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줘; 01
(부제: 운명론적 악연)
일을 마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계속 그 사람이 누굴까, 라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분명히 나랑 이 길을 나란히 걸었던 사람인데, 왜 기억이 나질 않을까.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
그 사람과 누웠을 침대에 몸을 누이고 이불에 코를 파묻어 봐도 아무런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냥 잊어야 할 기억이었나. 왜 나를 찾아오지 않는 거야. 보면 기억이 날 수도 있잖아.
"안에 있어?"
"......누구야."
"김세봉 안에 있냐고."
현관문을 열어보니 한솔이었다. 밖에 비가 왔었는지,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든 채로 서 있던 한솔이가 계속 내 얼굴을 살폈다.
"다쳤다며. 승관이가 그러던데. 괜찮아?"
"멀쩡해, 괜찮아."
"왠일로 문을 다 열어줘. 안 열어 줬었잖아."
"......에?"
"걔...가 아니라 그 형이 싫어하는 건 하기 싫다고 밤엔 문 안 열어 줬었잖아."
'그 형'이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인 게 맞을까. 한솔이 얘기를 다 듣다 보면 기억이 나지 않을까 싶어서, 한솔이에게 밖에 비가 오냐고 물었다.
안 온다는 말에 오랜만에 누나랑 맥주 한 캔 깔래, 라고 하자 도통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한솔이었다. 왜 그러는데, 왜.
"그 사람이 안 싫어해?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더만."
"......."
"누나가 그렇게 그냥 친동생 같은 거라고 그래도 싫다고 길길이 날뛴 게 누구였더라."
"......저기, 한솔아."
"......혹시 누나."
"......응?"
"헤어...진 건 아니지?"
헤어진 건 아닌데 이건 헤어진 거랑 다를 바가 없잖아. 난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 사람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 사람이 찾고 싶어. 어쩌면 헤어진 연인과의 또 다른 만남을 기대하는 것보다 미련할 지 모른다. 한솔이의 말에 그냥 웃었다.
헤어진 건 아니고,
"나 그 사람이 기억이 안 나."
"......뭐? 싸워서 기억 안 난다고 하는 거지, 지금."
"아니, 정말 나 그 사람이 기억이 안 나, 한솔아."
"......."
"승관 씨가 그건 말 안 해 줬어?"
난 그 사람 기억 못 해. 그리고, 부승관 말로는, 급하게 '그 사람'을 알아내려고 하면 오히려 더 기억이 잊혀져서 영영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대.
근데 난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 한숨을 내쉬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왜 나를 찾아오지 않는 걸까. 그 날 우리가 헤어졌던 걸까, 아니면,
내가 자기를 잊은 걸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넌 '그 사람' 알고 있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데."
"......거짓말."
"성급하게 알면 안 된다며."
"......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거든."
"진짜 모르고, 알아도 별로 알려주기 싫어."
"왜?"
한솔이가 우지끈, 하고 맥주캔을 찌그려트렸다.
"난 누나가 그 사람 먼저 찾으러 나서는 것도 싫어."
"......."
"자기가 찾으러 와야지."
"......."
"어떤 여자인 줄 알고."
*
핸드폰을 잃어버렸으면 찾으러 와야 하는 거 아닌가. 전화 한 통도 오지 않았다. 벌써 2주 째다.
그냥 병원에다가 맡아둘 걸 그랬다. 부승관에게 치료를 받으러 갈 때, 핸드폰 그냥 여기다가 두고 가면 안되냐고 물었지만,
계속 안 맡아준다고 일관할 뿐이었다. 이상한 사람일세.
" '그 사람' 생각은 아직도 자주 나요?"
"나긴 나죠."
"불편하니까 앞으로 그냥 말 틉시다. 저보다 나이 많으시잖아요. 반말 하셔도 돼요."
"......그..래요."
"궁금한 건 또 없어요?"
"왜 '그 사람'은 날 찾으러 안 올까...요."
내가 지치는 이유였다. 도대체 왜 날 필요로 하지도 않는 사람을 내가 찾으러 다녀야 하는 건지, 기억을 해 내야 하는 건지 계속 회의감이 들었었다.
"변수가 두 개 있죠."
"......."
"세봉 씨를 정말 안 찾으러 오는 거라던가."
"......."
"아니면 그 사람이 가까이 있는데 세봉 씨가 인지를 못 하거나."
"......."
"제 생각엔 후자."
기억이 나지 않기 시작했던 날의 전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왜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 하는 걸까. 사고 때문인 건가. 그 사람도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을 기억한다 한들 서로가 기억하지 못하면, 다시 만날 수나 있는 걸까?
아니면 그 사람이 내가 혼란스러울까봐 일부러 모르는 체 하는 걸가, 혹은 정말 운명이 아닌 걸까.
한숨을 내쉬며 병원에서 나왔다. 그냥 잊는 게 맞을까. 길을 걷던 중 가방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진동소리에 인상을 쓰며 가방을 뒤지니
그 때 그 핸드폰이어서 황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왜 내 핸드폰 갖고 있어, 네가.
"아니.... 제가 그 쪽이 놓고 간 거 맡아 놓은 건데요....
-어딘데.
"저기 초면에 왜 자꾸 반말...."
-어딘지 빨리 말해야 찾으러 갈 거 아니야.
아씨, 나 지금 우리 집 앞인데. 주소가 어디더라.
"그... 여기가 17동인데, 어디냐면...."
-가지러 갈 테니까 서 있어.
"네? 그러면 어떻게 찾아오실.... 저기요, 저기요!"
아니, 거기까지만 듣고 어떻게 찾아올 건데. 그냥 택배로 부쳐달라 하든가. 요새 풀리는 일이 정말 한 개도 없구나.
한숨을 내쉬며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전화를 끊었는지 모를 사람을 홀연히 기다렸다.
도대체 어떻게 오겠다는 거야. 기다리는 나도 정말 만만찮은 바보 등신이라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즈음,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아 왔다.
"악!!"
"......핸드폰."
"......여기 어떻게 오셨."
"그냥 눈 앞에 17동 보이길래 가 봤는데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지."
"......제가 핸드폰 갖고 있는 사람인 건 어떻게 아셨는데요?"
"그냥 찔러 본 건데. 아니면 다시 전화하고."
"......참나."
그 때 그 남자였다. 내 손을 잡고 있었던 남자. 몇 마디 안 해 봤는데도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뭐 저런 또라이가 다 있어. 초면(이라고 하기엔 구면에 가깝지만 순간의 인연이었으니)에 반말 찍찍 쓰는 거 하며,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노란 머리 하며,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그럼 가져간다."
"저기요."
"왜."
"그...래도 고맙다는 말씀은 해 주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 고맙다는 말 좋아해?"
"아니! 그건 기본 예의 범절이구요. 그리고 저랑 아세요? 왜 은근슬쩍 찍찍 반말 쓰세요?"
"그냥 나랑 동갑같이 생겼길래."
"아니면 어쩌려고!"
진짜 또라이 아니야? 그 남자를 팔짱을 끼며 노려봤더니 실실 웃기만 한다. 물론 나의 눈빛에 의해서 쫄기를 바라고 그런 행동을 한 건 아니었지만,
저렇게 대놓고 무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뭐 몇십만원 사례금 해 달래요? 고맙다고는 할 수 있잖아요. 안 그래도 서러웠었는데,
저 남자의 행동을 보니 더 서러워졌다.
"지금 지갑을 안 들고 와서."
"......."
"일단 이거 가져가고. 고맙다는 의미야."
"......."
그 남자가 건넨 건 다름 아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젤리였다. 이거 사람들이 고를 생각도 안 하는 건데. 용케도 취향이 맞아 떨어졌나 보네요.
도무지 저 남자의 화법에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핸드폰 줘 봐."
"......."
"전화번호부에 왜 사람이 한 명도 없어."
"핸드폰 초기화 돼서 그래요. 근데 뭐 하시려구요!"
"번호 찍어주게."
"안 궁금하거든요? 번호?"
"나중에 답례로 밥 사달라고 전화하면 생각은 해 볼게."
"......."
"그럼 난 간다."
*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건 똘아이 중의 똘아이다. 갑자기 제 번호를 찍어주질 않나. 아무튼 간에 정말 여러모로 별로인 남자였다.
오늘도 부승관한테 치료를 받으러 병원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안내를 받으며 진료실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갔더니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는 부승관이 보였다.
"진전이 안 보여서, 치료 방법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어떻게 바꾸면 돼요?"
"시뮬레이션 하셔야 할 것 같아요."
"......네?"
"기억들의 일부를 조합해서 다시 재연해 보면 회복할 수 있거든요."
"......그거 혼자 하면 되나요?"
"아뇨, 남자 분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저는 시간 상 안 되고."
부승관의 말에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그걸 누구랑 해. 한솔이가 떠올랐지만 한솔이랑 할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사람한테 죄 짓는 건 아닐까.
그래도 일단 누군지 기억을 해 내고 싶다는 욕구가 가장 컸다.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왜 날 찾지 않는지까지.
나한테 남자인 지인이 누가 있을까, 하고 머리를 굴려 봤지만 떠오르는 건 아무도 없었다. 내가 이렇게 얄팍하게 살았던가.
하긴, 부탁하는 것도 웃길 것 같았다. 내가 기억을 잃었는데, 너가 내 남자친구인 척 해 주면 기억이 다시 날 것 같아! 라는 말에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남자가 있기나 할까.
병원을 나오는 길, 집에 반찬이 다 떨어졌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밖에서 저녁거리를 때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량하지만 병원에서 좀 걸으면 나오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배가 워낙에 고팠던 터라 삼각김밥 두 개와 라면 큰사발 하나를 샀다.
라면을 끓이다 보니 또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하나 샘솟았다. 라면 먹지 말라고 걱정해 줬었던 게 왜 떠오르는 지 모르겠으나,
그 기억만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누군가한테 한때는 내가 걱정을 받았었구나. 한숨을 내쉬자 옆에서 누군가도 따라서 한숨을 쉬었다.
"땅 꺼지겠네."
"어우! 깜짝이야! 아니, 왜 여기 있어요?"
"우리 집 앞인데."
"......아."
"라면 먹으면 몸에 안 좋은데. 왜 먹고 그래."
본인은 소주 두 병이나 사가면서 걱정이야, 남 걱정은. 왠지 모르게 머리가 띵해졌다.
"혼자 술 마시게요?"
"왜. 같이 마셔주게?"
"아뇨. 저 소주...."
"못하잖아."
"......어떻게 알,"
"같이 마시는 거 못 해 줄 거잖아. 뭘 어떻게 받아들이길래 멋대로 생각하는 거야? 도끼병 걸렸어?"
지난 번 젤리 때문인가. 생판 남인데 자꾸 흠칫흠칫하게 되나 봐요. 멋쩍게 웃으며 조금 불은 라면을 입에 넣었다.
자꾸 먹는 걸 뚫어져라 쳐다 보길래, 한 입 줄까요? 라고 했지만 거절 당했다. 소주병이라도 까든가. 입 심심하지 않아요?
한참을 그렇게 말 없이 있다가 결국엔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기.... 있잖아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요."
"뭔데."
"만약에,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 쪽한테."
"응."
"자기가 정말 소중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고 그러는 거에요. 그러면서."
"응."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찾으려면 그 사람이랑 있었던 일들 같은 거... 시뮬레이션을 해야 찾을 수 있다고, 도와달라고 하면 어떡할 거에요?"
"시뮬레이션이 정확히 뭔데."
"그냥, 그 사람이랑 갔었던 곳에 다시 간다던가.... 그런 거요."
"너가 그런 게 필요해?"
완전 도사네, 이거. 민망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다고 기억이 날까, 싶기도 한데 그렇게라도 해 봐야 한대요.
그러면 아마 기억이 날 거래요.
"그 사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네."
"......이게 더 가치가 큰 것 같긴 해도 핸드폰이랑 퉁 쳐 줄게."
"......정말요?"
"어. 근데 너 외간 남자한테 그런 거 부탁해도 안 불안해?"
그만큼 내가 간절했나 봐요. 그 사람 찾는 게.
"그 사람 말고 내가 더 좋아지면 어떡하려고."
"......참."
"왜, 가능하지 않나."
"......."
"도와줄게, 대신에."
"......."
"그 쪽이라 부르지 마. 나도 이름 있어."
"......뭔데요?"
"권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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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부제: 의문덩어리
1. 과연 권순영은 뭘 하는 놈일까?
2. 한솔과 여러분은 무슨 관계일까?
3. 승관이는 왜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가?
4. 왜 자까는 이런 글을 싸지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