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열의 생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찬열의 생일은 백현의 책상 위 작은 달력에 빨간 볼펜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백현은 순식간에 고민에 빠졌다. 남의 생일 챙겨준 거라곤 여태껏 수정의 생일 날 상품권 몇 장과 작은 카드 한 장 준 것 밖에 없었다. 그 것도 수정은 처음 브랜드를 만들었을 때부터 같이 해 온 가까운 사이라서 챙긴 것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찬열이한테 상품권을 줄 수도 없고. 머리를 싸매고 한참을 고민하던 백현이 결국 수정을 호출했다.
"부르셨어요?"
"거기 좀 앉아봐."
잔뜩 굳은 표정으로 소파를 턱짓으로 가르키는 백현의 모습에 수정이 바짝 긴장했다. "아, 네. 네." 소파에 앉은 수정이 잔뜩 걱정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방금 전까지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었는데 왜때문에 목이 마른 거지. 자꾸만 목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수정은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렸다. 괜히 손이 심심해져 데님 스커트의 제봉선을 따라 만지작댔다. 백현이 무엇때문에 자신을 불렀는지 꿈에도 모르는 수정은 백현이 소파에 앉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제가 잘못한 게 있는지 고민했다. 없는 거 같은데? 수정이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이 없는 것 같아 울상을 지었다. 히스테리가 또 도진 건가. 수정이 아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수정 씨. 나 좀 도와줘."
"네? 어떤걸요?"
수정이 난데없는 백현의 도와달란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현은 수정에게 제 고민을 털어놓았다. "찬열이 생일인데, 뭘 줘야할 지 모르겠어." 백현의 고민에 수정은 또 한번 기겁을 했다. 디자이너님이 누구 생일을 챙기다니! 같이 일을 한 후로 백현이 남에게 생일 선물을 준 건 제가 전부였다. 조금은 섭섭해지기도 했다.
"원래 선물같은 거 잘 안하시잖아요."
"아, 그게."
그러고보니 수정은 백현과 찬열의 연애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백현은 잠깐동안의 고민 끝에 사실을 털어놓았다. 수정이라면 자신의 동성연애도 이해해줄 터였다. 그럴 사람이었다, 수정은. " 나 찬열이랑 사귀거든." 백현의 고백에 수정이 놀라 나자빠졌다. 수정의 얼굴의 모든 구멍이 활짝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드디어!"
"응? 드디어?"
"진짜요?" 하고 말할 줄 알았던 수정의 입에서 약간은 황당한 말이 나왔다. 드디어라니? 백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정을 되찾은 수정이 몸을 소파 끄트머리로 당겨 앉았다. 박수를 짝짝 치는 것도 잊지 않은 수정이 백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진짜 드디어 사귀시네요. 축하드려요."
"뭐야, 너? 알고 있었어?"
"사귀는 건 몰랐죠. 아, 두 분 언제 사귀나, 사귀나 기다렸더니."
진심으로 둘을 축하해준 수정이 활짝 웃었다. 제가 얼마나 답답했는지 아세요? 수정이 차마 하지 못한 말을 꾹 삼켰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수정을 보며 백현도 웃어보였다. 내가 사람 하난 참 잘 뽑았지. 그렇게 구박하고 혼쭐을 내고 이것저것 많이 시켜도 아무 말 없이 ─뒤에서 욕은 했겠지?─ 도와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삼 년 동안 충실히 제 옆을 지킨 유일한 사람이었다.
"찬열 씨가 뭘 좋아하는 지 아시잖아요."
수정의 말에 백현이 생각에 빠졌다. 사실 찬열은 제가 하는 것이라면, 주는 것이라면 다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 뭐든지 고맙다, 좋다, 해줘서. 새삼 백현은 찬열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찬열은 아마도 제가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을 터였다. 근데 난 모르잖아. 백현이 한숨을 쉬었다. "걘 내가 좋다면 다 좋다고 그랬어."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엄마 앞에서 변명을 하듯 말하는 백현을 보며 수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디자이너님이 선물이네요?"
"응? 내가?"
백현의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찬열이한테는 내가 선물이라고? 사실 그건 백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일 밖에 모르던 빡빡하던 백현의 마음에 왈칵 찬열이 들어섰다. 찬열이 등장한 백현의 삶은 조금 여유가 생겼다. 자신밖에 모르던 이기적이던 변백현은 이제서야 제 주위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앞으로 수정 씨랑 민석이, 루한이한테 더 잘해야지. 백현은 27살이 된 지금에야 사람이 주는 기쁨을 알게되었다. 자신이 받은 만큼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고 싶었다. 자신이 제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그들도 저를 소중하다고 생각해주기를 바랬다. 스물 일곱 인생 중에 사람에 욕심이 나는 건 처음이었다. 이게 다 찬열이 덕분이야! 활짝 웃는 찬열의 모습을 떠올린 백현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수정은 발갛게 달아오른 백현의 얼굴을 보며 맨 처음 찬열이 백현에게 선물했던 홍차를 떠올렸다. 딱 홍차 색이야, 지금.
"디자이너님이 좋아하시는 차 선물은 어때요?"
"차?"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입맛도 맞아가야되는 거에요. 디자이너님도 지금 찬열 씨 홍차 엄청 드시잖아요."
엄청? 내가 그 정도로 홍차를 마셔댔어? 백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홍차 선물 받은 지 한달도 안됐는데 지금 동나가요." "뭐? 벌써?" 백현의 어깨가 축, 처졌다. 나 그거 없음 일 못하는데. 어느새 홍차가 제 일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찬열이 제 마음에 차지하는 부분이 점점 커져갈 수록 그랬다. 마음 속 찬열이가 무럭무럭 자라갈 수록 홍차가 차지하는 부분도 무럭무럭 자라갔다. 아, 어떡하지. 생일 선물이랑 홍차랑 교환하는 불상사가 생기게 생겼어. 에휴. 백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찬열 씨한텐 디자이너님 자체로 좋을 테니까 그 날 시간 빼서 하루종일 같이 있어주세요. 휴가 내시구요. 쇼 준비는 제가 할게요. 장소 건은 제가 정해서 메일로 보낼게요."
"수정 씨…."
"저 믿어요. 저도 디자이너님이랑 같이 이 세계에 입성했다구요."
수정이 두 주먹을 쥐어보이며 "화이팅!" 하고 쇼파에서 일어났다. 말려올라간 스커트 자락을 정리한 수정이 백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수정은 이 커플때문에 주말에도 일을 해야할 판이었지만 괴로워하지 않기로 했다. 백현은 밉다, 밉다해도 수정이 아끼는 사람 중 하나였다.
4년 전 백현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하는 면접마다 떨어져 길거리에서 부끄러운지 모르고 펑펑 울던 수정에게 백현이 다가왔다. 수정의 앞에 쪼그려 앉은 백현이 수정에게 제 손수건을 건넸다. "울지 마요. 힘 내고." 그 말에 수정은 더 통곡했더랬다. "다 잘 될 거에요." 수정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옆에 같이 있던 백현과 수정은 그 자리에서 가까워졌다. 길거리 구석에 쪼그려앉은 둘은 한참동안 제 꿈에 대해 얘기했다. "내가 브랜드 열면, 그 때 와요." 자신의 브랜드를 여는 게 꿈이라던 백현이 당차게 말했다.
4년 전 수정에게 백현은 천사처럼 보였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백현에게 수정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보였다. 같이 이 세계에 입성에 온갖 고난을 겪은 사이라 둘은 더 애틋했다. 감동의 물결로 가득 찬 백현의 작업실을 나가며 수정이 문을 닫기 전에 고개를 빼꼼 내밀어 "힘쇼!" 하는 유행어를 외쳤다. 힘쇼가 뭐지? 물론 백현은 못 알아들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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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은 일을 하다 말고 결국 백화점으로 가서 저가 좋아하던 원두커피와 얼그레이 홍차를 샀다. 예쁘게 포장된 커피 봉지와 홍차 상자를 보며 백현은 조금 우울해졌다. 저는 찬열이 커피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좋아한다, 좋아한다하면서 정작 찬열이에 대해 아는 건 몇 없었다. 찬열의 생일도 도어락 비밀번호를 푸려고 검색해서 알아낸 거였다. 속상했다. 찬열은 늘 묵묵히 백현에게 맞춰주었다. 백현이 좋아하는 막창을 늘 함께 먹고, 레몬 알레르기가 있으면서 백현이 준 것이라는 이유로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백현은 찬열이 막창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몰랐고 커피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몰랐다. 그냥 저에게 찬열이 맞춰주니 그게 마냥 편했던 모양이었다. 백현은 찬열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어떤 영화 장르를 좋아하는지, 하는 찬열에 대한 소소한 것들을 알려고 노력 조차 하지 않았다. 찬열에게 미안한 감정이 분수처럼 샘솟아올랐다. 백현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펑펑 울고 말았다. 백화점 쇼핑백이 찬열인냥 품 안에 꼭 안고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자꾸만 샘솟는 미안하고,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났다.
백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상에 앉았다. 서랍에서 하얀 편지지 너댓장을 꺼냈다. 만년필로 찬열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안녕!' 이라는 인사로 꽤 쾌활하게 시작된 편지는 '찬열아, 널 사랑한다는 말은 몇 백번 말해도 모자라는 거 같다. 사랑해라는 말은 내 감정을 담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말이야. 태어나줘서 고맙고, 내 앞에 나타나줘서 고맙고, 날 좋아해줘서 고맙고, 나를 위해줘서 고맙고. 한없이 고맙고 사랑해. ' 하는 절절한 문구로 끝을 맺었다. 시작부터 목이 매어오던 백현은 기어이 눈물을 터뜨렸다. 정말 사랑한다는 말로는 모자랄 만큼 찬열을 사랑했다. 짧은 글 솜씨로 표현해내기에는 백현의 마음이 너무나도 깊었다.
고운 색의 종이가방을 꺼내 커피와 홍차를 넣었다. 봉투에 넣은 제 편지도 구석에 넣었다. 그리고 백현은 스케치북을 펼치고 연필을 쥐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옷을 만들 생각이었다. 새하얀 스케치북 위로 까맣게 선이 그려져나갔다. 오로지 찬열만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백현은 선을 그려나갔다. 지금 이 순간부터 찬열의 생일날까지 패션쇼 준비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온전히 제 머릿속에, 마음속에 찬열으로만 채우기로 마음 먹었다.
셔츠와 바지의 디자인이 완성된 건 창밖에 어둑해졌을 즘 이었다. 셔츠 가슴께에는 작게 CB라는 마크도 자리잡고 있었다. 오로지 백현은 찬열이 이 옷을 입고 제가 선물한 커피와 홍차를 마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디자인을 했다. 이 옷을 입고, 차를 마시면서 저에게 웃어준다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할 것 같았다. 찬열이가 기쁘게 선물을 받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백현은 디자인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초조해졌다.
백현은 문득 찬열이 보고 싶어졌다. 오늘이 대본 리딩이라고 작업실에 못 찾아온다던 찬열의 메세지가 생각이 났다. 백현은 찬열에게 보고 싶다고 메세지를 보냈다. 어리광인 줄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 밤에 못 보면 잠을 못 잘 것 같았다. 엄마와 떨어진 아이처럼 자꾸만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다시 한번 보고 싶다고 메세지를 보내려다 백현은 꾹 입술을 깨물고 홀드 버튼을 눌렀다. 아무리 그래도 찬열이의 일을 방해할 순 없었다. 백현은 소파 위에 다리를 모아 앉았다. 오늘 따라 집이 더 넓은 것 처럼 느껴졌다. 괜히 집안에 모든 전등을 켰다. 텔레비전도 켰다. 왁자지껄한 웃음 소리가 집 안에 퍼졌으나 백현은 우울했다.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없으니, 우울한 게 당연했다. 안 그래도 바빠 요새 며칠동안 얼굴을 보지도 못했던 둘이었다. 쌓이고 쌓인 그리움이 오늘 밤 갑자기 폭발한 것 같았다. 찬열을 만난 후로 사춘기가 온 10대들 처럼 제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 엎치락, 뒤치락거렸다. 보고 싶어서, 미안해서, 사랑해서 눈물을 터뜨린 건 백현의 27년 인생 중에 처음있는 일이었다. 왈칵, 또 눈물이 터졌다. 이 놈의 눈물샘은 마르지도 않나 보다.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낸 백현이 작게 찬열의 이름을 불렀다.
"찬열아, 찬열아."
이름을 불러도 찬열은 대답이 없다. 으아앙. 다시 백현이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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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레녹입니다!
요새 홈을 파려고 애쓰고 있어요...ㅎㅎ
엄청난 컴맹이라...아...너무 힘들다...;ㅅ;...
괜찮아요, 할 수 있을거에요...
이번 편 백현이는 조금 많이 슬퍼요...
조금씩 찬열이에 대한 마음을 자각해가는 과정이랄까!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은 쪼~금 다른데 그걸 백현이가 알아가고 있답니다.
찬열이가 제 옆을 지켜주어서 마냥 좋았던 옛날의 백현이는 이제 안녕...
이제는 찬열이 옆에 자신이 있어주고 싶고, 챙겨주고 싶고, 마음을 주고 싶어졌답니다.
저번에 댓글 달아주셨던 아몬드봉봉님, 니은님, 패릿님, 날다람쥐님, 겨론해님, 행쇼님, 아봄님, 초콜렛님, 초딩입맛님!
그 외 두분! 모두모두 감사드려요!
칠개월전에 봤던 분들이 몇 분 더 돌아와주셔서 얼마나 감동인지...;ㅅ;...
댓글 달아주시는 모든 분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