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p de Foudre
06
(부제: 누군가를 홀로 좋아하는 시간은)
난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이 가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내 집안 환경은 모든 걸 그렇게 만들었다.
가고 싶은 곳은 얼마든지 갈 수 있고, 사고 싶은 건 얼마든지 다 살 수 있게 된 대신에, 내가 받지 못한 건 사랑이었다.
난 남들보다 특별히 잘 살고, 부유한 걸 원한 게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가정을 원했다.
늘 집에 가면 도우미 아주머니만 계시고 아무도 없는 그런 풍경이 아니라, 말 그대로 평범한 집 풍경.
난 늘 외로웠다.
'넌 알아서 늘 잘 했잖아.'
'.......'
'철 없이 굴지 마.'
나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나는 학교에서 애들이 엄마가 잔소리 한다는 말을 할 때가 제일 부러웠다.
나한테 관심조차 가진 적이 있었던가. 내가 자식은 맞는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게 한 두번이 아니었다.
내가 배운 건, 어떻게 하면 내 감정을 절제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 않을 지, 였다.
어머닌 그런 걸 원했고, 내가 어리광을 피우거나 응석을 부리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내가 열 다섯 때 느낀 점이었다. 나를 친자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응, 그럼 밤에 만나요.'
'......누구 만나시는데요?'
'그, 그건 네 영역이 아냐.'
내 영역, 네 영역이 구분돼 있는 그런 사이였으니까. 그리고 만나던 남자가 따로 있었으니까,
아버지를 쏙 빼닮은 내가 보기 싫었던 게 분명했다. 두 분이 결혼한 이유는 불 보듯 뻔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한 적이 없다. 아버지의 부와, 권력과, 명예를 사랑하고 탐닉한 것이지, 절대 아버질 마음에 담아 둔 적 없다.
그러나 아버진 어머닐 사랑했다. 나도 그 거 하나 쯤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 마음에 든 멍을.
그래서일까. 너무 어렸을 때 얼마나 결혼이, 사랑이 얄궂은 감정인지 느꼈던 난,
사랑을 믿지 않았고, 그 쪽에 아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니, 않았었다.
*
전학을 왔다고 했다. 이름은 김세봉.
그냥 어딜 가나 있을 법 한 무던한 아이였기에, 그 누구도 그 아이에게 반감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를 가졌으면 가졌지.
학교에서 모든 애들은 나한테 잘 했었다.
그 때는 몰랐었지만 그 애들은 꽤나 때 묻은 애들이었다. 나한테 잘 보이려고 했던 거니까.
그게 내가 좋아서인지, 내 형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집을 제외한 그 어느 곳에서도 푸대접을 받았던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애는 좀 달랐다. 말 한 마디 더 붙이려고 하는 애들과는 다르게, 그 애는 나만 보면 벌레 보듯 피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차갑게 생겨서, 였겠지만 그 때는 그 애가 나를 미치도록 싫어하고,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 애가 싫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뭔가 싶었다.
난 벌레 같은 것도 싫어하고, 누구한테 장난이라고는 쳐 본 적이 없었었다.
근데 언제부터인지 내가 그 애한테 치기 시작한 건 장난이었다. 벌레를 잡아다 넣은 적도 있고....
낙서를 해 논 적도 있고.... 상상도 못할 장난이란 장난은 다 그 애한테 쳤었던 것 같다.
그 때마다 나를 향하는 눈동자에는 원망이 서려 있었지만 나한테는 그게 나름의 표현이었다.
나한테 좀 관심을 가져 달라고, 하는 발악이었겠지.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운명의 장난인지 그 애는 나와 학교를 내내 같이 다녔다.
첫 날, 교실에서 날 발견했을 때의 그 아이의 시선엔 매번 실망감이 차 있었다.
하긴, 자기를 못 살게 구는 애가 좋을 리 없었겠지. 그런데 내 머리는 그 때 그걸 이해를 못 했다.
나를 볼 때만 그 애는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래서 중학교 내내 갤 쳐다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아니, 그래서. 진짜 어제 엄마가 뭐라고 했는데 울 뻔했다니까.'
김세봉이는 억울한 얘기를 할 때면 눈이 커졌다. 쉬는시간엔 정말 충실하게 쉬기만 했다.
수업시간엔 주변의 애들이 말을 걸어도 건성으로 대답하고 수업만 열심히 들었다.
그렇지만 5교시에는 늘 꾸벅 꾸벅 졸았다. 그러다 다시 자기 볼을 꼬집고 듣는다.
썰렁한 농담을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만 보면 벌레 보듯이 피하면서, 남들이 말을 걸거나
도와주거나 빌려달라고 부탁을 해도 생긋생긋 잘만 웃으면서 대답해 준다. 난 그게 그렇게 불이 났다.
특히 그게 남자애라던가.... 남자라던가.
혹시나 수업시간에 김세봉 동공이 다른 애한테로 향해 있으면 내가 다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김세봉한테 말을 거는 남자애가 있으면 그게 그렇게 거슬린다.
왜, 왜. 왜 걔한테, 여자애들 많고 많은데 왜 굳이 김세봉이한테 말을 걸어야 되는데.
'세봉아. 나 샤프심 좀 빌려주면 안 돼?'
'응응. 잠깐만. 줄게.'
'고마워. 맨날 빌려서 미안.'
'아냐! 근데 왠만하면 좀 사지?'
김태형이 김세봉을 좋아한다는 건 왠만한 눈치라는 게 탑재된 애들이면 다 알 수 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같은 반도 아닌 놈이, 그것도 반과 반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먼데 여기까지 와서 샤프심을 빌린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남자애들은 그런 김태형을 보며 쪼다 새끼라고 하지만 쟤만큼 정성스러운 애도 없다며 혀를 찬다.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김세봉이는 김태형의 속내는 하나도 모른다는 듯 샤프심을 맨날 맨날 잘 빌려줬다.
그러면서 늘 눈이 휘어지게 웃어 준다. 아, 짜증나.
'와, 김세봉이 나한테 웃어줌.'
'......어쩌라고, 새끼야. 존나 징그러워.'
'아, 심장 아프다. 설레서 죽을 것 같아.'
'미친 새끼.... 그냥 사겨라. 빨리.'
김태형네 반 애한테 책을 빌렸던 터라 갖다주는 길에 들은 대화였다.
뭐가 그렇게 좋다고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설렌다고 말하는 김태형이 얄미웠다.
화가 날 일이 아닌데 그냥 화가 났다. 뭐, 사겨? 걔는 뭐 너 좋아한대?
그러다 김태형이랑 눈이 마주쳤다. 내가 너 노려보고 있던 거 안 건 아니지.
'어, 전원우.'
"......왜."
'넌 좋겠다. 세봉이랑 임원도 하고, 맨날 반에서 세봉이 보고.'
'......뭐래.'
나는 내가 왜 기분이 나쁜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냥 굉장히 화가 났다. 어딘가 답답한 게 뭐가 얹힌 기분이었다.
*
여느 때보다 일찍 잠에 깨서 일찍 학교에 왔다. 텅 빈 교실이 집보다 백 만 배는 더 편했다.
자리에 가방을 놓고, 할 게 없어서 잠시 엎드려 있다가 애들 책상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눈에 띄는 건 김세봉 책상이었다. 필기를 하다 만 건지 공책이 나뒹굴어져 있는 책상이었다.
그 책상의 의자를 빼서 앉았다. 남의 공책을 막 봐도 되나 싶었지만 그냥 보는 사람도 없었기에 보기로 했다.
덕지덕지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게 공부를 많이 했나 싶었다. 그리고 글씨는 생각보다는 어른스러웠다.
궁서체로 막 휘갈긴 것 같은 글씨 위에 중요한 부분은 형광펜을 그어놨는지 살짝 잉크가 번져 있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강조했던 건 별표도 쳐 있었다. 또 어지간히 하기 싫었는지 공책 귀퉁이에
[아 진짜 존나 하기 싫다......ㅋㅋㅋㅋㅋ...]
라고 쓰여 있었다. 평소에 욕을 잘 하는 애 같진 않은데 이런 데 욕이 써져 있으니 뭔가 웃겨서 웃음이 나왔다.
남 필기한 거 보는 게 뭐가 그렇게 좋고 웃긴 일이라고 웃음이 나오는 진 모르겠지만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중간엔 딴짓을 한 건지 낙서를 한 것도 있었고, 먹고 싶은 음식을 계속 써 놓은 것도 있었다.
'...아, 귀여워.'
'........'
'.....나 뭐, 와. 미쳤나.'
난 진짜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내가 내린 결론이 너무 충격적이었으니까.
난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비생산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열여섯에 내가 느낀 건 내가 그 애를 생각보다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김세봉이한테 비 맞고 가면 감기 드니까 우산 쓰라고 그냥 줄 수 있었을 텐데도,
내 입에서 나오는 건 내가 생각해도 어이 없을만큼 날카로운 말들의 연속이었다.
아마도 내 마음을 들킬까봐, 무의식적으로 내 머리가 틱틱대라고 말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가끔은 화가 나 보이기도 하고, 어쩔 때는 울 것 같기도 했던 김세봉에 표정에 아차 했다.
그러고 집에 가서 미친듯이 후회했다.
좋아하는 애한테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몰랐던 나는 서툴렀고, 그리고 못됐었다.
누가 봐도 전원우 김세봉이한테 존나 너무한다, 라는 생각 들 정도로 차갑게 굴면서 뭘 알아주길 바란단 말인가.
김세봉도 미웠지만 난 내가 제일 싫었다. 전원우 찌질이 병신새끼.
넌 정말 희대의 병신이야. 난 니가 존나 싫어.
정말 걔가 좋다면 김태형처럼 머저리같이 굴었어야 했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렇게 할 줄도 몰랐던 나였다.
사랑받는 법을 몰라, 사랑을 주는 법도 몰랐다.
*
그래서 내가 한 최고의 유치한 방법은 내 쪽으로 걜 데려오는 게 아니라,
걔가 가려고 했던 모든 길을 다 망쳐놓는 거였다.
갖고 싶은 게 생기면 다 가질 수 있었던 나한테 있어서 못 가지는 게 생겼다는건 꽤 큰 문제였다.
그래서 걜 못살게 굴었다.
공교롭게도 김세봉이랑 나랑은 같은 대학에 갔다.
김세봉이는 그걸 정말 싫어했다. 저 싸이코 새끼. 하면서.
그냥 짝사랑만 하다가 조용히 고등학교에서 갈린 김태형과는 다르게.
대학에선 꽤 장애물이 많았다.
'야, 원우야. 너 세봉이랑 친하다며?'
'....아, 친한 거....'
'걔 인기 엄청 많던데. 착하고, 귀엽고. 아무튼 그렇다고.'
'......걔가요?'
'응. 너 완전 공공의 적이야. 너 걔랑 사귀냐고. 뭐 그런 얘기도 있고.'
'......아, 하하.'
'그리고 경제학과 과탑 최승철 알지. 최승철도 걔한테 관심 있다던데. 아닐 수도.'
'승, 승철선배가요?'
'아, 아닌가? 원래 여기 소문이 많아서.'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들으면 들을 수록 멘탈이 깨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최승철은 또 뭐야. 김세봉이한테 꼬이는 애들은 뭐가다 이렇게 스케일이 커.
최승철이라 하면 학교에서 꽤 이름 날리는 사람이었다. 잘생기기도 하고, 인기도 많고.
물론 그만큼 말도 많고 관계도 복잡한 사람이었다.
내가 김세봉이었어도 최승철한테 안 넘어갈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새삼 들었다.
나 존나 왜 살지. 전원우 병신.
다 내가 벌인 일이고, 철없던 내가 만든 상황이라지만 화가 났다.
왜 난 맨날 보기밖에 못 해.
내 자신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김세봉 주위를 뱅뱅 도는 것과,
제발 둘이 잘 되지 말길 바라는 것 뿐이었다.
그렇지만 현실은 정말 냉담했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눈치가 빨랐던 난 단번에 알아차렸다.
최승철하고 김세봉이 만난다는 거, 꽤 됐다는 것.
둘은 안 들키고 잘만 사귀었고, 내 속은 까맣게 탔다.
어느 날 김세봉이 강의실에 어딘가 모르게 엉성한 자세로 들어왔을 땐 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
상상하기도 싫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기 때문이었다.
누가 내 걸 뺏어간 것 마냥, 어린애처럼 난 속이 탔다.
'너 나한테 왜 전화했....'
'아, 원우야. 세봉이가 너한테 연락했었어. 근데 지금 뻗었네...'
'.....술 마셨죠.'
'아, 그거. 아, 하하. 어쩌다 보니까 저렇게 됐네.'
최승철한테 전화하지 왜 나한테 했대.
무슨 오밤중에 전화를 다 하길래 뛰쳐나갔더니 테이블 위에 엎드려서 제 몸도 하나도 못 가누는 김세봉이 보였다.
무슨 애가 겁도 없이 저 시꺼먼 사내놈들 투성이인 술자리에 나가?
1차적으로 화가 난 건 애가 꽐라 될 때까지 냅둔 저 자식들 때문이고,
2차적으로 화가 난 건 이런 데 가는 거 가지고 뭐라 안 하는 최승철이었다.
어떤 여자인 줄 알고 막 방치를 해. 어이가 없었다.
나한테 전화한 게 못마땅하단 듯 보는 그 놈들을 노려본 후에 김세봉을 데리고 나갔다.
'야아. 너 나 시러하지?'
'......내가?'
밥 좀 먹지. 최승철이 알면 노발대발 하겠지만 김세봉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서
김세봉을 등에 업고 갔다. 평소엔 그렇게 틱틱대며 말하던 애가 술에 취하니 말꼬리를 질질 늘였다.
'어어. 너 나 진짜 시러하잖아.'
'나 너 안 싫어해.'
'아니야. 넌 나 싫어해애.... 막, 막. 너 나 한심하게 생각하잖아. 그치.'
'......널?'
으응. 대답한 김세봉이 뭐라뭐라 하더니 최승철 보고 싶어. 라고 말했다.
그렇게 보고 싶었나. 술 취했는데도 말할 정도면.
'오빠가아, 너랑 나랑 뭐냐고, 마악. 물어본다?'
'.......'
'진짜 웃기지 않, 냐? 너랑 나랑 뭐가 이상한데? 그리고오. 자기는 여자 더 많으면서어....'
'.......'
최승철이 여자가 많은데다가 그 관계들이 다 좋지 않다는 걸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좋은 남자도 아니고, 정확히 말하자면 별로인 남자다.
남자는 남자가 보면 안다고. 순진한 김세봉이한테는 자기밖에 모르는 남자로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그냥 미친놈일 뿐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만. 왜 너랑 사귀는 걸 비밀로 했겠어, 바보야.
'그럼 헤어지면 되겠네.'
'.......'
'너만 좋아해주는 사람 만나.'
'.....'
'꼭 입에 발린 말 잘 해야 너 좋아하는 거 아니고 너 사랑해주는 거 아니야.'
'......'
'왜 사서 상처를 받아.'
'......그런 사람이 어, 디 있다고.'
'주변에 잘 둘러 보면 있겠지.'
나라던가.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첫사랑은 참 아프다. 이루어지지 않아서인 것도 있지만.
그 서투름과 실수들이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어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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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우의 번외 1이네요!
이게 원우의 번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이께찌만....
튼 원우가 아는 승철이와 여주가 아는 승철이는 많이 달라요8ㅅ8
시험이 낼 모레인데도... 결국은 밤에 친구 노트북을 뺏어서 글을 썼습니다..
여전히 똥글... 여러분 시험 잘 봐서 올게요! 사랑합니다 하트하트
저너누ㅠㅠㅠㅠ사당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