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대는 다시 고등학교 시절 그 모습 그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는 다정했고 어른스러웠다. 가끔 내가 서운하게 굴 때마다 찡찡대는건 똑같았지만 말이다. 김종대는 역시 변태가 맞는지 늘 회사에서의 아슬아슬한 스킨십을 즐겼다. 다른 사람이 안 보는 틈을 타 손을 잡는다든가, 몰래 살짝 볼에 입 맞춘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늘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히고 지금 미쳤냐며 김종대를 나무랐다. 그 때마다 김종대는 말간 웃음을 지으며 왜애- 좋아서 그러지, 하고 애교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덕분에 나는 피말려 죽을 것 같은 지경이었지만 말이다.
사실, 아직 김종인 대리와의 관계 또한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김종인 대리를 거절하기엔 내 은근히 소심한 성격이 따라주지 않았다. 김종대는 내가 김종인 대리와 얘기를 나눌 때마다 불퉁한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입만 툭 내밀고 있을 뿐 딱히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짜증낼까봐 그러는것 같은데, 딱히 상관 없다고 몇 번을 말해도 김종대는 항상 내게 조심스러웠다.
유치한 김팀장 13
그 날 아침은 김종대의 차를 타고 회사를 가는 내내 쫑알 대야 할 김종대가 조용했다. 뭔가 이상해 김종대를 바라보자 응, 왜? 하고 역시 다정하게 답해주는 그였다. 그제서야 그의 목소리가 묘하게 가라앉은게 느껴져 아프구나, 싶었다. 그의 이마로 손을 가져다댔다. 미열이 느껴졌다.
"김종대 너 아파?"
"아니, 하나도 안 아픈데?"
"뭐래, 이 바보가."
"정말이야, 하나도 안 아파."
"...거짓말."
"그리고 아파도 너만 보면 싹- 낫는데에-?"
김종대가 눈을 접어 웃으며 내게 애교를 부렸다. 이걸 확, 아픈 애를 때릴 수도 없고. 김종대를 째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바본가 진짜... 어제 나 기다리겠다고 집 앞에 있겠다 할 때부터 말렸어야 했다.
"...그러게 내가 기다리지 말랬잖아."
"너 보고싶은걸 어떡해..."
"회사에서도 만나 놓고서는,"
"회사에서는 너랑 이렇게 못 하잖아."
"뭐래, 하면서."
김종대가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김종대의 뜨거운 손이 내 손 위에 내려앉았다. 가끔 잔기침 까지 해대는게 몸 상태가 심히 좋지 않아보였다. 김종대의 얼굴을 이곳 저곳 만지작 거리며 열을 확인했더니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는 김종대다.
"야, 지금 얼굴 빨개질 때야?"
"ㅇ,왜...좋아서 그러지."
"지금 열까지 나는구만 진짜, 내가 어제 기다리지 말랬지?"
"히잉..."
"뭘 또 히잉이야!!"
어린애같은 김종대의 투정에 한숨만 나왔다. 김종대 볼을 꼬집고는 확 잡아당기자 그래도 뭐가 좋다고 표정을 구겨뜨리며 애교를 부리는 김종대였다. 얘는 정말 바본가, 어후.
"야, 김종대."
"응?"
"오늘 야근하지 마."
"...오늘 할 일 많은데..."
"오늘 칼퇴해, 아니, 월차내."
"...싫어."
"아, 왜 똥고집이야 또!! 왜!!"
"퇴근 빨리하면 너 볼 수 있는 시간 줄어들잖아..."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알겠어, 오늘 나도 일 끝내고 니네 집 갈테니까 오늘은 퇴근 좀 빨리해, 응?"
"정말?"
김종대는 다시 싱글벙글 해져서는 헤헤 하고 실없이 웃었다. 와, 정말 단순하다. 저렇게 인생 살면 인생 살맛나긴 하겠다. 아무리 보면 볼 수록 약간 새끼강아지 같단 말이지. 좀 만 불만있으면 그르렁대다가 바로 좀 잘해주면 생글생글대는게, 딱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꼴이었다.
"아프면 좀 말해."
"응!"
"걱정돼."
"헐, 대박..."
내 걱정된다는 말에 김종대는 내 두 손을 꼭 잡고는 감동이라는 듯 눈을 반짝거렸다. 그에 살짝 웃으며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줬더니 말로는 하지마아...하고 작게 중얼거리면서 은근히 고개를 숙여준다. 어휴, 귀여워.
***
"팀장님 많이 아프신가봐요."
백현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속삭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다며 방글방글 웃던 김종대는 어느 순간부터 끙끙대고 있었다.
"여자친구가 간호해줘야 되는거 아니에요?"
"ㅇ,여자친구라뇨!"
백현씨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여자친구라뇨! 하며 말까지 더듬어버리고 말았다. 백현씨는 그저 이런 나의 반응이 재밌는지 한참을 웃었다.
"ㅇ,여자친구라뇨!!"
"...따라하지 마세요..."
백현씨는 계속해서 깐족거리며 내 말투를 따라했고 그 말을 무시하고는 그저 일에 집중하려...했지만 아파서 끙끙대는 김종대를 보니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백현씨가 옆에서 나를 쿡쿡 찌르며 점심은 어떻게 할거냐고 물어봤다.
"점심은...그냥 백현씨 다른 분하고 드세요."
"아, 여주씨는 팀장님이랑 같이 있어야지~"
"..."
백현씨를 아무 말 없이 휙 노려보자 살짝 몸을 떨더니 어후, 살벌하네. 농담이에요, 농담! 하고는 백현씨는 둘러댔다. 그러다 김종대 쪽을 바라보자 한숨이 새어나왔다. 김종대 아픈게 걱정되기도 하는데...
"팀장님, 약은 드셨어요?"
"팀장님 아프지 마세요..."
김종대 아픈걸 핑계로 옆에 달라붙어있는 다른 여사원들이 더 신경쓰였다. 괜히 심통이 나 툴툴대며 키보드를 힘을 줘서 두드렸다. 백현씨는 그런 나를 힐끔거리다 말을 꺼냈다.
"짜증내지 마요."
"..."
"그래봤자 승자는 여주씨잖아요."
"..."
"그리고 저런 여자들보다 여주씨가 훨씬 매력있고 좋은 사람이에요."
"..."
"그냥, 가끔 여주씨가 너무 주눅드는것 같아서,"
백현씨가 내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백현씨의 그 말에 질투가 나 뚱하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백현씨도, 좋은 사람이에요."
어쩌면 김종대도, 백현씨도, 이런 사람들이 내 옆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
"여주야..."
"바보야, 진짜 속상하게..."
점심시간이 되자 백현씨는 내게 눈을 찡긋 해보이더니 모든 직원들을 데리고 한번에 사무실에서 훅 빠져나갔다. 덕분에 사무실에는 김종대와 나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김종대는 나를 꼭 끌어안고는 뜨거운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대었다. 덕분에 그의 뜨거운 숨 또한 내 입술을 통해 느껴졌다.
"미쳤냐, 진짜... 숨 뜨거운 것 좀 봐."
"그래도 약 먹긴 했는데...이제 괜찮아 지겠지..."
"감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아냐?"
내 말에 작게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던 김종대는 내 목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뽀뽀하고 싶은데에-"
"..."
"나 감기걸려서 못하잖아..."
김종대는 아쉬운 듯 몇 번 더 입을 맞추더니 내게서 떨어졌다.
"...나 감기 걸려도 되는데?"
"아니, 안돼."
김종대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나를 밀어냈다. 그러고는 내 볼을 꼬집으며 장난스레 너 감기걸리면 나 걱정되서 못살아-하고 말했다.
***
"여주씨, 제가 도와줄게요."
꽤나 무거운 서류를 들고 낑낑대며 복사기 쪽으로 향하자 어디선가 김종인 대리가 나타나 도와주겠다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애매한 태도였지만, 김종대 집에서도 그런 일도 있었고...거절하기 위해 괜찮다며 몇 번을 말했지만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김종인 대리였다.
"진짜 괜찮아요!"
"제가 도와 드린다니까요."
"저 정말 괜찮-악!"
수많은 에이포용지를 들고 김종인 대리와 티격대다 중심을 잃는 바람에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내 앞에 서있던 김종인 대리의 품 안에 꼭 안기는 꼴이 돼버리고 말았다. 둘 다 놀라 한참 정적이 흘렀다. 이내 김종인 대리는 얼굴을 가까이 하며 괜찮아요? 하고 물었고 나도 급하게 괜찮다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하필 그 때, 김종대가 들어오며 그 장면을 목격한건 운명의 장난이 아닐까.
***
김종대는 내게 단단히 삐진 상태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째려보거나, 입술을 쭉 내밀고 흥! 하는 듯 고개를 돌렸다. 사실 그 모습마저 귀엽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상당히 중증인건 맞는 듯 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서 어휴! 귀여워! 하며 머리 쓰다듬어주고 싶은데...김종대의 단단히 삐진듯한 눈빛이 보여 그만뒀다.
그냥 조금 이따가 달래주지 뭐, 하고 그냥 일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김종대는 이래서 더 삐진건지 일부러 나 보라는 듯 틱틱거렸다. 특히 다른 여사원들에게 눈웃음을 치며 히죽히죽거리는데, 그 꼴이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짜증도 났다.
"팀장님, 이거 드세요."
"감사해요-"
또, 저 눈웃음. 저렇게 웃으면 십중에 구의 여사원들을 얼굴을 붉히고는 했다. 그리고 나중에 지들끼리 보여서 김종대에 대해 말하지. 오늘만 해도 여사원들이 김종대 얘기를 하는걸 들은게 몇 번인데. 오늘따라 김종대 귀엽다고 좋아하더라. 그거 다 나 때문에 삐져서 저런건데 말이다.
김종대는 내가 반응이 없자 더 애가 타기 시작했는지 이제는 내가 뭘 해도 도끼눈을 뜨고 노려봤다. 나도 지금 티를 안내서 그렇지 애가 타기는 마찬가지였다. 어후, 저 초딩을 어떻게 하면 풀어주지. 멍하니 인터넷 검색 창에 '남자친구 화 풀어주는 법' 따위를 검색할 뿐이었다. 지식인을 돌아다녀봐도 중고등학생이 올린것 같은 질문에 한숨을 내쉬고는 창을 닫았다.
그러다 옆에 보이는 백현씨에 혹시나 도움을 청할까 망설이다 말을 걸었다.
"...저기, 백현씨."
"네?"
"...저어..."
"?"
"남자들 기분 안좋을때, 그니깐, 어, 삐졌을때, 풀어주려면 어떡해야 돼요...?"
내 말에 한참을 의아한 표정으로 있던 백현씨가 빵터져서는 한참을 웃었다. 이 와중에서도 내 등이 따가운게 김종대가 나를 노려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팀장님 삐졌죠?"
"...에? 네? 아닌데..."
"거짓말은, 여주씨 남자친구 삐지셨잖아요."
"..."
그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김종대가 내 남자친구라니, 아직, 아직까지는 아닌데...
"자고로 남자는 애교하고 스킨십에 약한 법이에요."
"..."
"여주씨 화이팅!"
"..."
"팀장님은 여주씨랑 동갑이니까, 오빠 소리 하면 좋아할것 같기도 하고."
애교에 스킨십이라니... 얼굴이 터질 정도로 빨개지기 시작했다.
***
"김종대!"
"..."
"ㄱ,김종대!"
"...왜."
"너 나 좀 따라와봐."
김종대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 야!!"
"...너 지금 화낸거야?"
김종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민망해서 그래, 민망해서... 다시 목소리를 큼 가다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김종대를 불렀다.
"종대야."
"..."
"우리 잠깐 얘기 좀 하면 안돼...?"
눈꼬리를 추욱 내리고는 말하자 김종대가 나를 한참 바라보다 내가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왔다.
김종대를 억지로 휴게실로 질질 끌고와서는 의자에 앉혔다. 마침 휴게실은 아무도 없었고 휴게실의 문을 걸어잠그자 김종대가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는것이 보였다.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는 김종대를 억지로 다시 앉혔다. 김종대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ㅈ,지금 뭐하는거-"
"야, 떨리니까 입 다물어."
"..."
한참을 김종대 앞에 서있다 눈을 딱 감고 김종대의 다리 위에 앉았다. 김종대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는 용기내어 말을 꺼냈다.
"어...우선, 김종인 대리님이랑 아까 그러고 있었던건 미안해."
"..."
"그거, 정말로 그냥...내가 무거운거 들고 있다가 넘어져서 대리님이 잡아주신거야...."
"..."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라고."
"..."
"진짜, 나는 너 밖에 없는데..."
"...응?"
"나는, 너 밖에 없는데 너가 막 불안해하고 그러면...진짜..."
점점 말이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김종대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지,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 김종대의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미안해. 정말로 내가 미안해..."
"..."
"그런데 나는 정말로, 너한테 밖에 관심 없어..."
"..."
"ㅇ,오..."
"...?"
"오빠..."
"...오...빠...?"
김종대는 얼이 빠진것 같았다.
"ㅈ,종대오빠..."
"너 지금 나 오빠라고 한거-읍!"
그냥 그의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워 먼저 입을 맞춰 말을 막아버렸다. 처음에는 당황했는지 딱딱히 굳어 어찌할 줄 모르던 그가 이제는 나를 먼저 이끌기 시작했다. 가벼웠던 입맞춤이 점점 더 진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입을 맞추다 먼저 입을 땐 그가 입술을 스치며 말을 했다.
"...이런건 어디서 배웠어."
"백현씨가, 남자들은 오빠 소리 하면 좋아한다고..."
"백현씨?"
백현씨라는 말에 김종대는 살짝 인상을 쓰더니 다시 급하게 입을 맞췄다. 한참 휴게실에는 질척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점점 더 몽롱해지는 분위기에 그의 어깨를 꽉 잡았고 내 입술에서 떨어진 그의 입술이 내 귀를 향했다.
"...아, 야아-"
"..."
"종대야-"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의 풀린 눈이 내 눈에 들어왔다. 왜, 하는 듯한 그의 눈빛에 멍하니 바라보다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자 다시 내 입술을 급하게 찾는 그였다. 내 블라우스 단추로 향하는 그의 손을 급하게 잡았다.
"ㅈ,지금 여기 회사인데..."
내 말에 입술을 뗀 그가 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김종대의 손을 저지하던 내 손을 가볍게 포박한 그가 작게 말했다.
"...그럼, 집 가면 마저 해도 돼?"
"...어?"
ㄱ,그건 아닌데... 그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내 당황한 표정을 보던 그가 피식 웃더니 나를 내려놓았다.
"너 감기 옮겠다."
"아...맞다..."
"내가 간호 해줄게."
말려올라간 치마를 곱게 펴주며 그가 웃었다.
***
김종대는 결국 월차를 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아까 키스할 때도 입이 너무 뜨거워서 놀랐는데, 오후가 갈 수록 점점 열이 올라 결국 김종대는 월차를 내고 말았다. 김종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괜찮다며 힘없이 웃어보인 김종대는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김종대가 사라진 쪽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시선을 돌렸는데 김종인 대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웃어보이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 때 김종인 대리에게 메신저가 왔다.
[여주씨.]오후2시33분
[네?]오후2시35분
[오늘 끝나고 한잔 할래요?]
[둘이서]오후2시36분
[아...]
[잘 모르겠는데...]오후2시38분
[할 말 있어서 그래요]오후2시40분
...할 말? 할 말이 있다는 말에 고민을 하다 그래요, 하고는 타자를 쳤다. 문득 확신이 들었다. 이제는 김종인 대리에게 확실하게 말해야겠다. 나는 대리님께 관심이 없다고, 좋아하는 사람도 따로 있다고 말이다. 그게 나, 김종대, 김종인 대리 모두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
작은 선술집은 적당히 소란스러웠다. 너무 시끄럽지도, 너무 조용하지도 않아 둘이서 얘기를 나누기에 딱 적당한 정도였다. 김종인 대리가 나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술을 들이킬 뿐이었다.
어색하게 분위기가 흘러가니 나도 모르게 계속 아무 말 없이 술만 마시게 되었다. 벌써부터 취했는지 살짝 눈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 때 김종인 대리가 내 이름을 불러왔다.
"여주씨."
"네?"
"제가 조금 성격이 급해서."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살짝 팔을 괴더니 나를 빤히 보았다.
"저번에 말했잖아요. 관심 있다고."
"...네."
"이제, 대답해줄 수 있어요?"
"..."
"저 어때요?"
사고가 굳어가는 듯 했다. 얘기해야한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그가 돌직구로 말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술을 한모금 마시고는 용기를 내었다.
"...죄송해요."
"..."
"저, 좋아하는 사람 있-"
"팀장님이죠?"
"...네?"
"김종대 팀장님, 맞죠?"
"ㅇ, 어떻게-"
"여주씨 좋아한다면서, 그 정도도 모르면 말도 안되죠."
김종인 대리가 피식 웃었다.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는데,"
"..."
"그냥, 뺏기기 싫더라구요."
"..."
"한번 내꺼로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보기좋게 실패했네요."
그가 힘빠진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그를 따라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한참 우리의 테이블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팀장님하고는, 만나고 있는 거에요?"
"..."
"여주씨 입사하신지 얼마 안됐잖아요, 언제부터..."
술기운이었다. 김종인 대리에게 나와 김종대에 대해 하나하나 얘기를 꺼낸건 말이었다. 분명 내일 아침이 되면 후회할게 분명했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이 중요한걸.
내 얘기를 처음부터 듣기 시작한 김종인 대리는 꽤나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제가 처음부터 낄 자리는 없었네요."
"저는...김종대, 진짜, 좋은데에..."
"그런것 같아요."
"근데, 아직 김종대한테도 사실대로 못 말했고..."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서로 좋아한거면 인연인거죠."
"대리님, 이거 비밀이에요오-"
"알아요."
김종인 대리는 이내 나보고 많이 취한 것 같다며 나를 부축해 일어섰다. 김종인 대리가 집이 어디냐고 묻는 말에 나는 헛소리만 내뱉었다.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돌이켜보자면 그 때도 김종대가 좋다는 등의 헛소리를 했던것 같고.
평소보다 과음한 탓인지 토기가 몰려왔다. 나를 단단히 붙잡고 있던 김종인 대리를 뿌리치고는 급하게 바로 옆 건물 1층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길거리에 토하면 민폐라는 생각은 들었나보다.
화장실에서 한참 토하고 나서야 다시 건물에서 나올 수 있었다. 김종인 대리는 벽에 기대서있다 건물에서 나오는 나를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외투에 다 묻었네, 세탁비 많이 나오겠다."
"아..."
"기다려봐요, 그 옷 입고 집까지 가긴 좀 그러니까 내가 내 집가서 옷 가져올게."
"저는-"
"괜찮다는 말 그만해요. 어차피 십분만 걸으면 집이야."
정말로 그의 집은 가까웠다. 그의 집에 도착해서 들어가려던 그는 내 외투와 블라우스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잠깐 들어와서 옷만 갈아입고 나가요."
"..."
"이상한짓 안하니까 빨리."
그의 말에 그의 집에 실례합니다아- 를 외치고는 들어왔다. 그는 내게 누나것이라며 블라우스 하나를 내밀었고 화장실을 손으로 가리켰다.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였다. 김종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여어-"
-...너 뭐야.
"우웅...?"
-술 마셨어?
"응..."
-누구랑.
"김종인 대리님이랑!!"
-...
"나 지금 대리님 집이다아-"
-...뭐?
김종대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 밖에서 여주씨, 다 갈아입었어요? 하는 김종인 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종대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미쳤냐, 너? 하고 말했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뭐가아..."
-야, 아, 씨발. 김여주.
"욕하지마, 끊을거야!"
그가 욕을 하자 나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욕 하지 말라고! 나는 욕하는 남자 싫단 말이야...그가 욕을 하자마자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에게서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왔지만 심통이 나 받지 않았다.
"다 됐어요?"
"네!"
"이제 빨리 집 가요, 택시 잡아줄게."
김종인 대리는 내게 집 주소를 캐물어 택시를 태워줬다. 그는 내게 택시 번호를 기억하고 있을 테니 집에 도착하는 대로 연락하라고 말했다.
집에 도착해서는 침대에 쓰러지다시피 했다. 내 핸드폰은 쉼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런 핸드폰이 시끄러워 배터리를 빼버렸다.
"...졸려여...."
그리고, 그 상태로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
"...아, 미친. 어떡해."
그 다음날 아침, 나를 미치게 한것은 비단 숙취 뿐만이 아니었다. 김종대가 단단히 오해했을게 틀림없었다. 핸드폰에 베터리를 넣기 조차 겁이 났다. 어떻게 김종대와 나와의 관계를 여기까지 만들어놨는데, 어제 부로 모든게 망가지게 생겼다.
일단은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 혹시나 그럴 리 없지만 김종대가 나를 데리러 오거나 하면 둘만 있어야 할 상황이 더 가까워질테고, 사실, 아직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지도 모르겠다. 조금,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회사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불안한 마음에 다리를 덜덜 떨었다. 김종대는 나에게 실망할 대로 실망했을 것이다. 김종대보고 걱정하지 말라고, 너밖에 없다고 말한게 바로 어제인데. 내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한심했다.
도착한 사무실에는 역시 아무도 출근을 하지 않아 나 혼자였다. 한명 한명씩 출근을 할 때마다 혹시 김종대일까 겁이 났다. 하지만 김종대는 출근시간이 훨씬 지나서도 출근을 하지 않았다.
복도를 왔다갔다 거리다 김종인 대리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서로 민망해 아무 말도 않던 우리는 동시에 말을 꺼냈다.
"여주씨."
"저, 대리님."
"아, 여주씨 먼저 말하세요."
"아니, 대리님 먼저..."
"먼저 말해요."
"...그럼, 저, 어제 빌려입은 대리님 옷 내일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그럼 그렇게 해-"
김종인 대리가 무심코 고개를 돌려서는 당황한 듯 말을 멈췄다. 그 시선을 따라가지 김종대가 딱딱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김종인 대리가 먼저 급하게 변명을 꺼냈다.
"아니, 저, 팀장님. 그게-"
"둘이 분위기 좋아보이던데."
"팀장님. 그게 아니라,"
김종대가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온 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내가 방해한건가."
"정말 아닙니다. 팀장님."
"팀장님, 정말, 저는-"
더듬더듬 꺼낸 내 변명의 말을 김종대는 싹 무시하고 내 팔목을 강하게 우겨잡았다. 김종인 대리의 당황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김종대의 악력에 이끌려 그 상태로 비상구로 향했다. 비상구로 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힌 문을 김종대는 철컥 잠궜다.
김종대와 나 사이에는 한참 불편한 침묵만이 존재했다.
"종대야, 나는 정말-"
"야."
"...응?"
"너는 내가 병신으로 보여?"
그의 말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눈빛보다 날카로운 눈을 하고 있었다.
"너는 정말 내가 우스웠겠다, 그치."
"종대야."
"그딴식으로 내 이름 부르지 마."
"..."
"니가 하는 행동, 말, 이제 하나도 못 믿겠으니까."
"..."
그가 어이가 없다는듯 헛웃음을 쳤다.
"...평생 그 딴 식으로 살아."
"..."
"남자들 속이고 다니면서."
"..."
"이런게 좋아, 너는? 재밌어?"
그의 말에 눈물이 흘렀다. 내가 잘못한거긴 한데, 맞는데... 너무 하잖아, 저건.
"종대야, 정말로 나는-"
"너가 왜 우는데."
"..."
"너한테 울 자격이나 있긴 해?"
"..."
"지금도 연기하는 거지."
"..."
"소름돋는다, 정말."
그가 손을 들어올려 마른 세수를 했다. 그 또한 마음이 복잡한 듯 했다.
"나는, 정말로 너가 뭘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
"십년전의 너나, 지금의 너나, 다를게 없네."
"..."
"도대체 뭐 하나 나한테 진실인게 있었어?"
그의 말에 끝없이 눈물이 흘렀다.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 그의 앞에서 우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모진 말을 쏟아냈다.
"내가 어디까지 너한테 실망해야 돼."
"..."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제발 내 인생에서 좀 사라져."
그의 마지막 말에 온 머리 속이 하얘졌다.
"꺼지라고, 좀."
그 말 만을 남기고 그는 떠나갔다.
닫힌 문을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비상구에 멍하니 서있었다.
***
백현씨는 내 꼴을 보고 많이 놀란듯 했다. 하기야 내가 봐도 내 꼴이 참 우스울 터였다. 팅팅 부은 눈에, 정말 가관이었다. 백현씨는 급하게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백현씨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따뜻한 커피를 손에 쥐어줄 뿐이었다.
"백현씨..."
"네."
"저 이제 어떡해요..."
"괜찮아요."
"저는 정말, 이제는 힘들어요."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도 지친다. 어쩌면 김종대와 나는 처음부터 운명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내가 미국을 가면서 틀어진 운명은, 이제와서 바꾸기에는 너무 늦어져있었다.
백현씨는 괜찮다고 말하며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아니, 하나도 괜찮지 않아요. 거짓말에 대한 대가는 너무도 크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
결국 월차를 낼 수밖에 없었다. 일을 해야 하면서 일은 손에도 못대는 나를 보고 백현씨는 보다못하고 대신 월차를 내주었다. 백현씨는 나를 어서 집에 가라고 등떠밀었다. 억지로 집에 왔다. 억지로라도 김종대를 잊기 위해, 오지않는 잠을 청했다.
몇 시간만에 눈을 뜨고 힘겹게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입으로 잔기침이 세어나왔다. 어제 김종대하고 그렇게 한참 키스했더니, 결국 감기에 걸린 듯 했다. 그 와중에도 김종대의 '내가 간호해 줄게.'하던 말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 이제는, 꿈도 못 꾸겠지.
핸드폰에는 김종인 대리와 백현씨에게서 연락이 와있었다. 김종인 대리의 연락은 차마 보지도 못했다. 못된걸 알지만, 어쩌면 나와 김종대가 이렇게 되게 된 원인 중 하나인 김종인 대리가 미웠다. 원망스러웠다. 때마침 걸려오는 백현씨의 전화에 전화를 받았다.
-여주씨, 괜찮아요?
"네..."
-...여주씨 아파요?
"모르겠어요, 감기걸린것 같은데..."
-괜찮은거 맞아요?
"괜찮아요."
-내일 회사는 나올 수 있어요?
"...네, 갈거에요."
솔직히 회사를 가기도 무서웠다. 이제는 나도 지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종대의 얼굴을 볼 자신 또한, 없었다.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와 따가운 목을 애써 무시하고는 다시 억지로 잠을 청했다.
***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간 회사는 역시 가서 좋을게 없었다. 김종대는 이제 아예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차라리 전에는 나를 신경쓰면서 괴롭히기라도 했지, 이제는 그냥 나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나에게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아픈 몸에, 정신적인 면까지 한계를 달리고 있었는데, 나를 결정적으로 모든걸 그만두고 싶게 만든건 그날 오후의 일이었다.
하필 쉬는시간에 우리 직원들의 수다 주제는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직원들은 저마다 자기는 답답한 사람이 싫다, 이기적인 사람이 싫다 등의 말의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김종대가 사무실에 들어왔고, 직원들의 관심은 그 쪽으로 쏠렸다.
"팀장님, 팀장님은 싫어하는 사람 있어요?"
"...싫어하는 사람이요?"
"싫어하는 유형이요."
그 말에 김종대는 흠...하며 고민했다. 그리고 김종대와 나의 눈이 마주친건 순간이었다. 김종대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김종대는 시선을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거짓말 하는 사람이요."
"..."
"거짓말 하고,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사람이요."
"..."
"그냥 싫은 정도가 아니라, 제 눈 앞에 안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하며 김종대는 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순간 토기가 몰려왔다. 화장실로 급하게 가 헛구역질을 해댔다. 눈물이 흘렀다.
김종대는 내가 눈 앞에서 사라졌음 좋겠다고 했다. 나에게 화내던 날도 말이다. 나보고 인생에서 사라지라고, 꺼지라고 했다. 어쩌면. 그래, 내가 그의 인생에서 사라져주는게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에게도, 나에게도. 더 좋은 선택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