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작 기업의 기밀문서 몇 개 빼돌리는것 쯤이야 기억조작 몇 번이면 간단히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쉬웠고, 아주 평범한 임무였고. 내게 있어 하나도 새로울게 없는 일상적인 일이었으니, 그래서 긴장 따위 하지도 않았다. 방심? 이런 사소한 일에 방심이라는 질책을 달고 임무를 수행해야 할 정도로 내가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고. 내 능력이 귀하고 또 귀해서, 날 막을 만 한 사람이 이젠 없었으니까. 그래서 센터에서 나는 특별관리 대상자였다. 뭐 그들 말로는 더 신경쓰는 거라곤 하지만. 가두고, 속박하고. 감시하고. 물론 내가 느끼기에 그랬다는 거다. 이 특혜가. 누구는 특별관리를 받고 싶어 안달났다곤 하던데. 할 수만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능력따위 남한테 넘겨버리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뭐 이따위 거지같은 생각을 하면서 임무장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능력을 써 간단히 잠입하고, 뒤지고, 또 뒤지고. 그게 이번 임무의 플랜이었다. 하나도 다를게 없는 평소와 같은. 하지만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방에서 나온 후에야 깨달았다. 이번 임무는 평소와 같지 않다. 다르다. 뭔가 다르다. 그리고 잘못됬다. 그것도 한참. 어지럽게 빙빙 도는 정신을 부여잡고 실낱같은 이성으로 고민했던 문제는 내가 정신을 잃기 직전에서야 풀렸다. 나와 같은 사람. 같은 능력. 같은 존재. 그토록 귀하다는 정신능력 센티넬이, 한사람 더 있구나. ** [코드넘버 S08. 타겟 룸에 접근, 임무 수행하겠다.] 가드들을 모두 처리하고 들어선 박지민의 방에서는 옅은 홍차향이 났다. 블랙과 원목으로 장식된 세련된 인테리어에 은은하게 풍기는 홍차향이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느긋한 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이 일을 하며 생긴 취미가 하나 있다면, 철저히 타인의 취향으로 꾸며진 공간을 감상해 보는것? 그 공간 속엔 취향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도 슬며시 녹아있었기에, 꽤 재미있는 구경거리었다. 모던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나이에 맞지 않게 약간 권위적인 편. 커피보단 홍차. 책장을 가득 채운 원서들과 서류철. 여러가지 언어의 원서들로 미루어 보아 언어능력이 뛰어난 엘리트. 손이 탄듯한 책들은 그가 단지 과시만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책을 꽂아 논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른 타겟들과는 달리 꽤 재밌다고 생각하며 슬슬 본격적인 임무를 수행하려고 했다. 그는 분명 정신을 놓고 잠에 들어있을 것이고, 난 그냥 느긋하게 서류 몇개나 빼오면 되는 것이었다. 심심하면 홍차한잔 마시면서 하는것도 좋으려나. 향이 꽤 괜찮네. 금 테가 둘러진 파란색 찻잔에 찻잎을 덜고, 물을 부으려는 순간. 들려서는 안될 소리로 놀라 잔을 놓치고 말았다.
“난 고양이는 기른 적이 없는데. ” 쨍그랑 하고 깨지는 잔이 내가 얼마나 놀랐는 지를 보여주었다. 손에는 작은 핏방울이 맺혔다. 분명, 잠들어있어야 할 사람이. 깨어있다? 그것도 멀쩡하게. “내가 아끼는 잔인데, 그거.” 도둑 고양이가 이렇게 부산스러워도 되나? 들키잖아요. 그렇게 티를 내면. 그런데 여긴 어떻게 들어왔을까.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응? ” “내 말, 안들려요? 내 방까지 어떻게 들어왔냐고.” 분명 잠들어 있어야할 그가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서류를 보고 있었다. 놀란 마음에 다시 그에게 능력을 사용했다. 약했나? 이런 실수는 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다. 다 지워야지. 기억을 지우고 재우자. 깊게, 아주깊게. 하지만 아직도 그는 흔들림 없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내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어떻게 왔냐고.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자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표정을 약간 구기고 나를 쳐다보았다. 정면으로 마주본 그의 얼굴은 나를 더 당황시켰다. 어딘가 모르게 낯익은 눈빛. 시린표정. 위험하다. “이 아가씨, 그렇게 안봤는데... ” 사람 돌게 하는 재주가 있네. 나는 분명 물어 봤어요? “내가 주는 기회는 한번 뿐이야. ”
내가 인내심이 좀 부족하거든. 약간 격해. 내가. 그가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순간, 그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정신은 멀쩡하게. 이럼 안되는데, 뭔가 잘못 됐다고 말하며 내게 날카로운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의 앞에 선 내 몸은 손가락 하나, 눈동자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나는 인형처럼 그의 앞에 서서 뭐에 홀린듯 그를 처다보고 있었고, 그 위험한 상황에서도 귀에 꽂은 인이어에서는 여전히 무전이 흘러나왔다. [S08. 임무 수행중인가?] [S08. 응답 바란다.] [....김탄소 어디야.] [김탄소. 왜 대답이없어!] [무슨 일 생겼어? 대답좀 해봐!] 인이어에서는 윤기오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답이 없는 내가 걱정 됐는지 거의 소리 지르듯이 말하는 윤기오빠의 목소리는 인이어 밖까지 새어나와 내 앞에 있는 그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내 앞에서 서서 잠시 나를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던 그가 비웃음을 흘리며 내 귀에서 인이어를 뺐냈다. 그리고 제 귀에 꽂아 넣더니 내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아, 센티넬? 어쩐지. 여기 너무 쉽게 들어왔다 생각했어. ” 그 가드들. 덩치만 컸지. 그냥 일반인이거든. 센티넬이 일반인 몇 처리하고 들어오는거 그냥 애들 장난이잖아. 안그래요? 근데. 또 생각하니까 화난다. 고작 여자한명 못 막는데 무슨 가드야 가드가. 내가 돈을 얼마나 많이 주는데. 일도 못하면서. 돈은 꼬박꼬박 받아가고.... “참.....이거. 물갈이 할 때가 됐네. 그치? 응?”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죠?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내 볼을 쓰다듬었다. 한번도 겪어본 적 없는 상황에 놀라고 두려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눈물도 내 마음대로 흘릴 수 없었다. 그의 앞에서는. “근데. 어쩌나? 다 들켜서. 나한테. ” 임무는 완수 못하겠다. 안그래요? 그는 씩 하고 웃으며 재밌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름이.....김탄소? ” 여기에 뭘 가져 가려고 왔을까. 우리 탄소씨가? 이건가? 아님 이거? 그는 알려준적도 없는 내 이름을 멋대로 부르더니, 내가 뒤지려 했던 책장 앞으로 가서는 웃으며 문서들을 꺼내 보였다. “근데.... 탄소야. 벌서 나한테 다 들켰는데 어떡하지. 이건 못가져가겠다. ” 그가 생글생글 웃던 미소를 지우고는 싸늘한 눈으로 나를 보며 내게 다시 다가왔다.
“예쁘다고 그냥 보내 주기엔, 좀 괘씸해서. ” 널 그냥 보내 주면 내가 뭐가 돼요. 자존심 상하게. 안그래요? 그 말을 끝으로 굳어있던 내 몸이 무너지고 굳게 닫혀있던 방문이 열렸다. 밖에서 열린 문에서는 가드들이 나를 둘러싸고 총을 겨누고 있었다. “에이, 겁만줘. 겁만. 예쁘잖아. ” 어느새 자리에 돌아가 처음 봤던 모습대로 앉은 그가 다시 웃으면서 가드들에게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총알이 날아오고 어깨에 강렬한 고통이 이어졌다.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폭주했겠지. 날 그냥 보내줬으면. 더 쉬웠을 걸. 너도 멍청해 박지민 흐릿해지는 눈으로 바라본 그는 웃으며 날 보고는 말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입모양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물갈이 ” 멍청하다는 말. 취소해야겠네.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그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