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책을 좋아했다. 책을 넘길 때만 들을 수 있는 종이의 바스락거림. 손끝에서 느껴지는 종이의 재질.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전해져오는 감각.
누군가는 말했다. 책은 무언가를 읽기 위해서이지, 단순한 감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 한 번도 그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었으며 그 누구보다 책을 만지고, 느끼며, 이해했다. 어쩌면 코웃음을 칠 수 있겠지만, 책의 종류에 따라 전해지는 감정도 다르다는 것을 과연 사람들은 알 수 있을까. 고작 앞도 못 보는 주제에 책을 본다고 말하면 다짜고짜 여자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책을 넘기는 여자의 마음을 읽어보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습관마다 펴는 책은 이미 다 헤져있었지만 여자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매만지고 있는 부분은 어떤 부분인지, 책 속의 주인공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지, 또한 앞으로 여자가 맞이할 장면도. 손 안에 있는 책에서 여자가 알지 못하는 부분은 어느 한 곳도 없었다.
매 주 화요일마다 향하는 도서관에는 거의 여자 혼자였다. 굳이 원하던 환경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여자를 한적하고 사람 하나 없는 도서관으로 이끌었다. 실수로 책을 떨어트리던, 어떠한 소리를 내던 상관없게 하려던 목적이었겠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누군가 여자를 따갑게 쳐다본다 해도 모를 터였다. 그러나 도서관은 도심과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었으니, 가끔 누군가와도 그저 앉아계시다갈 노인 분들만 가득했기에 여자에겐 적합인 곳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책은 너무 무서워요. 귀신들이 잔뜩 나와서 주인공들을 괴롭히기에 바쁘죠."
"……."
"이건 어때요."
익숙한 손길로 여자가 들고 있던 검은 책을 빼앗고, 파란색 표면으로 된 책을 다시 여자의 손에 쥐어주던 남준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분명 앞을 보고 있었으나 그 어느 곳도 바라보지 않는 여자의 눈동자를 바라보기도 했다. 남준이 쥐어준 책의 표면을 쓸던 여자는 그대로 고개를 내저었다. 맘에 들지 않는 다는 표정이었다.
"이게 더 재밌을 텐데. 장담할 수 있어요."
"펼치고 싶지 않아요."
"읽어줄까요?"
"……."
"펼치지 않아도 되잖아요. 제가 펼쳐서 읽어줄게요."
여자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눈빛으로 표현할 수 없으니 더욱더 거세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남준은 자신이 여자에게 쥐어줬던 책을 다시 자신의 손으로 빼내었다. 그리고선 책을 열었다. 동시에 입술도 열렸다.
"그는 흑백으로 이루어진 남자였다.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그가 가진 색깔의 전부였다."
"지금 무슨 말……."
남준의 목소리가 덤덤히 여자의 귀에 내려앉았다. 낮지만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다. 여자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사람들은 오베가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에요?"
"아무 말도요."
"……."
"모든 세상이 흑백인 남자에게도 색깔은 있는거에요. 자신의 전부였던 자신의 여자."
"……."
여자는 남준의 팔부터 자신의 손을 차근차근 올리며 양 손을 남준의 뺨에 살며시 얹었다. 여자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남준을 향하고 있었다. 남준은 입을 열었다.
"나를 보고 있네요. 저를 보고 있어요."
"……."
"제가 색깔이 된 거 같아요. 당신의 색은 뭘까요."
"……."
"늦어서 미안해요."
여자는 그제야 남준의 뺨에서 손을 떼어놓았다. 갈 곳 없이 허공에 놓인 두 손을 다시 잡은 건 남준이었다. 몇 년 사이 거칠어진 여자의 손은 날카로운 종이 때문에 자잘한 상처만 가득했다. 남준은 한참을 여자의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드디어 함께 맞는 세번째 겨울이었다.
=
소심하게 독방에 갔다가 글잡에 온 글이에요.
다짜고짜 글 가지고 와서 죄송합니다!!!!!!!!! 도서관에 있는 남준이가 보고 싶었어요. 투정부리는 것처럼 느끼실지도 모르겠네요. 다짜고짜 사라지고, 다짜고짜 나타나고.
근근히 나타나겠습니다. 물론 우리 석진오빠글도 와야죠.
내용은 간단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여자와 남준이. 늦은 재회.
위로 해주신 분들 너무 고맙습니다.
가볍게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