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택운/차학연 번외:새로운 이름
타박- 타박- 그 발소리. 주차장 비상계단에 등을 대고 서 있던 택운은 익숙한 그 발걸음에 이내 고개를 들었다. 학연은 문에 비스듬히 기대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학연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학연이 물었다.
“갔나 보네” 택운은 언제나 그랬듯 대답 대신 자기 할 말을 하며 목을 뒤로 젖혔다.우드득-하고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아까 정신없는 소동에 피곤했는지 택운의 입술 사이로 가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신랑 신부 마중도 안 나가고” 학연이 비상계단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 움직임에 한참을 꺼져있던 센서 등에서 노란 빛이 퍼져 나왔다. 머리카락이 금빛으로 물드는 것만 같았다.택운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중 나갈 게 뭐가 있어” 택운이 중얼거렸다.
학연은 그런 택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낮은 웃음을 흘렸다.택운은 가늘게 눈을 뜨고는 그런 제 친구를 흘겼다.학연이 그를 마주 보고 섰다.턱-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등을 기댄 학연은 이내 웃음을 거두고는 꽤나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좀 설렜었지?” 학연이 물었다.
“…뭐가” 택운은 그의 눈길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대로 컸잖아-” 학연이 집요하게도 말했다.늘어지는 그 말꼬리가 문득 즐겁게만 들렸다.
택운은 참지 못하고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대로 크긴 개뿔”그가 말했다.
“눈매는 여전하던데?” 학연은 제 손가락을 들어 눈가를 톡-톡- 치며 이야기했다. “너랑 똑 닮았어 신기하게”
“…” 택운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래, 신기하게” 문득 그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아닌 척하더니”학연은 핀잔주듯 말했다. 택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렇지도 않거든-” 택운이 넥타이를 풀어헤지며 중얼거렸다.
“어련하시겠어요” 학연이 쭉-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강현수 그 이름에 눈동자가 얼마나 요동을 치던지 아주 지진 난 줄 알았다. 동공 지진”
택운은 학연이 옆에서 떠들든 말든 그저 꼭 잠가놓은 와이셔츠 버튼을 하나하나 풀어내렸다.두어 개쯤 풀어내리자 답답했던 목이 트이기라도 한 듯 택운은 제 쇄골을 만지작거렸다. 끝없이 펼쳐진 것만 같은 계단 아래쪽을 택운은 가만히 응시했다. 과거로 가는 길이 저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기억을 걷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왔다. 학연은 그런 택운을 보며 조용히 숨을 죽였다.
아주 어렸을 적,순수가 반이고 나머지는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던 그 시절. 그 시절을 택운은 회상하고 있었다.일찍 여읜 어머니의 품 대신 안겼었던 아주머니의 가슴에서는 항상 따뜻한 진동이 울려 퍼졌었다. 꾀죄죄하게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날에는 따뜻한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셋이서 한참을 물장난을 쳤던 적도 있었다.어쩌면 그 순간들은 그에게, 또 학연에게 가장 행복했던 어린 시절로 남아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조금 더 특별한 그녀가 있었다.택운에게는 조금 더 특별한 그녀가.
스스럼없는 애정과 싱그러운 웃음. 한참을 훌쩍거리다가도 토라지지 않고 매번 먼저 손을 내밀던 어린아이. 소나기의 소녀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미끄럼틀 밑에 쭈그려앉아 자신을 기다리던 아주 작은 그 아이를 택운은 기억하고 있었다. 공주님- 하고 부르는 그 애칭이 마음에 안 들다가도 택운은 현수가 입이라도 삐죽대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그녀를 안아올리고는 새는 발음으로 그녀를 달래곤 했다. 아주 작고 귀여운 아이였다. 절망과 고된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하고 사랑받는 아이였다.그 행복이 영원하길 그는 바랐다.영 숫기가 없어 말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커서 누구랑 결혼할래?하는 짓궂은 질문에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그 조그마한 소녀가 얼마나 예쁘던지, 옆에서 치- 치- 삐진 소리를 내며 툭 툭 건드는 학연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러니깐 이건 아주 순수하고 작은 사랑의 이야기였다. 어린아이의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감정이었다.
문득 웃음이 터져 나왔기에 택운은 고개를 숙이고는 기분 좋은 진동을 흘려보냈다. 곁에서 덩달아 웃는 학연의 목소리가 들렸다.열병을 앓던 소녀가 소년의 곁을 떠났듯 택운도 이제 그 어린 시절을 놓아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얼마나 다행인가. 적어도 소녀의 곁에는 하얀 꽃다발과 여물지 못한 눈물 대신 누구보다 사랑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그것을 알기에 택운은 문득 가슴이 울렁거리다가도 이내 따뜻하게 차오르는 것 같았다.
티끌 하나 없이 영원히 백색으로 깨끗하기만을 바랐던 그 소녀는,진흙투성이 발과 잿빛 가루들을 온몸에 묻히고 나서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의 눈빛이 그랬고, 변함없이 웃을 때마다 애정 넘치게 휘어지는 그 눈꼬리가 그랬다.
이제는 이 관계에 전혀 다른 이름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택운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속의 이름들을 매번 적어내려갈 수는 없었다. 지워질 이름들은 지우고,새로 쓰일 이름들은 바른 글씨로 남겨져야만 했다.
그게 재수 없는 남자와 까탈스러운 여자라 할지라도.
택운은 문득 고개를 들고는 학연을 바라봤다.그 입술에 웃음이 걸려있었다. 학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즐거운 웃음소리를 흘렸다.
“아주 로맨티시스트라니까 정택운” 학연이 말했다.
“됐고” 택운이 그 말을 듣기 싫다는 듯 학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일이나 하러 가자” 그가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환한 불빛이 발끝을 적시며 이내 온몸으로 스며들어왔다.
“네- 네-” 학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꽤나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어련하시겠어요 정 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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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홍빈 번외:너의 편지
노을이 붉은 물감처럼 강가를 타고 퍼져나가고 있었다. 푸른 잔디밭 벤치에 앉아 그는 강가를 바라보며 제 손에 들린 편지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월의 바람이 문득 그의 검은 머리칼을 간지럽혔다. 두 번의 여름은 그를 스치듯이 지나갔고 기약 없는 약속을 빌려 떠나온 그녀의 곁은 항상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그녀의 향기,그 눈빛과 낮은 웃음소리. 확고한 낱말들과 무너지지 않던 영원한 빛.다 쉽게 뿌리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너무 습관이 되어버려 쉽게 잊을 수도,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도 없었다.
매일 밤 그는 알 수 없는 아픔에 몸을 뒤척였고,낮 밤이 엇갈리는 곳에서 매번 눈을 감으면서도 깨어있을 그녀 생각에 잠을 설치는 날도 많았다.하지만 그녀와의 약속을 그는 지켜야만 했다.
그는 행복해져야 했다.그것이 그녀가 그에게 바란 마지막 부탁 아닌 부탁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강현수, 그 이름은 그에게 매번 달콤 쌉싸름한 묘약 같았다.
문득 손에 쥐고 있는 편지지가 묵직하다 느껴져 그는 연신 그 종이를 만지작거렸다.학창시절부터 가지런하던 그 글씨체가 꼭 변함없는 그녀의 존재를 그에게 다시 새겨주는 것만 같았다. 홍빈은 저물어가는 노을이 수채화처럼 퍼져나가는 강가를 바라보며 한숨을 뱉어냈다.조금 다른 공기가 그의 곧은 콧대를 스치고 지나갔다.그는 눈을 감았다.
“나쁜 놈아! 잘 먹고 잘 살아라!”
적막한 고요와 한적한 오후를 깨부수는 익숙하면서도 흔치 않은 낱말들에 또 그 목소리에 홍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강가 근처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한참을 메아리치다가 이내 후련하다는 숨소리와 함께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홍빈은 벤치에 앉아서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시원하다는 듯이 손을 탁- 탁- 털며 풀밭을 걸어올라 오는 여자를 바라봤다. 어깨에 가볍게 걸쳐진 화구통이 눈에 띄었다. 털털함을 물씬 풍기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벤치에 주저앉았다.홍빈은 자기와 나란히 앉아있는 그 여자를 가만히 바라봤다.바람이 불었다.그녀의 짧은 머리가 스르륵- 이마를 가르며 넘어갔다.한참 그렇게 가만히 노을을 응시하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홍빈은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한숨을 들이마신 홍빈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여자는 그의 손수건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손등으로 눈물을 쓱-훔치더니 중얼거렸다.
“흐으- 더럽게 잘생겼네”
그 소리에 홍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그를 바라봤다.
“…한국 사람이에요?” 당황하며 그녀가 물었다.
홍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어- 죄송합니다” 어느새 눈물을 멈춘 그녀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귓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차였나 봐요?” 홍빈은 주머니에 손수건을 도로 넣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는 그를 바라봤다.“다 들었으면서 뭘 물어요-” 그녀가 말했다.
홍빈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여자는 그런 그의 얼굴과 이내 그의 손에 소중한 듯 들려있는 편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쪽도 차였나 봐요?”그녀가 말했다.
그 소리에 홍빈은 제 손에 쥐여져있는 편지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바람소리 가득한 웃음을 흘렸다. “뭐… 그런가?”
“그런가는 뭐가 그런가예요,차인 거면 차인 거지”
“굉장히 쿨하네”
“끝은 끝이니까요” 단답의 대답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눈가는 아직 붉었으나 눈물은 이내 말라있었다. 그 견고하고 단단한 눈동자가 현수와 닮았다고 그는 언뜻 생각했으나 이내 지워버렸다. 단지 비슷한 것뿐이었다.강현수와 닮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그녀는 유일한 존재였다.
홍빈은 문득 마음이 쓰라렸다. “그렇게 간단한 건가?”
그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홍빈을 바라봤다. “간단하지 않죠,사람 마음인데”
“아이러니하네… 아까 끝은 끝이라면서요”
“사람 마음은 원래 아이러니 한 거예요.마음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하잖아요” 그녀가 말했다.“내가 마음먹기에 달린 거예요”
“…” 홍빈은 입을 꾹 다물고 그녀의 말을 되새겼다. 괜히 짜증 비스름한 것이 그의 마음속에 차올랐다. “그래서 방금 차인 당신은 어떤 마음을 먹었는데요”
“음--” 그의 날 선 말투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이내 그녀가 입술을 움직였다. “조금 더 행복해지자”
“…”
“그리고 나를 떠난 당신에게 예쁜 이름을 붙여주자”
“… 아까는 나쁜 놈이라면서요”그가 말했다.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아까는 화나서 그런 거고요” 그녀가 바람에 흩날리는 제 머리를 가지런히 귀 뒤에 꽂으며 말했다. “이 이별도 언젠가 추억이 될 거예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홍빈이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뜸을 들였다. 이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말했다. “나는 아팠던 일보다 그 사람하고 함께 나눈 행복했던 일들을 더 많이 기억할 거니까요”
“…”
“질문이 엄청 많네요 그쪽은?” 문득 그녀가 말했다.
“…후” 작은 한숨을 홍빈은 뱉어냈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의 손 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나는 그쪽처럼 그렇게 낙관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글쎄요, 굳이 내가 낙관적이라 이러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가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아까 그랬잖아요 마음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그녀가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집에 돌아가면 나는 또 울 거예요,며칠 동안 입맛도 없을 거고,옛 추억이 다시 나를 찾아오는 밤이면 잠도 못 자고 뒤척이겠죠”
“…”
“근데 그게 중요한가요?”그녀가 물었다.
“…” 홍빈은 그저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씩-올리며 말했다.“중요한 건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는 거예요”목소리가 강가의 물결처럼 흘러넘쳤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고, 또 더 즐거운 걸 찾으려고 애를 쓰고, 그러다가 기억속 에서 희미해질 때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아무리 그래도 너무 낙관적이잖아…” 홍빈이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평생을 우울하게 한 사람에 매여서 살 수는 없잖아요”그녀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건 강현수 씨가 원하는 게 아닐걸요?”
홍빈은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난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안, 편지에 쓰여있는 이름 봤어요. 내가 시력이 좀 좋아서”
“아…” 그가 낮은 탄식을 뱉어냈다.
“아무튼! 내 생각은 그래요! 그쪽이 사랑하는 강현수 씨는 분명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고 있을 거예요!”
“참나…” 문득 홍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쪽 눈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홍빈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이홍빈 씨 용기 내서 편지 열어봐요, 내가 용기 내서 강가에 그 이름을 던져버리고 온 것처럼”
“…” 홍빈은 제 손안에 쥐여진 편지지를 바라봤다.
“아- 그쪽 이름도 편지지에 쓰여있는 걸 본 거예요, 오해 마요!”
그 소리에 홍빈은 기가 찬 듯 웃어 보였다. “당신 이름은 뭔데요”문득 그가 물었다. “공평하게”
그녀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김태주”
“이름이 남자 같네요”그가 말했다.
“뭐 어때요! 특이하고 좋지 않아요”태주는 홍빈을 보며 활짝 웃었다.“아무튼 이홍빈 씨! 너무 지체하지 말아요 마음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게 만드는 게 당신의 일 아니겠어요?”
“또 아이러니야, 아무튼 고마워요” 그가 웃었다. 태주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의 인사까지 받았으니 나는 이만 가봐야겠네요,술이 땡겨서”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웃었다. “인연이 되면 또 만나요!” 태주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가만 바라보던 홍빈은 이내 가볍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문득 따뜻함이 손끝을 타고 흘러들어왔다.미소를 지은 그녀는 부은 눈을 가볍게 비비더니 이내 시원하게도 돌아섰다. 아주 사적이고 또 아주 특이한 만남이었다고 홍빈은 생각했다.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있던 홍빈은 이제는 보랏빛으로 변해가는 하늘을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현수가 보내온 편지를 뜯었다. 하얀 편지지에 자필로 적어내려가 그녀의 낱말들은 언제나 그랬듯 매우 간결했지만 가슴을 울리기에는 충분했다. 작은 열쇠가 편지지와 함께 딸려 나왔다.
To. 이홍빈
너의 생각을 아주 많이 했어. 행복이 넘쳐 흘러 마음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날에는 더욱 많이 네 생각이 나더라.
홍빈아 너는 지금 행복하니?
내가 말한 대로 너의 행복을 찾고 있니?
나와의 약속을 아직 잊지는 않았지?
나는 네가 아주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어.네가 나에게 주었던 감정들은 항상 아름다운 이름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을 거야. 분명한 아픔들이 네 눈을 찌르고 눈물 나게 할 때도 있겠지. 하지만 홍빈아 너는 언제나 그랬듯 밝게 빛나는 사람이고 언제나 그랬듯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야.
나는 누구보다 빛나는 너를 알고 있어.
행복하다면 나에게 답장을 보내줘, 네가 원하는 말을 가득 적어줘도 괜찮아. 그게 욕이던 칭찬이던 달게 마실게.네 소식이 듣고 싶다.
강현수
p.s.
동봉한 열쇠, 예전에 다니던 학교 옥상 열쇠야. 눈꽃이 피는 날 그곳에 가봐.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지도 몰라.너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어. 아 맞다,재환이도 말로는 매번 아니라고 하지만 솔직히 네가 보고 싶은가 봐. 가끔 네가 집에 남겨놓은 사진들을 나 몰래 뒤적거리곤 해.참고로 이건 재환이한텐 비밀이야.
편지를 다 읽은 홍빈은 제 손안에 쥐여진 열쇠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이내 웃음이 그의 시원한 입꼬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홍빈은 이내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시원한 맥주나 한 잔 하고 집에 들어가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다시 태주를 만날 수도 있겠다고. 다시 그녀를 만난다면 고맙다고 한 번 더 인사해야겠다고.
홍빈은 편지를 곱게 접어 가방 안에 넣고는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겨울에는 현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조금 더 행복해진 모습으로, 아무렇지 않게 과거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어서.
“그래, 마음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불빛이 은은한 거리의 바에서 그는 낯익은 화구통을 발견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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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이들의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