 밖으로 나가지도, 다시 들어오지도 못한 채 애꿎은 바닥만 쿵쿵 쳤다. 몰라 씨발, 될 대로 돼라지, 뇌까린 준회는 돌아와 그녀의 침대에 털썩 앉았다.
“왜 깼어.”
“너 발소리 때문에.”
“잠귀도 밝아.”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불 꺼진 방 희미하게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잠이 잔뜩 묻어있었다. 뾰로통하게 내민 입술과 졸린 듯 천천히 깜빡이는 눈, 부스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얼핏 보였다. 속이 타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그냥 자라, 말하려는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도망…… 못 가는 거 알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국가 소속 정보요원이, 어떻게 그리 쉽게 도망칠 수 있겠는가. 기밀을 다 알고 있는 몸이었고, 국가에 그 누구보다도 필요한 존재였다. 섣불리 도망쳤다가는 바로 다시 잡혀 들어올 것이 뻔했다. 아니, 반역을 이유로 즉시 사살되지 않고, 다시 잡혀 들어오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준회는 입술을 깨물었다. 몇 년 전 그에게 주어졌던 미션이 떠올랐다.
김진환 사살 작전. 진환은 국가 소속 저격수였다. 구준회의 교육을 담당한 사람이기도 했다. 열다섯, 준회에게 처음으로 저격용 총을 잡는 법을 가르쳐준 것이 진환이었다. 그는 진환을 믿고 의지했다. 열여덟, ‘바벨탑의 설계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고, 국가는 진환과의 연락을 허락하지 않았다. 멤버들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그가 의지하던 사람과의 관계는 그렇게 끊어졌다. 준회가 다시 진환의 이름을 들은 것은 몇 년 후였다. 김진환 사살 작전. 국가에서 도망친 김진환을 찾아내어 사살하라, 는 명령이었다. 국가를 등진 정보요원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준회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만은 놓아주고 싶었다. 그는 아예 침대 위로 올라와 그녀의 앞에 앉았다.
“언제까지 잡혀서 살 건데.”
“일이잖아.”
일이잖아,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첫 임무를 시작했을 때부터, 아니, 멤버들의 역할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아니,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는 홍일점인 그녀가 언제나 눈에 밟혔다. 사내들 틈바구니에 낀 단 한 명의 여자가 국가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해주겠는가. 실전으로 뛰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이는 언제나 준회의 신경을 건드렸다. 지금이 무슨 시대인데 여자애한테 그딴 좆 같은 일을 시키느냐며 한빈에게 건의한 적도 있었다. 한빈이 내린 최선의 결단은, 마지막까지는 가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것뿐이었다.
“일이라도. 나는 너 그러는 거 못 봐.”
“그래도. 우리 다 같은 처지고, 한빈 오빠도 나름대로 신경 써주……”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는 게 좋아?”
그는 천천히 대꾸하던 그녀의 말을 끊었다. 단호하게 묻는 그에 그녀는 당황한 듯 얼어붙었다. 그녀를 응시하는 준회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그녀의 심정을 꿰뚫는 듯했다. 침묵이 방 안을 휩싸고 돌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떨어트렸다. 나라고 좋아서 이러겠어, 말하려는데 대답 대신 눈물이 먼저 튀어나왔다.
“이게, 좋을 리가 없잖아.”
방울져 떨어지는 눈물이 이불을 적셨다. 준회는 팔을 뻗어 그녀의 턱을 살짝 잡고 올려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눈을 살짝 돌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도 알잖아. 도망치면 그냥 다 끝이라는 거.”
끝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녀만은 풀어주고 싶었다. 답답한 새장에서 나와, 하늘을 날아가렴. 어떠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하더라도 괜찮아.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아 자유롭게 날아가는 그녀를 보고 싶었다.
내가 죽더라도 너만은 자유로웠으면 해.
-
아침에 일어나니 옆 침대에서 구준회가 자고 있었다. 다행히 거실로 나가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새벽에 나를 두 번이나 깨워놓고, 저는 피곤했는지 곤히 잠든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일탈은 뒤로하고, 작전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도망이니 어쩌니 말을 해도 결국 국가에 속박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었다. 씁쓸했지만, 씁쓸하다는 이유로 운명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 이렇게 사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아. 한빈 오빠가 신경 써주는 덕에 진짜로 몸을 파는 수준까지는 아니고, 일하는 만큼의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고, 멤버들도 있고. 는 무슨. 국가 소속 정보요원은 국가에 목숨과 인생을 바친 것이었다. 임무에는 위험이 따랐고, 위험하다는 핑계를 대며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인생을 걸어야만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을 추스르며 세수를 하고, 거실로 나왔다. 핸드폰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한빈 오빠에게서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새벽의 탈선은 고매한 환상에 불과했다. 현실에 젖어들 시간이었다.
제목: Op. T. (31 minutes ago)
보낸 이: Not Available
내용:
오전 중으로 객실 찾아올 것.
1022. 바벨탑의 주인
생각 외로 간단한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얼굴을 마주 보고 명령을 내릴 심산인 것 같았다. 빨리 가서 최대한 빨리 작전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준비를 마쳤다. 그때까지도 구준회는 조용했다.
나가기 전, 잠시 침실 문을 열어보았다. 이불 밑으로 색색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자는구나. 침대로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을 살폈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동안 가장 고생해온 게 구준회였겠지, 하는 마음에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가만 손을 뻗어 그의 볼을 만졌다. 살이 많이 빠졌네, 옛날에는 볼이 말랑말랑했었는데, 지금 내 손가락은 날렵해진 턱선을 훑고 있었다.
“……뭐해.”
아, 깜짝이야. 언제 일어났는지, 내 손목은 구준회의 손에 잡혀 있었고, 이불 밑으로 그가 눈만 뜬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 나가려고. 한빈 오빠가 불렀어.”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작전 때문에 불려가는 것을 눈치챈듯싶었다.
“얼른 갔다 와. 쓸데없는 짓 하다가 늦게 오지 말고, 형 방에만 딱 들렀다 바로 와.”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의 손이 내 뒷목을 감싸고, 천천히 얼굴이 다가왔다. 나는 살짝 눈을 감았고, 따뜻한 입술이 스쳤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였지만 그의 숨소리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확 다가오지 않고 애매하게 스치기만 하는 입술에 눈을 꼭 감고 손을 뻗어 그의 볼을 감쌌다. 그가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대로 입술을 눌렀다. 구준회의 혀가 저돌적으로 입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나는 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고, 그는 급하게 입을 맞췄다. 점점 숨이 가빠왔고, 나는 그를 살짝 밀어냈다.
“나 갈게. 금방 올 거야.”
그는 끝까지 아쉬운 눈치였다. 인심 쓴다, 하는 마음으로 마지막으로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춘 후 뒤를 돌았다.
“쉬고 있어, 갔다 올게.”
한빈 오빠의 객실은 그리 멀지 않았다. 금색 초인종을 누르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문의 잠금이 해제되었다. 이곳에 온 적은 단 한 번이었고,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에반스를 만났던 날, 술을 진탕 퍼마시고 한빈 오빠에게 업혀온 곳이 여기였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생각보다 좁은 방이었다. 한빈 오빠 혼자 쓰는 객실이니 조금 작은 방으로 신청한 모양이었다.
“일찍 왔네.”
그는 거실 탁자 위에 올려진 서류를 뒤적였다. 웬만한 사전 두께보다도 두꺼워 보였다. 그 틈바구니에서 몇 장의 서류를 집어내더니, 나에게 건넸다.
“AFT 수장에 관련된 자료들이야. 한 번 읽어봐.”
나는 서류철을 받아 들었다. 맨 위에 적힌 것은 Karl Smith. 칼 스미스. 흔한 이름이었다.
“위장된 자료예요?”
“섞여 있어.”
서류에는 수장의 온갖 신상정보가 수록되어 있었다. 칼 스미스는 위장하고 있는 이름이었고, 페이지를 넘기자 수장의 진짜 신상이 쏟아졌다. 본명, Hassan Al Rahman, 하산 알 라만. 맨 이 좁아터진 배 안에서 이런 진짜 신상을 알아봤자 쓸모는 없었지만, 그래도 계속 종이를 넘겼다. 가족 관계, 현재 근거지, 테러 이력 등 무수했다.
“지금 위장하고 있는 직업은 경영 컨설턴트.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위층 인사들에게는 본인이 AFT의 수장이라는 걸 숨기지 않는 모양이야. 타 요원들의 제보에 따르면 이미 테러를 예고하는 등의 발언을 한 적도 있었고.”
“테러를 예고했다고요?”
한빈 오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테러’라고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테러를 지칭하는 은어가 있는 모양이야. 요원들은 정황상 판단하여 그 은어를 식별해낸 것이고.”
굳이 테러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예고하는 듯한 내색을 비췄다는 것은, 이를 이용하여 세계 강대국과 거래를 하려는 수법일지도 몰랐다. 뭐, 예를 들어 ‘이슬람의 종교 세력 확장에 관여하지 마라, 그렇지 않다면 타이타닉을 침몰시키겠다,’ 라던가. 어쨌거나, 조심해야 하는 것은 맞았다.
“AFT의 계획이 적힌 문서는 수장의 금고에 있어. 이미 여러 정보요원이 수장의 옷과 차림을 뒤졌지만, 계획 문서는 없었지. 객실 CCTV에도 잡히지 않았어. 남은 곳은 금고밖에.”
나는 서류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수장의 객실이 타이타닉의 단면도와 함께 표시되어 있었다. 수장의 객실은 대부분의 객실과 달리 배의 뒤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평소 하던 대로. 수장과 접촉해서, 객실로 들어가 기밀문서를 빼 와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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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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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텀이... 많이 길어졌네요 8ㅅ8..... 분량 또한 길어졌으니 노하지 말아쥬세요...☆ 댓글에 답댓.. 요새 못달아드려서 정말 죄송해요ㅠㅠㅠㅠㅠ 마음같아선 하나하나 다 달고싶은데 시간이 허락지를 않네요ㅜㅜ 하나하나 모두 정독하고 있으니 걱정은 마셔요 :) 투표 시즌이 다가왔죠? 아이콘을 위해 열심히 투표합시다 아이디도 열심히 파고요! 아이코닉 화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