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는 항상 저런식이야. 며칠간 이 저택에 있으면서 알게된 것인데, 그의 일상은 내 손에 들린 이 안개꽃처럼 매우 단조로웠어.
커다란 책상에 앉아서 할일이 얼마나 많은 건지. 저 길고 하얀 손가락에 고급스러운 깃펜을 끼우고, 미색의 종이에 한장, 한장, 그의 서명을 해 나가는 거야. 그리고 그 조용하고 우아한 작업이 끝나면 또 돌돌 말린 종이 몇묶음을 펼쳐서 그 고운 미간을 찡그리며 한줄 한줄 읽어나가겠지. 마지막 줄에 그의 서명을 하고 나서야 눈을 감고 그 의자에 기대 몇분 휴식을 취할거야.
그럼 나는 사각거리는 깃펜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를 몰래 흘겨보는걸 그만두고,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내 앞에 놓여있는 화분을 색색깔의 꽃들로 채워나가겠지.
마침내 아름다운 꽃꽂이가 완성되면 난 그 화분을 들고는 부엌으로 가 식탁 위를 멋들어지게 꾸밀꺼야. 어느날은 침실, 뭐. 어느날은 그가 있는 서재일 수도 있겠네.
그가 짧은 휴식을 끝내고 나면, 그는 자기 방으로 돌아갈꺼야. 그리곤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고, 또 이 시간이 되어서야 그를 볼 수 있겠지.
뭐, 여기까지가 내 하루의 나열이라고 한다면, 생각해봐.
나랑, 그는. 어떤 관계일까?
아, 잘 모르겠다구? 그럼 가장 처음에 내가 그를 뭐라고 불렀는지, 잘 생각해 볼래?
맞아 나의 그.
아, 내가 왜 그사람을 나의 그라고 지칭했냐면,
나, 이사람이랑 혼인했거든.
열흘 전에.
김석진. 이 마을의 영주. 난 그의 부인이야. 뭐, 보이는 것으로는.
사실은 이렇게 남보다 못한 관계인데도.
아무리 떠밀리듯 시집왔다지만,
이건 너무 무례한 짓이라고. 무시해도 정도가 있어. 난 귀신도, 유령도 아닌데.
그는 날 한번도 제대로 마주하지도 않고, 말을 건적도 없었어. 내가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이 때 뿐이야. 침실을 따로 쓰는 것도 물론이요. 식사도 함께 해본적이 없는걸.
난 너무 화가나. 내 자존심과, 감정이라는게 지금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어하나봐. 내가 왜, 아니 그는 왜 날.
만약 그가 엄청난 추남이나, 매너가 뭣도 없는 양아치거나,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어터진 노인내였다면 이렇게 까진 화가 나지 않았을거야. 아니, 차라리 기뻐했겠지.
그렇지만, 그는 저렇게 잘생기고, 마을안에선 평판도 좋은, 젠틀하고 젊고 유능한 영주님인걸.
그는 마을 안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두 친절했어. 그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고, 인자함과 배려를 담아 그들을 돌봤지. 파티에서 봤는데, 다른 여자들 앞에선 매혹적인 웃음을 입가에 띄우고는 매너있는 몸짓으로 그녀들을 대하던걸.
아, 무슨 파티냐고? 그야, 잘난 영주님의 혼인상대를 찾기 위한 파티 아니겠어. 아직 총각이었던 그를 탐내는 가문들이 많았어. 물론, 그 가문중에는 우리 집도 있었고.
나의 “그” 에게 영주작위를 내린 왕께서는 친히 왕명으로 그와 혼인할 여인을 고르는 파티를 열어주셨지. 아주 성대하게. 난 무슨 동화 속 왕자님의 파틴줄 알았다니까. 신데렐라, 인어공주. 다들 한번씩은 보지 않았나?
그래, 파티는 아주 성대했어. 그에 걸맞게 마을 안 높은 가문의 여식들도 아주 열심히도 치장을 했더라.
아, 나도 당연히 제일 아름답게 치장했지. 난 자존심이 아주 강한 여자라고, 그딴 여자들한테 내가 꿀려서야 되겠어?
....절대로 영주가 좋아서 그런게 아니었다고....절대.
그런데, 갑자기 파티 이야기는 왜 나온거지?
꽃꽂이를 완성해야 하는데, 너무 수다만 떤 것 같지? 슬쩍 그를 보니 벌서 마지막 종이를 보고 있잖아. 시간이 별로 없다는 뜻이야.
서둘러 손을 놀려 가장 아름답고 탐스러운 꽃가지를 들어올렸어.
아, 이 꽃 좀 봐. 참 아름다워. 그치?
이렇게 어여쁜 꽃에는 사람들의 눈길이 가기 마련이야.
그래, 눈길이 가....
살며시 고개를 돌려 그를 봤어.
참 어여쁘네,
그를 보고 있자니 하, 또 이런 생각도 드는 거야.
그는, 한번도 날 보지 않았잖아. 왜,
“당신은 왜 날 보지 않죠?”
헙, 방금 내가 무슨말을 한거야? 마음속으로 읖조리던 말이 입밖으로 튀어나왔어. 그리곤 너무 놀라서 고운 장갑을 낀 손으로 그 입을 틀어막아야 했지. 뭐? 왜 날 봐주지 않느냐고? 김여주, 너 드디어 미쳤구나. 이 커다랗고 음침한 저택에 갇혀서 돌아버린게 분명해. 저 괘씸한 남잘 남편으로 두곤 정신이 나간게 틀림없다고.
아, 내가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아.
왜 날 보지 않냐고? 날 봐달라는 소리잖아. 네 마음을 다 들켜버린거야. 네가 영주에게 가진 마음을 다 들킨거라고 이 바보야.
그렇게 그 자리에 서서 밀려드는 후회와 수치심에 이제는 딱 그런 감정의 경계를 넘어서 울음까지 나오려 하는데
그사람이 고개를 들어 나를 봤어.
나를...봤어...?
그리곤 깃펜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그 책상에서 일어나 길고 곧은 다리로 한걸음, 두걸음 걸어 내게 다가오는거야.
마침내 내 앞에 서서 무릎을 굽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눈 앞에 있는 아름다운 것은, 보는것 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아요. 만져보고싶죠.”
지금, 무슨 말을.
“그리고 그 욕망을 이기지 못해, 내가 당신을 만지면,”
그가 내 손목을 잡아왔어. 그 하얀 손으로 내 손목을 감싸고. 나와 눈을 맞추었어. 심장이 쿵-쿵 하고 뛰었다. 분명 그가 감고 있는 손목에서 느껴지는 맥박도 이렇게 요란스럽겠지.
한 손으로는 내 손목을 감싸고, 그 오묘한 깊이의 눈동자는 나를 향했어.
점점 심박동이 빨라지는 것 같아. 이렇게 급히 뛰어도 괜찮은거야? 감당이 안돼. 긴장감으로 어지러워. 이젠 숨마져 가빠오는 듯 해.
내가 생각하기에, 얼굴이 희게 질렸을 것 같은데, 종종 너무 놀랐을 때 이랬던 것 같아.
그는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잡고있던 팔목을 위로 들어올리곤 다른 손으론 내 등허리를 감아왔어. 그리곤 힘을 줘 나를 안았어.
하- 난 놀라서 숨을 들이켰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하지만, 정말 숨도 안 쉬어지던 걸. 그리곤 그는 내 귓가에 속삭이며 말을 이었어.
“그럼, 분명 다음은 이렇게 안고싶을거고,”
아, 쓰러질것 같아. 지금 이사람이 내게 무슨 말을 하는거야. 도저히 난,
“그 다음은, 더 강한걸 원할지도 몰라요. 부인.”
그러니까, 어리광은 그만. 떼는 내가 부려야지.
부인은 얼마나 더 아이가 되려고, 지금도 이렇게 아긴데.
그가 안은 팔을 놓고는 말했어. 내 얼굴을 마주보면서.
항상 단조로움 투성이였던 이곳에서 갑자기 많은 자극들이 한번에 들어오니까, 머릿속도, 마음속도 복잡하고. 터질것같고. 심장은 쿵쿵 뛰고, 하, 가장 치명적인 자극은 내 코앞에서 그가 날 보고 있고, 손을 잡고, 안아주고. 이런 낮간지러운 말을 하고. 그럼. 그럼 당신,
“왜... 왜 당신,
날 싫어하던게 아니었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어.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입도 달달 떨리는 건가?
그리곤 그는 내 질문에 내가 본 웃음중에 가장 신사답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그 파티에서 당신을 고른거. 벌서 잊어버린거야?”
좋아해요. 당신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리고 의도치 않게, 당신을 피했던 것은. 아 사실 의도한건 맞지만.
그는 작게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어.
“아직 아끼고 싶었거든. 울리긴 싫어서.
어, 울어요? ”
아, 눈물이 터져나왔어. 아.
더이상은 생각할 수도 없어.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에게 안겼어.
“난. 난, 당신이 나를 싫어하는줄 알고....”
그가 내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어. 아주 작게.
“왜, 울고그래요. 이게 뭐라고. 봐, 아직, 아직 안될것 같아.”
당신이 이렇게나 아이같은걸. 그러니 우리 조금만 더 참아봐요. 부인
젠틀하고 석진 영주님을 쓰고 싶었는데 그 속엔 엄청난 섹시함이 숨겨져있는 석찌 영주님...... 아직은 어린 부인 아껴주기 프로젝트 헤헷 여러분 저 방학해쪄여 ㅎㅎㅎㅎ ^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