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쓰려.
티셔츠 위로 배를 문지르는 백현의 표정은 그야말로 썼다. 어제 친한동기가 군 제대를 해서 늦을 것 같다며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했던 백현에 못 이기 척 알았다는 긍정의 뜻으로 적당히 마셔. 라는 말만 남긴 게 화근이었다. 새벽 3시를 조금 넘긴 새벽, 백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백현의 동기인 종대에게서.
재빨리 종대에게 업히 듯 안겨있는 백현을 받아들었다. 술에 취해 온몸에 있던 힘이 빠져버린건지 솜에 물을 적신 듯 무거웠다. 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꿈틀대는 백현을 부축하는 게 여간 힘이 든게 아니다. 침대에 눕히자 잠깐 뒤척이더니 곧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널 누가 말려, 변백현.
몸 걱정 좀 해.
야, 나 아직 젊어.
철 없는 백현의 대답에 경수의 눈썹이 뉘어진다. 누가 그걸 몰라? 젊을 때 관리 잘하라고 하는 말이지. 화를 내려다가 참는 듯한 말투에 백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경수가 아침 일찍부터 끓인 해장국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는다. 백현의 밥그릇이 바닥을 보일 때 즈음, 자연스레 경수가 그 속도에 맞춰 숟가락을 놓는다. 요즘 똑같은 패턴의 반복이다. 밥을 깨작대다가 백현이 다 먹을 때 숟가락을 내려놓는 경수의 행동이.
밥 남기지마, 맨날 다 먹으라고 구박하던게 누군데.
입맛 없어.
날이 더워서 그런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중얼거리던 백현이 이내 마지막 남은 밥 한숟갈 까지 입에 넣고는 그릇을 챙겨 싱크대 쪽으로 향한다. 가만히 앉아 있던 경수가 백현의 행동을 보고 저지하려 하자 그의 어깨를 누른 백현이 경수의 앞에 놓인 그릇을 치운다. 주말이면 경수에 잔소리에 못 이겨 이것 저것 집안일을 돕다보니 설거지 하나 쯤은 가뿐하게 끝낼 수 있었다.
“웬일이야, 안 시켜도 알아서 해주고.”
“너 더위타서 쓰러질까 봐.”
나 걱정되면 집에나 좀 일찍 들어와. 경수 딴에는 무심하게 뱉은 말이 백현의 귀에는 나 무지하게 서운해요. 라는 표현이 듬뿍 첨가되어 들린다. 요즘 과제가 많이 밀려 학교에서 밤샘을 하느라 집에 아예 못들어 오는 날도 허다 했다. 게다가 어제는 제대한 친구 때문에 술을 진탕 마시고 들어와 경수의 미움을 산 듯 했고. 경수가 서운한 건 당연했다.
“몇일 만 참아, 이제 칼 같이 귀가 할테니까.”
“말은 잘해요.”
야, 도경수. 욕실로 향하던 경수를 백현이 불러 세웠다. 주방쪽으로 고개를 돌린 경수가 말 없이 왜 불렀냐는 듯이 바라보자 백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묻는다. 오랜만에, 점심 같이 먹을까.
도경수, 어제 뭐 했어.
응?
뜬금없이 어제 뭐 했냐고 묻는 세훈이다. 10시부터 있던 강의에 녹초가 되어버린 몸을 이끌고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카페를 찾았다. 생과일 주스에 있던 얼음을 골라 먹던 경수 쪽으로 세훈이 몸을 숙여 가까이 다가왔다.
“혹시, 변백현이 너 안재우냐.”
“무슨 소리야.”
“너네 둘, 밤을 하얗게 불태우냐고.”
야, 입 다물어. 말 뜻을 못 알아 듣는 경수가 답답했는지 세훈이 꽤 큰 소리로 되묻는다. 카페 안이 조용한 만큼 혹시 누군가가 들을까 노심초사 하던 경수가 세훈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긴다. 아씨, 아파! 넌 좀 맞아도 싸.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경수를 보며 세훈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럼 왜 그러는데.”
“뭐가.”
“너 몇일 째, 맨날 피곤하다고 난리잖아. 밥도 속 안좋다고 안 먹고.”
그랬나.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지만 몸이 예전같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게 오래가지 않겠지라는 생각에 무덤덤했던 것 뿐이였다. 조금만 무리한 일을 하면 몸이 무거워지고 빨리 피로해 진 건, 한 달쯤 된 일이였고 속이 안 좋던건 몇일 전부터 시작된 증세였다. 그냥 더위타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정말 병원 가봐야 하나.
그래? 그럼 어쩔 수 없고.
“미안해.”
무슨, 집 들어가면 연락해. 오늘은 빨리 갈게.
“응.”
백현에게 사정이 생겨 점심을 같이 못 먹을것 같다며 대충 둘러댔다. 통화를 마치고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이 많은 환자들 속에서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으려니 오늘따라 백현의 곁이 그립다. 그냥 가벼운 몸살감기 정도면 좋겠는데, 혹시나 하는 상황이 있을 지 몰라 덜컥 겁부터 먹었다. 세훈과 카페에서 나와 헤어진 후에 학교 근처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막상 진료실 앞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꽤나 초조한 일이다.
“도경수씨, 들어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