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중간첩 (Double Agent)
야, 너 어디, 읍.
….
정호석 내가 우리 어디 갈 데 있다고 하지 않았냐?!
OT가 끝나자마자 나에게 다가오는 정호석의 입을 재빠른 손길로 막은 정수정은 나의 옆에서 우뚝하니 앉아 있는 전정국을 마주하곤 뒤에서 기웃거리는 김남준을 데리고 금방 강의실에서 사라진다. 첫 주라 한 시간 일찍 끝난 OT에 꽉 차 있던 강의실은 금새 쥐도 새도 모르게 빈 강의실이 되어 고요해졌고, 그 사이 전정국과 나는 덩그러니 남겨졌다.
내가 살게요. 밥이나 먹으러 가요, 선배님.
가방을 무릎에 고이 올린 채로 아까부터 멍하니 허공만 바라 보고 있던 날 턱을 괴고 빤히 바라보고 있던 전정국이 의자를 끌어 자리에서 일어난다. 고요한 강의실에 끼익하고 나무가 끌리는 소리가 우렁차게 나고, 괜한 심장이 덜컹거렸다. 왜, 하필이면 조용한 상황에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 심장이 떨리고 막 그러는 거 말이다, 내가 전정국이랑 둘이 있어서 떨리고 그런 게 아니라….
… 뭐?
밥, 먹으러 가자고요. 왜요. 이것도 다나까로 해드려요 선배님?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무슨 너랑 밥을 먹으러 가!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또 나의 머릿 속을 복잡하게 헤집어 놓는 전정국 앞에서 간신히 정신줄을 부여잡고 입을 열었다. 세상이 두 쪽이 나도 너랑, 그러니까 전정국 너랑은 절대 저얼대로 겸상 같은 거 안해. 무릎 위에 올린 가방을 어깨에 단단히 매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전정국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똑똑히 말했다. 제발 좀 알아 먹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으며. 그런 나의 살벌한 예고 아닌 예고에도 전정국은 피식 웃음을 흘릴 뿐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다.
선배가 되서는, 마음 좀 곱게 쓰시죠? 내가 마음에도 없는 존댓말까지 꼬박꼬박 해드리는데.
이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 네? 오히려 번뜩 눈빛을 바꾸고선 이미 가까워질대로 까워진 나와 저의 얼굴 사이 간격을 좁힌다. 이 새끼 이거 진짜…. 되바라진 전정국의 언변은 가까워진 얼굴 사이를 머릿 속에서 잊어버리게 할 만큼 나를 열 받게 만들었다. 이미 열이 오를대로 올랐는지 양쪽 귀가 뜨거웠다. 어렸을 때부터 화가 나면 귓가부터 빨개지는 이상한 습관이 있어 화가 날 때마다 나는 귀가 시려운 사람처럼 양 손을 들어 귀를 덮었다. 지금은 그런 걸 신경쓸 때가 아닌 것 같지만.
너 진짜 내가 만만한가 본데, 어?
그럴리가요. 안 만만한데. 하늘 같은 선배님이신데요.
야, 내가 칭찬하는 거랑 비꼬는 거 구분 못할 만큼 병신으로 보여?
나의 질문에도 한동안 묵묵부답 조용한 전정국에 삐딱하게 틀고 있던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하자 독기를 품은 내 눈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전정국이 닿을듯 말듯하던 얼굴 사이를 다시금 좁혀오더니 이마와 이마를 맞댔다. 야, 야. 전정국.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
아씨, 하필이면 핸드폰을 놔,
….
….
저, 정호석.
… 야, 미, 미안하다. 그러니까, 그게, 하던 거 마저 해라. 미안!
허겁지겁 강의실 안으로 들어오던 정호석이 열었던 문을 곱게 닫고 발걸음을 되돌렸다. 하필이면 딱 오해하기 좋게도 전정국과 나 사이의 간격은 이마가 닿을 정도로 가까웠고, 정호석의 시야에서는 절대로 나노 단위로 벌어진 나와 전정국의 입술 간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이건 키스다. 제 3자의 시선으로 봤을 땐 명확한 키스.
아, 저기 미안한데. 이왕이면 다 하고 나올 때 내 핸드폰 좀. 난 이제 진짜 간다!
두 번째로 벌컥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얼굴만 빼꼼히 내민 정호석이 크게 외치고는 쌩하니 급하게 사라졌다. 다 하긴 뭘 해, 다 하긴!? 호석의 눈치는 과 내 모든 사람이 알아 준다. 덕분에 자기가 눈치가 엄청나게 빠른 줄 알지만, 눈치가 엄청나게 빨라서 그런지 자기가 둔탱이인 줄은 1도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반어법따위는 죽어도 알지 못한다. 강의실을 나서자마자 정수정과 김남준에게 전정국과 나의 일을 떠벌릴 것이 벌써부터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좆됐다, 진짜. 몸에 힘이 쭉 빠지고 얼굴이 절로 일그러진다.
왜 그래요. 무슨 생각을 하길래.
….
화 났어요?
전정국의 나지막한 말소리가 큰 강의실 안에 울린다. 지금 이게 말이라고 하는 소리야? 어? 괜히 입 밖으로 말을 내뱉어 봤자 다시 내가 말릴 걸 생각해 속으로만 꾹꾹 눌러담으며 전정국을 있는 힘껏 째려보는데,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느끼지 못한 건지 전정국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던 두 손을 빼내 내 양 쪽 귀 위에 천천히 덮는다.
화나면 귀 빨개지잖아. 어렸을 때 나 괴롭히는 애들이랑 싸우고 나면 맨날 내가 이렇게 해줬던 거, 기억나 누나?
갑작스레 분위기가 변한듯한 전정국의 눈빛 안에서 몇년 전의 이웃집 소년의 모습이 가까워진다. 차가운 전정국의 손이 열이 오른 나의 귀를 덮고, 시려운 느낌에 몸이 살짝 떨린다. 분위기에 취했는지, 잠시 정신을 놓은 건지 나는 꼭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고선 숨죽여 전정국을 올려다 봤다.
신경쓰지 마요.
….
소문 나면 나야 좋죠, 뭐. 안 그래, OOO?
한 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간 전정국이 나를 내려다 보며 눈썹을 꿈틀 거린다. 그래, 전정국은 나에게 영원한 개새끼다. 전나영개.
-성장, 느낌, 18세-
학생, 다 왔어.
아, 감사합니다!
옆에 널부러져 있던 과잠을 챙겨 기사 아저씨께 급하게 돈을 챙겨 드리고는 차에서 뛰쳐 나오듯 내렸다. 이미 판은 벌여졌는지 바로 앞에 보이는 술집은 유리문을 사이에 둔 나 조차도 느낄 정도로 시끄러웠고, 벌써부터 급하게 술집을 뛰쳐나와 속을 게워내는 무리들도 있었다. 심드렁하니 택시에서 내린 채로 그런 모습을 질린 듯 바라보는데, 어디선가 담배 연기가 훅 끼쳐온다. 딱히 혐오하고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주변에 흡연자도 없고, 나부터가 흡연을 하지 않는 터라 담배 연기나 냄새에 낯설어 잠시 인상을 찡그리고 고개를 뻗어 두리번 거리는데, 가게 바로 옆 골목 어귀에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 나오는 것이 내 눈에 보인다.
… OOO?
어두워진 하늘에 하얀 연기가 내 쪽으로 건너 오려는 걸 피해 급하게 몸을 옮기려는데, 그 새 골목 안에서 몸을 틀어 밖을 확인하는 흡연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여느때완 다르게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듯 장초를 떨어트리는 흡연자는, 전정국이다. 미친놈. 내가 없던 1년 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하필이면 고등학교 생활 막바지에 꼴통인 애랑 친해졌나. 아니면 아파트에 조폭이 들어섰나. 어디서 저런 걸 배웠는지. 혀를 쯧쯧 차며 걸음을 옮기자 바닥에 떨어진 꽁초를 발로 비벼 끈 전정국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왜 늦게 왔어요.
남이 사 내가 늦게 오든 말든.
밥도 같이 안 먹고 급하게 집 가더니.
강의실에서 어렸을 적이 생각나 괜히 마음이 동했던 나는 나에게 닿인 전정국의 손을 뿌리치고 급하게 학교를 나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전정국도 나를 뒤쫓을 생각은 못했는지 다행히도 장애물 하나 없이 무사히 자취방으로 들어온 나는 떠오르는 복잡한 생각을 없애고자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덕분에 개총에 늦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로 전정국을 아래 위로 훑어보자 어깨를 한 번 으쓱 한다.
… 너 담배 펴?
… 내가 별 신경을 다 쓰지, 다 써.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튀어나온 질문은 질문을 한 나 뿐 아니라 전정국까지 당황시켰다. 능글 맞았던 전정국이 갑자기 눈동자를 티가 나게 이리저리 굴려댄다.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 전정국을 보자니 괜히 전 여자친구가 된 것 같은 찝찝한 느낌에 분위기를 무마시키려 손을 휘젓는데, 아까 장초가 떨어진 깜깜한 골목에서 인영이 꿈틀거린다.
야, 전정국 갑자기,
….
어? 그, 선배… 시구나? 안녕하세요, 15학번 박지민 입니다!
희미하던 인영이 내 앞으로 걸어나온다. 전정국에게로 향하던 나의 시선이 그쪽으로 고정되고, 전정국을 한 번 바라본 신입생은 금방 나에게 고개를 돌려 귀엽게 웃음을 지으며 꾸벅 허리를 숙인다. 덩달아 나도 허리를 숙이자, 소리를 내어 웃으며 전정국의 어깨를 한 번 툭 치며 제 팔을 두른다. '안 들어가, 전정국?' 이때다 싶어 나도 얼른 나를 추려 과잠 주머니에 손을 구겨 넣었다.
먼저 들어간다.
발걸음을 돌려 가게로 향하는데, 그런 나의 손목을 급하게 잡아끈다. 누가? 당연히 전정국이. 악력이 느껴지는 손목에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내 바로 뒤까지 닿은 전정국은 다른 손으로 내 어깨를 민다. '같이 들어가.' 누가 보면 내가 니 친구인 줄 알겠다? 얼굴을 틀어 저를 째려보고 있는 나는 안중에도 없는 전정국은 그저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한숨을 쉬고 괜히 머리만 아파 시선을 돌리는데, 저 멀리서 전정국과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박지민과 눈이 마주친다. 잠시 눈이 동그래지더니 금새 미소를 짓는다.
… 쟨 웃음이 왜 저렇게 헤퍼.
어, OOO 왔냐?
문을 열자 이미 가게 안은 난장판이었고, 문에 달린 종소리에 잠시 고개를 돌렸던 사람들도 제 잔 챙기기에 여념이 없어 한 마디 인사를 건네곤 사라졌다. 하…. 이럴 거면 왜 굳이 전화까지 오라고 했을까 김남준은. 눈을 감아 진정을 하다가도 멱따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맞지도 않는 술을 억지로 들이키며 나에게 펄떡펄떡 손짓하고 있는 김남준이 보인다. 저 병신. 또 실실대며 정수정의 잔을 넘겨받았을 게 뻔하다. 한숨을 내쉬며 알(코올)쓰(레기)임에도 도움이라도 될까 싶어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내민 발이 민망하게시리 바로 전정국에게 이끌려 어딘가로 질질 끌려갔다.
어딜 가.
옆에 잠자코 계세요, 선배님. 전정국의 단호한 말투에 테이블에 앉아있던 신입생들이 나를 힐끗 바라본다. 아니, 씨발. 아무리 그래도 신입생들만 모여있는 테이블은 아니지 않냐고….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뻘쭘히 앉아있는 내가 엉덩이를 들썩이기만 해도 전정국은 눈에 불을 키고 나를 바라본다. 아니 뭐, 나는 엉덩이도 마음대로 못 놀립니까? 오늘만 해도 몇 번짼지 모를 한숨을 내쉬는데, 내 앞으로 기분 안주 접시가 쑤욱 내밀어 진다.
드세요, 선배!
아, … 고마워.
고개를 들자 아까 마주한 박지민이 실실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색하게 웃으며 냉랭한 분위기에 뭐라도 입에 넣자 싶어 산처럼 쌓아올려진 팝콘을 조금 집어 올리는데, 전정국의 팔꿈치가 퍽 하고는 내 팔을 친다. 손에 쥐어져 있던 팝콘 몇 개는 바닥으로 추락한다. … 개새끼가? 홱 고개를 돌리자 낭창한 표정을 짓고선 제 앞으로 접시를 끌어간다. 이제 내 입도 마음대로 못 놀린다 이거야?
박지민 괜한 짓 하지 말고 꺼져라.
한참을 그 팔꿈치만 째려보고 있다 나오는 말소리에 고개를 들자 내 입으로 한 웅큼의 팝콘이 들이닥친다. 개색, 아옥. 생각보다 전정국의 한 웅큼은 마치 포크레인 한 스푼과 같았고, 내 입은 막힐대로 막혀 팝콘이 하나씩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에이, 내가 뭐얼.' 내 맞은편에 앉은 박지민은 또 한 번 실실 웃어넘기며 내 턱 바로 밑에 앞접시를 대어준다. 어, 참 고맙다 씨발. 박지민의 손에 들려있던 접시를 홱 들고가 아슬아슬 입술에 붙은 팝콘을 떼어냈다. 내가 별, 진짜.
OOO 왔네?
아, 앙녕하세어 선배.
… 넌 술도 안 먹은 게 뭘 그렇게 쳐먹었냐?
벌써부터 학생회가 테이블 순회를 하고 있는지 정팔이의 옆으로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정호석의 얼굴이 빼꼼 내밀어졌다.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대충 선배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정팔이가 내 옆자리의 전정국을 밀어내며 널널한 자리를 만든다. 줄줄이 들어와 제 옆을 차지하는 학생회 선배들을 보며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전정국이 작게 욕을 내뱉지만, 이미 술에 취한 선배들의 귀에는 들릴 리가 없다.
얘넨 왜 이렇게 멀쩡해? OOO, 술 안 먹였어?
당연히 안 먹였죠. 제가 왜 먹입니까. 정팔이의 허세가 가득 담긴 말에 억지로라도 입꼬리를 들어올리려다 뜻대로 되지 않아 거뒀다. 금방 옆 테이블의 술병까지 끌어모아 뚜껑을 따고 있는 정팔이의 모습엔 열정이 넘쳤다. 학생회 선배들은 이미 지쳤다는 듯 등받이에 기대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고, 신입생 위주의 술 파티에 나 또한 엉덩이를 바싹 뒤로 붙였다.
이야, 역시 전정국이 잘 마신다?
….
안 되겠다. 하나 더 까야겠다. 야, 저거 줘 봐.
주는 대로 족족 다 받아 마시는 전정국에 신이 난 정팔이가 몸을 일으켰다. 무지막지한 건배에 이미 나가 떨어질대로 나가 떨어진 일학년들의 한숨소리만 커져 간다. 나와 같이 구석에 앉아 열심히 안주를 까먹던 정호석이 정팔이의 큰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널부러진 일학년을 위해 정팔이를 제지하려 덩달아 몸을 일으킨다. '에이, 선배. 너무 많이 가셨음다. 네?' 정팔이의 손에 들린 술병을 잡아 채는데, 그걸 가만 두고 보지 못한 정팔이가 결국 애를 쓰다
아, 차가워 씨발!!!!!
술병을 엎어버렸다.
정호석의 우렁찬 욕설은 정팔이와 학생회 선배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충분했고, 정팔이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책상 위로 엎어진 술병은 테이블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내 맞은편에 앉아 가만히 술을 받고 있던 박지민에게까지 병에 담긴 술을 토했다. 급하게 뒤로 물러나긴 했지만, 이미 박지민의 바지는 젖을대로 젖은듯 바닥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야, 괜찮아?
술에 취했는지, 혼이 나갔는지 볼이 빨개진 채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 박지민을 보다 못한 내가 몸을 일으켜 옆에 있는 티슈를 건네주자 박지민이 실실 웃으며 고개를 까딱인다. 저 미친, 답답해 죽겠네. '야, 손 내놔.' 툭 튀어나온 내 말에 박지민이 팔을 쭉 뻗는다. 취한 거 맞아, 이 새끼? 우선 손부터 닦아주는데, 벌써 축축해진 티슈에 새 거를 꺼내려 고개를 돌리는데 테이블 끝 편에 앉아 삐딱하게 나와 박지민을 바라보고 있는 전정국의 얼굴이 보인다. '… 뭐.' 있지도 않은 흑심을 들킨 것 같은 이상한 기분에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자, '뭐, 씨발.' 전정국이 턱질을 하며 나를 따라 입을 벙긋거린다. … 씨발? 씨이바알?
너 진짜 죽고,
선배, 저 이거….
아, 미안.
들고 있던 티슈를 집어던지려 팔을 뻗는데, 내게 손을 맡기고 있던 박지민이 내 팔을 흔든다. 고개를 돌리자 박지민의 소매에서도 술이 뚝뚝 떨어진다. 그냥 대야로 들이붓지 그랬냐, 정호석. 한숨을 내쉬고 옆에 있던 새 티슈를 꺼내 소매를 꾹꾹 눌러줬다. '저 좀 취한 것 같아요, 선배애….' 두서 없이 뱉어내는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정도 물기를 빼려 휴지로 박지민의 소매를 둘러 꾹 잡아 누르고 멀지 않은 곳에서 정팔이에게 훈계 아닌 훈계를 듣고 있는 정호석을 잠시 바라보는데, 뭔가 우당탕거리며 테이블 위에서 투박한 소리가 났다.
… 너 미쳤냐?
아, 쏟았다. 오른 손에 빈 술병을 잡아들고 가슴팍부터 술로 뒤집어 쓴 전정국이 나의 눈을 마주하고선 또박또박 말을 뱉어낸다. 박지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흠뻑 젖은 상태인 전정국에 놀란 내가 벙 쪄 있자, 아까의 박지민처럼 제 팔을 쭉 뻗는다.
닦아주세요, 선배님.
-성장, 느낌, 18세-
내가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아직까지도 알코올 냄새가 진동을 하는 손을 벅벅 씻어냈다. 거울을 보니 귀신이랑 다를 게 없는 나의 모습에 고개가 푹 숙여졌다. 가만히 안주나 쳐먹고 갈려고 했는데 아무도 도움을 안 주네, 도움을. 가만히 앉아 내 시중을 받고 있는 전정국에 열이 뻗쳐 억지로 일으켜 화장실까지 데려다놓고 대충 정리하고 나오라고 한 뒤로 나도 정리하고 집이나 갈까 한 생각에 거울을 봤는데, 꼴이 말이 아니니 집 갈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이게 다 전정국, 아니 박지민, 아, 모르겠다…. 손에 들린 휴지 뭉치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전정국을 데리고 나오려는 심보로 화장실을 나서는데, 이미 화장실을 나왔는지 전정국이 삐딱하니 제 몸을 복도에 기대어 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너 정신 차렸으면 집이나 가라.
1년간 없는 사람 치고 살았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오래 알아온 정으로 조언을 하고 또 괜한 일에 엮일까 싶어 얼른 전정국을 지나치려는데, 주머니에 꽂혀 있던 제 한 쪽 팔을 꺼내 내 앞에 훅 들이댄다. 덕분에 있지도 않은 바리케이트와 마주한 나는 눈을 굴려 전정국을 올려다 봤고, 어느샌가 풀린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던 전정국은 한 쪽 입꼬리를 비튼다.
나 취했어요, 선배.
… 지랄 작작 해라, 너.
지랄 아닌데. 진심인데요.
'왜 안 믿으세요. 박지민 그 새끼는 취했다면서 손수 몸까지 닦아주던데. 난 안 취해 보여요? 아, 난 아직 볼이 안 빨개서 그런가. ' 술이 들어가긴 들어갔는지 횡설수설 말을 내뱉는 전정국의 시선이 흐트러짐 없이 나를 마주한다. 그럼 내가 MT 때 본 건 정전국이냐, 씨발? 가볍게 뱉어낸 욕설에 전정국이 다물어진 입술 새로 바람을 내뱉으며 옅게 웃는다.
존나 기분은 좆같은데, 웃음이 나오긴 나오네 너 때문에.
알 수 없는 말에 심드렁하게 전정국을 바라보자 그런 나를 내려다보던 전정국이 내 앞을 가리던 팔을 다시 뻗어 내 앞을 턱하니 잡아채더니 다른 손으로 내 뒤를 감싸 어깨를 끌어안는다. 갑자기 훅 가까워진 전정국의 품에 당황스러워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그저 하얀 벽만 바라보는데, 전정국의 손이 내 손을 낚아챈다.
나 싫어하는 건 괜찮은데, 그래도 참을 수 있는데.
… 야, 야.
다른 남자 좋아하는 건 못 참을 것 같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정국에 의해 전정국의 머리 위에 올려진 손이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고 있는데, 그 위에 겹쳐잡은 큰 손이 내 손을 살살 흔들어 제 머리를 쓰다듬게 한다. '함부로 다른 남자 만지지 마, 누나.'
성장, 느낌, 18세 |
1. 안녕하세요, 방데일리입니다! 오랜만이에요 독자님들 ♡ 진짜 한 달만에 찾아 뵙는 것 같아요. 제가 하고 있는 일도 얼추 마무리가 됐고, 방학도 다가오는 김에 이제 글을 써볼까 하고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늦게 와서 죄송하고, 그에 보답할만한 글 열심히, 성실히 써서 보여드리도록 할게요 정말. 기다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 2. 다음 주 목요일 (12/24) 크리스마스 이브까지는 1화, 2화 구독료 무료로 보실 수 있습니다! 오래된 유물 꺼내는 느낌이에여... 헿 3. 1화, 2화에 암호닉 신청해주신 분들은 오늘 글에 암호닉 달고 댓글 달아주시면 제가 확인하고 목록에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화랑 2화보고 이제 마음 돌리신 분들도 계실테니까요... T.T 3화에 암호닉 달고 댓글 꼭 달아주세요! (목록은 4화에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