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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애들과 연락이 닿아, 실실대고 있던 찰나. 내 폰에 진동이 울렸다. 설마 호출인가- 싶어 조마조마하며 폰을 켰더니, 다행히도 정국이에게 온 문자였다. 인턴끝나서 좋아했더니 레지1년차는 인턴보다 아는게 많다며 더 불러댄다. 정국이랑은 가장 마지막에 연락이 끊겼고, 가장 빨리 다시 연락이 닿았다. 데뷔 준비하느라 연락 못했는데, 그게 미안하다며 정국이는 내게 꾸준히 연락을 해오고 있다. 바쁜 와중에도 내 생각해주는 정국이가 고마울 따름이다.
"누나 뭐해요?"
"간만에 한가해서 벤치에 있지."
"그럼 나 지금 누나 보러가도 되요?"
"그러, 뭐? 너랑 같이있는거 보이면 나 매장당할지도 몰라."
"저 아직 그정도는 아닌데."
"너만 모르는 너의 인기야. 아무튼 밖에서는 안돼."
"누나가 거절할것 같아서 미리 와있었어요."
"뭐야. 너 왜 여깄어!"
뜬금없이 날 찾아오겠다는 정국이를 뜯어 말려서라도 못오게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너만 모르는 너의 인기.
"그야, 누나 보고싶어서 왔죠."
"그건..! 나도지만. 너 그래도 막 그렇게 얼굴 까고 댕기면 위험하다니까."
"하나도 안위험한데?"
"너 말고 내가 위험해.. 남편 얼굴도 못보고 갈 수도 있어."
"남편 얼굴은 이미 봤잖아."
"..엥?"
정국이랑 둘이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누가봐도 자기한테 쏟아지는 시선이 어마무시하게 많은데, 의식을 못하는건지 모르는 척 하는건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계속 이 상태로 있다가는 정말 진지하게 내 남편 얼굴도 못보고 이승을 뜰것 같았다. 그런 정국이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미 봤다면서 내게 장난을 친다. 정국아 나 진지해..
"맨날 누나 주위에 있고, 지금도 누나 앞에 있는데. 왜 모를까."
"뭔소리야.."
"내가 누나한테 계속 연락하고 찾아오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그야. 보고싶으니까."
"왜 보고싶을까, 누나가."
"..치, 친하니까?"
"나는 희연이누나도, 수정이누나도. 다른 형들도 아무도 안보고싶은데."
"...그럼.."
"왜 다 알면서 모르는척 해요?"
"내, 내가?"
"누나 처음 만날 날부터 지금까지 좋아하는거. 다 알고 있었잖아."
정국이는 내게 다 알고있으면서도 모르는척을 한다며 투정을 부렸다. 사실 정국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 부터 알고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김태형과 전정국. 이 둘을 놓고 내 마음이 혼란스러워 해서 모르는 척 했을 뿐. 내가 뭐라고 김태형과 전정국을 놓고 고민하는게 웃기긴 하지만. 나름 심각하고 힘들었다.
"12년이면 오래 기다렸잖아. 그치?"
"12년? 12년이 무슨.."
"중2때 누나 처음보고, 나 지금 26살인데. 11년인가?"
"..그게 중요한건 아니지."
"그치. 누나가 나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게 중요한게 아니지~"
"야! 내가 널 언제 힘들게 했다고 그러냐"
"지금도 나 안보고있잖아."
"그것은..좀..부끄럽.."
"수줍은척 하지말고, 나봐."
전정국이 나를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지나가던 개도 알만한 사실이었다. 그래도 내 입으로 십년넘게 좋아했잖아! 하기엔 너무 염치도 없고 개념 상실한 사람 같아서 입꾹 다물고 미안한 마음에 땅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전정국이 정곡을 찔렀다. 넌 날 너무 잘 알아. 죽어줘야겠ㅇ
"나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 만큼 사랑해준다고 약속해."
"ㅇ,에?"
"그러면 누나가 나 힘들게 했던 것. 다 잊어줄게."
"아니이, 나는 그럴 의도가 전혀-"
"나랑 연애하자. 시혁아."
*
"와 전정국 이자식. 사고하나 크게 터뜨리네."
"뭐, 형만하겠어요?"
"하긴. 김남준 이번달에 돈좀 벌었겠다?"
"나야뭐. 핫."
"우리 태형이는 불쌍해서 어쩌냐."
"수정아~?^^"
오랜만에 만났다. 김태형 빼고. 김태형은 스케줄이 있어서 조금 늦게 합류한다고 했다. 김태형이 오기 전에 슬슬 한잔씩 들이키면서 말을 꺼냈다. 시작은 각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였지만, 결국 나와 정국이의 연애 이야기로 넘어갔다. 아, 김남준은 이번달에 곡을 4개씩이나 발매해서 엄청난 수익을 얻고 있다. 밥도 한번 안사주는 개자식..
"아니, 김태형도 전정국 못지않게 김시혁 좋아했잖아."
"그것은 맞는 말이네."
"늦은 김태형이 바보지, 뭐."
"이사람들이. 당사자 없다고 뒤에서 까대는거셈? 태형이 마상."
"어이고, 루저 오셨네."
한참을 연애얘기를 하고 있다가. 왜 안나오나 싶던 김태형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 김태형이랑 전정국중에 김태형한테 마음이 더 가긴 했다. 정국이보다 같이 있던 시간이 더 많기도 했었고, 가까이서 본 것은 김태형이었으니까. 그런데 결국은 옆에 계속 있어주던 정국이에게 마음이 가버리긴 했지만.
"너무하네. 이 김태형님에게 루저라니."
"태형아. 이 형님이 아는 분중에 기깔나는 여자분 하나 있어. 소개시켜줄까."
"아이, 형~ 저도 엄청 예쁜사람 많이 알거든요!"
"그럼 나 소개좀."
"김남준 좀 닥쳐. 니 할일이나 다 하고 짓거려. 제발. 일 벌리지만 말고."
"네."
김태형은 특유의 능글맞음으로 분위기를 풀었고, 김남준은 까불다가 민윤기한테 한대 맞았다. 듣기로는 김남준이 미팅이 들어오는 대로 다 해대고 성사시키는 바람에, 해야할 작업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단다. 김남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테 단 하나 털끝 만큼도 없는 듯 하다.
"정국이 잘가~"
"다음에 또 봐요."
"자식 연락좀 하고살아."
"자주 보는데 귀찮게 뭘 해요."
"정국아 연락해!"
"응. 너무 늦게들어가지말고."
정국이는 스케쥴 때문에 먼저 자리를 떴다. 정국이가 가고 나니 슬슬 분위기가 마무리 되는 듯 했다. 는 2차갈 준비였음. ..다들 2차를 외치며 가게를 나갔다. 허탈하게 웃으며 가게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나왔다. 문을 열고 나오니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태형이 보였다. ..이런상황 원치 않았는데.
"시혁아."
"..응.태형아."
"정국이랑, 잘. 어울리더라."
"..고마워."
"내가 조금만 더 빨랐으면, 넌 지금 내 옆에 있었겠지?"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네."
"누굴 탓할수도 없고. 김태형 못났다."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거야. 너는 좋은사람이니까."
"만나도 너보다 좋은사람은 아니겠지."
"..미안."
"니가 미안해 할 건 하나도 없어. 내가 소홀하고 마음 놓고 있던 탓이지."
"..."
"너가 행복하길 바라지만, 옆이 전정국이라면. 좀 생각해 봐야겠다."
"너는 꼭 행복해야해. 내가 부러워할 만큼. 알겠지?"
"당연히 그래야지. 김시혁 나 두고 딴 남자 만난거 후회하게 만들어야지."
"우리 계속 친구, 맞지?"
"...그럼. 당연하지. 너가 나 말고 친구가 있을 것 같냐?"
"너무나 감사해서 몸둘바를 모르겠네. 빨리 가자. 애들 기다려."
"어어, 먼저 가. 나 전화 한통만 하고 갈게."
"응, 고마워 태형아."
"소름끼치니까 빨리 가~."
김시혁 너는 영원히 못보겠지.
지금 내 표정을.
나를 향해 웃어주던 너의 모습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거야.
같이 걷던 가로수길.
같이 먹던 파스타 집.
춥다고 짜증내던 너를 내 옷에 가두고 걸었던 길.
잊지 못할거야.
소중한 추억이니까.
앞으로는 두번 다시 할수도, 있을수도 없는 일이니까.
사실 네가 의대에 합격하던 날. 가장 먼저 알았던건 나일거야.
내가 선생님께 전화드려서 여쭤봤거든.
내가 모르는 척 해서 서운해하더라.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웠어.
막상 네가 힘들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네가 너무 보고싶어서 만나보려고 어떻게든 시간을 내려했지만, 번번히 실패했지.
그때의 내 심정을 네가 알까.
알아주면 좋겠지만, 너무 아팠으니까 너는 몰랐으면 좋겠다.
지금 네 옆에서 웃고 손잡고 있는 사람이 전정국이 아니라 나였다면 행복하겠지.
내가 너무 늦은건가봐. 나는 네가 나를 기다려줄줄 알았어.
우리가 서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했나봐.
내가 너무 자만했고, 너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어. 미안해.
이제와 돌이킬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라도 털어놓으려고.
계속 친구냐고 묻던 네가 너무 미웠어.
화도 내보려고 했지만, 예쁘게 웃고있는 너를 앞에두고 차마 그럴 수는 없더라.
차라리 내가 조금더 아프고 말지.
끝까지 미련하지? 여태 너를 기다리면서 이래왔는데. 결국 가버렸네.
원망하지 않아.
그저 네가 행복하면 난 괜찮아.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니까.
전정국이 울리면 나한테 와. 내가 전정국 혼내줄게.
네가 지금 내 혼잣말을 들을 일은 없지만 내 마음 조금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언제나 너 하나 뿐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오 나의 반장님!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