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한/민석] 내 어린 남자친구 07
*과거편 01
길다란 나무 회초리가 무거운 침묵 속을 갈랐다. 찰싹찰싹. 매가 한번 두번 올라갔다 매섭게 내려쳐질때 마다 아이의 여린 다리에는 불그스름한 작대기 자국이 생겨났다. 아이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통을 힘겹게 참아냈다. 끅끅 거리는 신음은 아이의 목울대를 넘어 다문 잇새사이로 새어나갔다. 노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묵묵히 아이의 다리에 회초리를 들었다. 방문 밖에선 늙은 여인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파란색 테두리가 인상적인 하얀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방울을 거둬내며 늙은 여인이 노인에게 사정했다.
"애 잡겠어요 양반. 애 죽어.. 그만해 그만"
노인은 그 통곡어린 애원을 못 들은척 다시 팔을 들어올렸다. 아이의 종아리가 핏물이 흐를듯이 새빨개져 갈 쯤 아이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죄송해요 할아버지. 아이의 눈에선 소리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노인에게만 들릴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울음섞인 아이의 목소리에 노인이 드디어 회초리를 내려놓았다. 매질이 끝났음에도 아이의 다리는 애처롭게 떨려왔다. 노인이 한동안 코를 찡긋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이에게 일렀다.
"뭐하나. 숙제없으면 퍼뜩 들어가 자라"
네.. 아이는 호된 매질에 부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방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무너질듯 무릎이 굽혀지던 아이는 몇걸음을 떼고 방문 앞에 멈춰섰다. 아이는 잊지않고 뒤돌아서서 두 노인에게 밤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세요.. 어린 미성이 울음과 고통에 잔뜩 갈라져, 아이의 입에선 걸걸한 가래소리가 흘러나왔다. 방문이 조심스럽게 닫혔다. 아이가 매질을 당하던 바로 그 자리로 늙은 여인이 뛰쳐들어왔다.
"아이 죽이려고 했어요? 기어코 그렇게까지 때렸어야했어요? 이 양반아, 그 자그만 애한테 때릴곳이 어디있다고"
여인이 주먹을 움켜쥔 손으로 노인의 어깨를 두들겼다. 주름진 얼굴로는 여전히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노인은 아이가 사라진 방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코를 찡긋했다. 아이의 걸음따라 눅눅한 장판대기 위에는 식지않은 눈물길이 나있었다. 세월에 의해 흐리멍텅하게 흐려진 안구는 물기가 촉촉히 서려있었으나 끝끝내 흐르지못했다. 임자도 들어가 자. 노인이 단단한 회초리를 집고 일어섰다. 선반 가장 아랫서랍을 열어 회초리를 그 안에 갈무리해 집어넣었다. 어디가려구요? 늙은 여인이 노인의 뒤를 쫓아 물었다. 바람 좀 쐬러! 노인이 핀잔을 주듯 격앙된 목소리로 여인에게 일렀다.
문을 닫고선 아이는 휘청휘청 걸어 겹겹이 깔려있는 모포자락 위로 몸을 뉘였다. 좁은 방 안으로 밝은 달빛이 가늘게 늘어져 내릴법도 했지만 오늘밤은 유달리 어둡고 우중충했다. 누워있는 그 상태, 바로 멈춰있는 상태에서도 움찔움찔 살덩어리가 저 혼자 경련했다. 아이는 손을 들어 여직껏 흘러내리고있는 눈물자국을 벅벅 지워냈다. 아이는 그저 마음이 아팠다. 자신을 매질 했던 할아버지도,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도 모두 밉지가 않았다. 표출해낼 대상 하나 없는 괴로움에 아이는 가슴이 쓰렸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온기없는 바람을 피하려 아이는 얇은 이불을 들어 제 몸에 덮었다. 어두캄캄한 천장을 줄곧 바라보던 아이는 서서히 눈커풀을 떨어트렸다. 완전히 눈이 감기고 아이는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와 함께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아이가 잠이 든지 얼마 되지않아 그 문이 다시 열렸다. 빛이 문 사이를 지나 완전한 어둠이 내린 방안으로 덮쳐내렸다. 그 빛무리에 실루엣의 얼굴이 드러났다. 늙은 여인, 아이의 조모였다. 조모는 자글자글하게 주름진 손 안에 큼지막한 통을 들고 방 안으로 침범했다. 안쓰럽게도 아이는 허연 눈물자국이 그대로 인 채로 구부려 새우잠을 청하고있었다. 조모는 발자국 소리가 나지않게 까치발을 들고 조심조심 걸어 아이의 곁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민석아.. 이 불쌍한 것"
아이의 이름은 민석이었다. 조모는 손바닥만하게 커다란 통의 뚜껑을 잡고돌렸다. 그 속에는 누르스르한 빛의 불투명한 연고가 들어있었다. 가난한 사정에 차마 제대로 된 약을 구하지 못하는 조모는 대신에 거울달린 싸구려 화장대 안에서 바세린 한통을 꺼내온 것이었다. 조모는 아이를 돌려뉘어 엎드리게 한 채로 얇은 이불을 거둬냈다. 그 속엔 피멍이 퍼렇게 든 어린아이의 종아리가 있었다. 여린 살결이 단단한 회초리에 잔뜩 유린당해 끔찍하게 상처입어있었다. 조모는 눈물 한방울과 연고 한 움큼을 함께 아이의 종아리에 발라냈다. 조모는 벅차오르는 슬픔을 감당해내지못하고 소리내어 오열했다. 얼마나 아팠을꼬, 우리 강아지 얼마나 아팠을꼬. 조모는 아이의 종아리를 애정 어린손으로 조심히 쓰러내렸다. 아이가 그 손길을 느꼈는지 우물우물 입을 움직였다.
"엄마.."
조모가 잠결에 흐르는 아이의 칭얼거림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떨리는 손으로 한동안 민석의 머리를 쓰다듬던 조모가 주먹을 쥐고 분노를 터트렸다. 천벌받을 년, 내 딸내미이라지만 그 년은 천벌을 받아야해! 암, 지 새끼를 버린 죄는 씻을수가 없는게야. 조모는 어느날 말없이 아이를 배어왔던 딸을 떠올렸다. 가난한 살람과는 맞지않게도 유난히 귀엽고 아리따웠던 딸아이는 언제나 부모의 자랑거리며 걱정이었다. 딸아이는 항상 자신의 가난함을 수치스러워했으며 미워했다. 순진하고 착했던 딸아이는 부모와 바램과 달리 어느순간 빗나갈대로 빗나가 있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갑작스레 가출을 한 딸은 결국엔 스무살을 다 채우기도 전 부를대로 부른 배와 함께 제 발로 집을 다시 찾아왔다. 꽃다운 나이에 결혼도 하지않은 처녀의 임신은 그 가족에게도, 그를 아는 주위 사람들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노인, 즉 여인의 남편은 불같이 화를 내며 딸을 혼내고 다그쳤다. 집안을 떠나갈듯 노인이 고함했다. 아이 아빠는 누구인가, 그것또한 부부는 알지못했다. 딸은 굳은 얼굴로 그저 고개를 저으며 알려줄수없노라고 말했다. 아이의 탄생과 함께 딸의 인생이 땅바닥에 내쳐질것을 잘 알고있음에도 부부는 차마 아이를 지우라는 말을 입에서 꺼낼수 없었다. 시간은 흘러갔다. 출산이 임박하고 부부는 감당못할 병원비에 그녀를 병원에 데려갈 생각조차 못하고 쓰린가슴을 부여잡고 그녀의 출산을 도왔다. 딸도, 아이도 무사했다. 하지만 딸은 그새 아이를 낳고는 어둠이 내린 그 시간, 다시 집을 떠나버렸다.
그 아이가 바로 민석이었다. 한동안 아이는 두 부부에겐 감당치 못할 짐덩이였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나가는 아이를 보며 부부는 또한 표현하지못할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아이가 말을 하고 제 스스로 생각할수 있을만치 되었을때, 노인은 회초리를 손에 들었다. 두 노부부의 바램은 소박했다.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는 말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해낼수있기를, 다른 아이처럼 운동을 잘하는 것보다 행동에 있어서 언제나 예의를 지키기를, 부부는 바랬다. 노부부는 아이를 혹독하게 가르쳤다. 적어도 아이가 부모가 없다는 소리를 듣지않길 원했다. 아이가 다른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울며 들어올때엔 부부는 아린 속을 한 채로 아이에게 엄하게 매질을 했다. 노부부는 아이가 더욱 단단해지길 원했다. 그것을 껴안기에는 아이가 너무 어리고 여리기에 여인은 마음이 아팠다.
민석의 조모는 민석의 뒤에 누워 또래에 비해 체구가 작은, 그렇기에 더욱 여려보이는 아이의 뒷모습을 품속에 껴안았다. 자글자글한 손이 아이의 머리결을 한번 두번 쓸어내렸다. 한동안 앓는 신음을 내던 민석이 그 손길에 그제야 고른 숨을 내쉬었다. 민석도 노부부의 마음을 모두 헤아리고있기에 그 때문에, 아이가 아무런 불평도 하지못하는 것을 조모는 잘 알고있기에 노부부는 더욱 민석이 애닳팠다. 아침이 돌아와 어두침침한 빛이 방안에 내리쬘때까지 조모는 뜬 눈으로 민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야, 느그 부모님은 뭐하시나?"
교실문 앞에 서있던 소년이 막 교실안으로 들어서던 민석에게 말을 걸어왔다. 셔츠단추를 두어개 풀어 헤친모습으로 삐딱하게 바지주머니에 손을 끼워넣은 소년은 벽면에 기대어 민석을 훑어내렸다. 민석은 소년의 기습적인 물음에 잠시 발을 멈췄다. 고개를 바닥으로 푹 숙인 민석은 못들은척 몸을 움직였다. 아 맞다, 너 부모없지? 소년이 클클대며 조소했다. 민석의 목울대가 한차례 움직였다. 가방의 어깨끈을 부여잡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입술을 꼭 깨물던 민석이 건조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로 향했다. 소년이 뒷문에 모여있던 다른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저 새끼 옆에 가지도마라! 할망구냄새밴다"
"아 미친새끼야 가래도 안가"
민석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가방을 자리에 내려놓았다. 의자를 책상에서 끄집어내고 막 앉으려고 할때 누군가 민석의 뒷통수를 후려갈겼다. 기울어진 고개에 머리카락이 얼굴로 쏟아져내렸다. 민석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가방문을 열었다. 딱 5분만 참자. 민석은 그렇게 다짐했다. 분명 5분 후면 선생이 교실에 들어올것이다. 그렇게 믿고서는.
"야, 야, 야"
소년이 민석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댔다. 하. 소년의 입에서 헛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석의 뒤에 서서 한동안 민석을 노려보던 소년이 교실 뒷문근처에 모여있던 무리를 불러냈다.
"이 새끼 내 말 존나 씹는데? 어떡하냐?"
무리들이 어슬렁거리는 발걸음으로 소년의 곁에 섰다. 니 귀까지 먹었냐? 가방안에서 필통, 교과서 몇권, 그리고 보자기에 곱게 싸인 양은도시락를 꺼내 책상서랍안에 정리하던 민석의 주위로 무리들이 빙 둘러섰다. 민석이 고개를 돌려 벽면에 달린 시계를 한번 쳐다보았다. 무리 중 가장 키가 큰 소년이 민석의 어깨를 짚고 책상 서랍속을 들어다보았다. 민석은 아무 말 하지못하고 몸을 굳혔다.
"이거 뭐냐?"
보자기의 묶음 부분을 잡고 도시락을 서랍에서 꺼내던 소년의 손목을 잡아 민석이 제제했다. 소년이 민석의 손에 잡힌 손목을 힘주어 빼내려했다. 돌려줘. 소년을 노려보면서 민석이 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아 시발 놓으라고. 내려놔. 놓으라고했다? 돌려달라고. 놔 미친새끼야. 남은 손으로 민석의 뒷덜미를 잡아 고개를 뒤로 젖힌 소년은 민석의 눈을 맞추며 천천히 말했다.
"너. 이제 신나게 쳐맞아도 넌 아무말 못할거야. 씨발, 왜냐고? 넌 부모가 없는 가난한 호로새끼일 뿐 이거든"
무리중 하나가 다가와 민석의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의자가 넘어졌다. 의자가 기울어짐에 놀란 민석이 손을 놓고 볼썽 사납게 고꾸라졌다. 바닥을 한바퀴 구르던 작은 몸은 벽에 닿아 강제적으로 멈춰세워졌다. 눈을 찡그리던 민석의 앞을 소년들이 막아섰다. 그 사이로 손목을 잡혔던 소년이 보자기를 풀어내는것이 보였다. 보자기가 나풀나풀 떨어져내렸다. 구리빛의 양은도시락을 이리저리 살피던 소년이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그 뒤를 바라보던 민석의 명치를 누군가 걷어찼다. 우윽. 민석이 예기치 못한 공격에 소리내어 신음했다.
"그거, 돌려줘, 제발"
허리를 굽혀 얼얼한 배를 움켜잡고 민석이 소리쳤다. 소년은 몇걸음을 걸어 쓰레기통 앞에 섰다. 도시락뚜껑이 열렸다. 도시락안에서는 아직까지 김이 모락모락 흘러나왔다. 소년은 그 속에서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는 쓰레기통 안으로 도시락을 떨어트렸다. 그 장면이 민석에게서는 슬로우모션처럼 느릿느릿하게 이어졌다. 조촐했으나 하나하나에 할머니의 애정이 가득 어린 반찬이 쓰레기통으로 투두둑 떨어졌다. 소년이 몸을 틀었다. 소년과 민석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 아이가 김칫국물만이 뚝뚝 떨어지는 빈 도시락을 흔들어보이며 민석을 향해 사악하게 웃어보였다. 개새끼. 민석이 이를 갈았다. 그 단어가 내뱉혀짐과 동시에 아이들의 구타가 민석의 여린 몸뚱아리로 떨어져내렸다.
여전히 민석의 시선은 도시락에 고정되어있었다.
저 왔어요!! 독자님들 ㅠㅠ 오늘은 구독료가 무료라고 하길래 서둘러서 가져왔어요! 빨리빨리 쓰고싶었는데 그저께에서어제까지 이틀동안 몸살이 나가지고.. 7~8?9?편까지는 민석이의 과거이야기가 시작될거에요 왜 자신을 괴물이라고 생각하게되었는지 천천히 풀어나갈예정이에요 독자님들한테 더 이야기하고싶은데 지금 운동하러나가야해서... 갔다와서 틀린부분도 고치고 사족도 더 덧붙일려구요! 암호닉 Jay 찌인빵 엘모 웬디 언어영역 홍홍님까지! 감사드립니다 ♥ 그외 신알신, 읽고계실 이름 모를 독자님들까지 사랑합니다! 더보기