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가 싫은 이유
내 인생에 패배를 느낀
"신입생 대표의 입학선서가 있겠습니다."
첫날은 다름 아닌 입학식이었다. 단정하게 새 교복을 입은 몸이 패배감에 가득 차 부들거릴 정도였으니. 입을 앙 다물고 서서 패배의 굴욕감을 양껏 느꼈다. 허,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못느낄 감정이니 한껏 맛보고 맘껏 밟고 올라서주마. 두툼한 털실내화의 코끝만 멀뚱히 바라보다 단상위를 올려다봤을땐
"아, 선서를 외워서 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권순영학생!"
"뭐, 학교 다들 잘 다니시던가요. 자~ 다들 따라서 선,서!"
샛노란 머리에 반쯤 풀어헤친 와이셔츠를 입운 학생이 짝다리를 짚고 서있었다. 말도 안돼. 고작 저런 애가 1등이라고? 미간이 가깝게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콘서트를 연 가수인양 마이크를 쥐고는 선,서! 짧게 끊어 말하는 모습이 건방지다. 어쩌다 운이 좋아 맞았나본데 다음부턴 그럴일 절대 없을거다.
입학식 이후로 노란 머리는 좀처럼 눈에 띄질 않았다. 권순영이라고 했던가. 걔 덕분에 공부에 탄력받은 것 같긴 하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공부했으니. 쉬는 시간, 왁자지껄한 교실에서 홀로 문제집을 풀다보니 어깨가 뻐근하다. 잠깐 고개를 들고 이리저리 목운동을 하며 뭉친 근육을 풀어주었다. 한창 어깨를 주무르고 있을때에 앞문이 조용히 열렸다.
"여주야, 교무실로 좀 올래?"
.
.
.
"...이게 뭔데요?"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내게 건낸것은 갈색의 서류봉투였다. 선생님은 미안한듯 눈썹을 팔자로 만드시며, 그 여주 너도 알지? 우리반 맨뒷자리. 말을 건내시기에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비어있는 그 자리 말씀하시는 거죠?"
"응. 그게.."
"네. 말씀하세요."
"107호.. 여긴가."
내 발걸음은 꽤 허름한 빌라에서 멈췄다.
'거기가 순영이 자리거든. 여주 너도 알지?'
'...'
'순영이가 학교를 입학식 이후로 도통 안나오거든.'
'근데요.'
'선생님 전화도 안받구 여주가 한번 가줬음 하는데.'
'...'
'선생님이 이렇게 부탁할게. 응?'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걸. 신경질적으로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않았다. 뭐야, 기껏 찾아와줬건만. 그에 문을 쾅쾅 두드리며 거기 아무도 안계세요? 외치자 그제서야 문이 열렸다. 거친 머릿결의, 잔뜩 얼굴을 찌푸린 권순영이.
"뭐야."
자고 일어난듯 목소리가 갈라져있었다.
"담임선생님 심부름. 학교 나오래."
"..."
"이거 받고. 나 간다."
"야."
"..."
"넌 나한테 뭐 안물어보냐?"
"..무슨?"
"왜 학교 안나오냐, 뭐 그런거."
"그런게 나랑 뭔상관."
짧게 찾아온 용건을 내뱉자 권순영은 반쯤 감긴 눈을 떴다. 권순영의 가슴팍에 서류봉투를 밀어붙이며 이거 받고. 나 간다. 짧은 인사를 건냈다. 오래 봐서 좋을 사이가 아니었기에 이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역력했다. 그에 권순영이 날 불러세우고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참나, 그런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아파트의 복도를 지나 뒤를 돌아봤을 땐 권순영이 여전히 짝다리를 짚은채로 나를 삐딱하게 보고 있었다. 언제봐도 건방지단 말야. 불쾌한 느낌에 앞을 향하던 운동화 앞코를 반대방향으로 돌렸다. 권순영의 앞에 서는 건 순식간이었다.
"야."
"..."
"학교엔 언제 나오냐?"
"..."
"일주일뒤에 3월 모의고사 보러 학교 와."
"..뭐?"
"모의고사 보러, 학교 오라구."
권순영은 오른쪽으로 기울였던 고개를 곧추세우며 날 똑바로 응시했다. 그에 지지않고 눈을 마주하며 내가 공부에 욕심이 좀 많거든. 내 말에 권순영은 바람빠지는 소리를 냈다. 난 또 뭐라고. 권순영이 별 관심없는 듯 뱉은 말이었다. 입학식때도 눈치 챘긴 했지만 정말 별로구나, 너. 할말을 마치고는 바로 돌아섰다. 권순영에게 인사할 정도로 좋은 감정은 아니었으니. 뭔가 기가 빨리는 느낌에 미간을 살살 문질렀다. 여전히 뒤에서 날 쳐다보고 있는 권순영의 시선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다음날 권순영은 학교에 나왔다. 입학식과 다름없이 불량스러운 행색은 그대로였다. 수업시간도중 앞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모두를 당황시켰으니. 뒤의 빈자리에 철푸덕 앉은 걸 보면 눈치가 영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권순영때문에 교실은 조용해졌다. 선생님은 헛기침을 두어번 하시고는 수업을 시작하셨다. 다만 모두의 시선은 권순영을 향했을 뿐이다. 가방도 없이 등교한 권순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책상에 볼을 붙이고 잠을 청했다. 그럼 그렇지. 샤프를 쥔 내 손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마친다."
얼마 지났을까 수업은 금방 끝마쳤다. 어제 너무 무리한 탓인지 눈이 시려 눈을 문지르고 있자 교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
조용해진 교실이 적응이 되지 않아 눈에서 손을 떼자 흐렸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고, 내 짝꿍 옆에는 권순영이 서있었다.
"비켜."
권순영이 내 짝꿍에게 비켜. 짧게 말했다. 그에 짝꿍은 당황한듯 말끝을 흐리며 어,어? 되묻자 권순영은 귀찮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뜨며 비키라고. 재차 말했다. 불편한 기분에 인상을 찡그리고 권순영을 봐도 권순영은 내 옆자리에 냉큼 앉았다.
"야."
"..."
날 부르는 권순영이 귀찮다. 무시하고 여전히 피로한 내 눈을 비비고 있자 옆에서는 부스럭거리며 자리를 잡는 소리가 들렸다. 아예 자리를 잡는건가. 손을 떼고 옆을 내려보자 책상에 엎어져 내게 고개를 돌린 권순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에 권순영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 오늘 학교 나왔어."
"근데."
내 냉랭한 반응은 권순영에게 별 효력이 없는 것 같다.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으니.
"그냥. 네가 나오라고 했잖아."
어제의 권순영과 오늘의 권순영은 차이가 너무 심하다. 어제는 세상만사 다 포기한 사람마냥 무기력하고 삐딱하게 굴더니 오늘은 되려 갸르릉거리는 고양이같다. 아니, 지금까지의 권순영 자체가 변덕이 심한 들고양이 같은 느낌이다. 비록 얼마 보진 않았지만. 어이가 없어 잠깐 눈을 흘기고 다시 샤프를 쥐어도 권순영은 엎어진 채로 내 행동을 하나하나 주시하기 바빴다.
"야. 네자리로 가."
"왜?"
권순영은 내게 물었다. 왜? 나야말로 묻고 싶은 말이다. 왜 내 옆자리에 앉은건지. 아까부터 교실은 불편함으로 가득차있었다. 게다가 그 불편함의 중심은 권순영을 향해 돌아가고 있었고.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내게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냥 조용히 공부하고 싶은 게 내 작은 바람이었는데 잔뜩 꼬인 기분이다.
"원래 네자리 있잖아."
"응."
"그럼 네자리로 가라니까."
"싫어."
막무가내인 권순영에겐 말이 통하지 않는다. 말하고 싶은게 잔뜩 있는 느낌의 짝꿍이 안절부절 권순영의 옆에서 맴돌았다.
"야."
권순영이 몸을 일으켜 짝꿍을 불렀다. 그에 짝꿍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떨결에 대답했다.
"너 내자리로 가."
"..."
"오늘부터 내자리 여기 할래."
짝꿍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채로 가방걸이에서 제 가방을 챙겼다. 저어, 그럼 다음 쉬는시간에 책상에 있는 짐 챙기러 올게. 그에 권순영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귀찮다는 듯 손짓했다. 팔랑 거리며 저리가라는 손짓에 짝꿍은 제 가방을 꼭 쥐고 맨 뒷자리로 향했다. 너털걸음의 짝꿍을 보다가 다시 권순영에게로 고개를 돌렸을땐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권순영이 있었다. 한숨을 푸욱 내쉬어도 권순영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듯 콧노래를 작게 흥얼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머릿속엔 권순영의 콧노래가 둥둥 맴돌았다. 아, 정말 오늘은 최악이다.
- 천재가 싫은 이유
권순영은 정말 유치하고 또 애같다. 권순영이 나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쯤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다. 마음같아서는 귀찮게 들러붙는 권순영을 떼어내고 차라리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소리지르고 싶다만,
'어머. 순영이 학교 나온거니?'
'...'
'여주야. 정말 고맙다.'
선생님때문에 마냥 그럴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선생님의 신임도 얻고 좋은 게 아닌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으나
"김여주."
학교가 끝나고도 날 괴롭히는 권순영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제발 그만 쫓아와!"
야자를 하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하는 나를 권순영은 무작정 따라나왔다. 가방을 챙기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 애써 무시했다. 내가 뒷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권순영은 의자에서 튕겨나오듯 뛰쳐나와서 쫄랑쫄랑 내 뒤를 밟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상한 노래가락에 내이름을 붙여 자꾸만 나를 불렀다. 그에 가던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 제발 그만 쫓아와! 소리를 지르자 권순영이 씨익 웃었다. 내가 뒤를 돌아봐준것에 기뻐하는 것 같았다. 권순영은 생글생글 웃으며 내 앞에 다가섰다.
"뭐,뭐야."
권순영은 내게 바짝 다가왔다. 너무 가깝잖아, 이건. 몸에 털이 주뼛거리는 느낌이었다. 권순영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로 내게 얼굴을 가져다댔다.
"김여주."
권순영의 얼굴은 너무 가까웠다. 권순영의 체온같은 것까지 손쉽게 느낄 수 있었던 걸 보면. 그에 한발짝 뒤로 물러나자 권순영은 한발짝 내게 더 다가왔다. 아니, 더 나가온 것 같다. 나의 한발짝과 권순영의 한발짝의 차이는 너무 컸다. 더 가까이 온 권순영을 쳐다볼 수가 없어 권순영의 목근처만 봤던 것 같다. 권순영의 조금 벌어진 입에선 옅은 더운숨이 나왔다.
"저리 좀 가.."
권순영의 어깨를 손으로 밀어내자 권순영은 그걸 잡아채 제쪽으로 끌어당겼다. 두입술이 맞닿는건 순식간이었다.
- 천재가 싫은 이유
3월 모의고사는 금방 다가왔다. 왼쪽을 돌아보자 거의 앞자리에서 시험을 준비하는 권순영이 보였다. 이번에야 말로 기필코 이겨주마. 아랫입술을 앙 물었다. 내 손에 들린 컴퓨터용 싸인펜이 무겁기도 하고 가볍기도 한게 느낌이 싱숭생숭했다. 열심히 했으니까, 정정당당하게 권순영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시작종이 치고 권순영을 한번 더 쳐다봤을 때는 샤프를 돌리며 장난 치는 권순영이었다. 그렇게 여유부리면 안될텐데.
.
.
.
모의고사는 딱히 막힘없이 술술 풀렸던 것 같다. 느낌이 좋은 걸. 콧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졌다. 앗, 이건 권순영이 내 이름 넣고 불렀던 거잖아. 내가 흥얼거리고도 당황스러워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에 권순영이 내 어깨에 턱, 손을 올렸다.
"앗!"
"아이고."
"놀랐잖아!"
깜짝놀라 소리를 낸 내게 권순영은 눈썹을 조금 꿈틀거리며 아이고, 미안한 티를 냈다. 별로 미안해 보이지도 않았지만. 권순영은 뭔가 기쁜 듯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왜 그렇게 웃,"
권순영에게 말을 건냄과 동시에 앞문이 열렸다. 그에 권순영은 내게 손을 들어 보이고는 제자리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모의고사 등수 나왔다."
"..."
침이 꿀꺽 넘어갔다. 조금 땀이 나는 것 같아 주먹을 쥐었다 피며 치마자락에 손을 슥슥 문댔다. 곁눈질로 권순영을 힐긋보았을 땐 권순영은 의자에 늘어져 발만 까딱거리고 있었다. 쟤는 어디서 저런 여유가 나오는 건지.
"1등은"
"..."
"김여주."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자 교실은 박수소리로 가득찼다. 당연한 결과였어. 난 잃어버렸던 걸 되찾을 뿐이었다. 선생님은 손짓으로 박수를 멈추셨다. 다음 등수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23등은 하은이네."
뭔가 이상했다. 왜 21등으로 넘어가는 거야. 그에 손을 들어 선생님, 2등은 누구에요? 여쭤보자 선생님은 종이를 조금 들여다 보시더니
"3반에 진우가 2등이네,"
하셨다. 권순영이 아니라 3반이라구? 그에 권순영을 보자 권순영은 날보고 해맑게 웃었다. 더불어 소리없는 작은 박수도 함께. 진짜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데 뭐 있구나 권순영 너. 굳어지는 내 얼굴을 알아챈 권순영이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붉어진 얼굴로 겨우 종례를 마쳤던 것 같다. 집으로 가는 길에권순영이 내게 조심스레 다가왔다.
"1등 축하해."
"필요 없어."
"..."
"누가 너한테 1등 시켜달래?"
"..."
"너 풀긴 풀었어?"
권순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 너 짜증나."
"김여주."
"닥쳐. 이제부터 아는 척 하지마."
끝내 권순영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이런 1등이 아니야. 아니라구. 소매로 거칠게 눈주위를 닦는 날 보며 권순영은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hidden side
"이 미친놈아!"
다짜고짜 입을 맞춘 권순영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권순영은 요리조리 잽싸게 피하다가 내게 덜미를 잡힌후 몸을 움츠리고 맞아주었다. 자기도 잘못한게 있으니 달아나지 않고 맞아주는 것 같았다. 아, 진짜 허무하다. 내 첫키스. 첫키스라는 생각에 더 울분이 터져 힘을 가득 실어 권순영의 어깨를 내려쳤다.
"아!"
아파트단지에서 권순영의 비명이 메아리 쳤다. 너무 세게 때렸나. 놀란 마음에 괜찮아? 물으며 다가가자 권순영이 내 손을 낚아채 제 가슴팍에 갖다 댔다.
"이거 봐.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
"...단단히 미친놈."
권순영의 노란 뒤통수를 소리가 나도록 갈겼다.
"내가 너 진짜 이길거야. 3월 모의고사 내가 이길거라고."
"응."
권순영이 웃었다. 단순히 응, 이란다. 나중에 등수 뺏기고 후회하지나 말라지. 권순영을 때리면서 체력소비를 많이 한 탓인지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도 들러주셔셔서 감사합니다ㅎㅅㅎ 순영이 단편을 들고 온다고 했는데 단편으로 끝나지 않고 2부작이 될 것 같네요. 연애고자 최한솔 마무리 짓고 2편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해의 미학은 단편으로 전환할 예정입니다. 죄송해요8ㅅ8 장편연재가 목표였지만 구상하고 있는 장편이 있어 빨리 마무리 짓고 편한 마음으로 글 쓰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여러분! 편안한 밤 되세요♡ +)단편이다 보니 전개가 빠른 점 이해해주세요..ㅎㅎㅎㅎ 이글은 빠른 전개가 매력이라고 여겨주셨으면.. (돌을 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